## 115화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순서가 끝난 참가자들 중 반절 이상은 밖으로 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
하지만 난 대기실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리가 그대로 무대를 뛰어내려서 관중들 사이를 비집고 뛰쳐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리고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선 더더욱 가열 차게 비웃고, 경멸할 마음도 있었다.
오늘 그는 정말 끔찍하게 연주를 망쳐 놓았다.
내일 예선전 2라운드가 있긴 하지만, 내일 잘한다 하더라도 본선 진출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 손을 발로 짓밟고, 떨어지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껏 조롱할 수도 있다. 난 분명히 그를 끝장내 버릴 수 있었다.
말 몇 마디면 아주 간단했다. 음악을 무기로 그를 망가뜨렸듯, 사람의 말 또한 다루기에 따라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치솟는 독한 마음이 날 그렇게 유혹했다. 혹여나 그가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난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도 될 배경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이건 아닌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
침착하게 심정을 가라앉혔다.
분명하게 내가 바란 바대로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도취되거나 잘난 척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난 그냥 대기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제 실력을 내지 못하고 연주를 망쳐 버린 그리고리를 비웃기 위해서는 아니고, 하물며 그를 격려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대기실로 돌아올 그를 내팽개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대결을 건 내 의무이자 도리이기 때문이다.
“…….”
묵묵히 모니터를 응시하며 그의 연주가 끝나길 기다렸다. 엉망진창이지만, 그리고리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연주를 이어 나갔다.
그런 근성에 대해선 칭찬할 만했지만, 주변에서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저 자식 뭐야……? 입만 산 자식이었네.”
“□□□□□. 얼마나 하나 내가 벼르고 있었다.”
“내일 볼 일 없겠는데?”
그리고리가 대기실에서 계속 떠들었던 것들을 들은 사람은 많았다.
잘했어도 트집을 잡힐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망쳐 버리니 대기실의 다른 참가자들은 고소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난 이 모든 것이 거북스럽긴 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 또한 그리고리의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지금 저 폴로네이즈를 어떻게 생각해요? 타티아나도 같은 곡을 연주했었잖아요? 그것도 한 5백 배는 훌륭하게.”
“…….”
그게 그냥 훌륭한 연주로 들렸다면, 실망인데.
말없이 쳐다보자 아이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게 말이 많더니, 타티아나의 연주엔 한 마디도 못 했잖아요. 그 이유가 저기 있네요. 안 그런가요?”
그리고리를 감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렇게 직접 물어 오니 바른말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게 본 실력은 아닐 거예요.”
“……?”
슬그머니 옆에 와서 내 호응을 얻어 보려던 아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러니 내일 예선 끝나고 어떤 분이 사라질지, 예측하는 걸 너무 재미있어 하진 마시죠.”
말로 뱉자마자 필요 이상으로 까칠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들도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들렸다. 후회할 틈도 없이 그 아이가 말했다.
“30번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아니요.”
“그럼 저게 본 실력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저렇게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라고 대답하자니 잘난 척하는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하지만 미친 소리로 들리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아이는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고맙게도 돌아가서 다시 이러쿵저러쿵하진 않았다. 정말 신사적인 친구였다.
조금 조용해진 대기실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
박수갈채가 울렸다. 단순한 박수 소리에도 의사가 실린다는 것을 아는가? 짧고 강한 위로의 박수 소리는 간신히 일어선 연주자의 정신을 다시 뒤흔들어 놓는다.
보통 버티고 버티다가도 여기서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리는 청중들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곤,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로 들어왔다.
정말, 정말 못된 생각이지만, 그가 혹시 울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서 눈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
맙소사, 붉게 물든 눈가가 정말로 쿡 찌르면 곧장 눈물이 흐를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리고리는 이미 세연이라는 아이를 울린 적도 있기 때문에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제대로 연주를 한 세연에 비해 그는 연주자로선 열심히 준비한 것을 반절도 채 보이지 못하고 엉망으로 망쳐 버린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낀다.
“…….”
“뭘…… 어떻게 한 거야?”
가만히 바라보자 그리고리가 멈춰 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의 넋이 나간 목소리가 중얼중얼 들려온다.
“내가 아는 폴로네이즈의 선율이 한 번에 다 날아가 버렸어. 네가 친 연주가 내 머릿속에 있는 악보 위에 낙서를 해 버린 것 같았지. 조성이 뒤집히고, 아무 생각도 안 났어. 손이 기억하는 대로 무작정 쳐 냈지만 귀로는 이상한 소리만 들렸……. 대체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리는 내가 무언가를 했다고 확신하며 물었다.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자유곡으로 치러지는 예선전에서 내가 그리고리보다 앞서 영웅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난 거기에다가 곡에도 칼날을 숨겨 두었다.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는 분명한 장조의 경쾌한 음악이지만, 특정한 패시지를 잘못 읽는 것으로 전혀 다르게 들을 수도 있는 곡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함을 못 느끼겠지만, 음악이론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종종 실수해 버리는 지점. 화성의 함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난 그리고리를 그 함정으로 유도했다.
정상적으로 걷다가도, 작은 압정을 하나 밟는 것만으로 모든 균형을 잃고 절뚝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리는 좀처럼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약간의 잔재주예요. 제대로 된 음반을 다시 듣는다면 돌아올 거예요.”
“…….”
물론,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설명해 준들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자 그리고리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나에게 하는 욕 같진 않았다.
앞서 무언가를 들었든 간에, 스스로의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망쳐 버린 것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을 그 역시 잘 알았다.
그리고리가 이를 갈며 날 노려보았다.
“비웃으려면 비웃어.”
“…….”
이미 그럴 마음은 별로 없었다.
지금 그를 비웃어서 울려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난 앞으로 계속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 것만 같다.
“욕을 하든가.”
이 아이는 아직 내 욕이 얼마나 비싼지 모르는 모양이다.
묵묵부답으로 있자 그리고리가 자포자기하는 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니면, 뭘 원해? 내가 저 한국인에게 사과라도 하면 될까?”
“……사과는 해 주세요. 하지만 꼭 그런 것을 원했던 건 아니에요.”
그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치욕과 분노를 못 이겨 어깨를 떠는 그리고리를 보며 난 조용히 단어를 골랐다.
잘난 척하는 투나 조롱하는 투는 당연히 안 된다. 훈계하는 투도 안 된다.
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냥…… 콩쿠르에 왔다면 각자 본인의 음악에만 집중했으면 할 뿐이에요.”
그리고리가 허탈한 듯 말했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렇네요.”
“……말로 하면 되잖아.”
분명히 말로도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건 그리고리였다.
애초에 난 단어와 문장 조금으로 또래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전 말이 서툴러서요.”
하지만 음악으론 할 수 있지.
언제나 난 말과 음악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음악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리는 성이 난 그대로 날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난 내일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떨어지게 생겼어. 어때, 속이 시원해?”
나도 내가 속이 좀 시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난 스스로의 역할을 조금 알아 가고 있었다.
“그만두실 건가요?”
“그만둬? 아니!”
약간의 도발만으로도 그리고리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핏대를 세웠다.
“난 내일 슈만의 아베그 변주곡을 칠 거야! 빌어먹을, 네 마음대로 해 봐!”
이번엔 뺏기지 않겠다는 듯, 그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태도는, 연주자로서 조금 마음에 들었다.
연주자에게 있어서 때로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멘탈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리고리는 오늘 무대에서의 일로 완전히 꺾여 부러져 버린 것 같진 않았다.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각자 본인의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젠장할!”
그리고리는 거칠게 욕을 하더니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도 안 닫고 나가 버린지라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대기실의 모두가 밖으로 열린 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쪽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설명을 좀 해 보라는 듯한 그 눈빛들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들으셨죠? 내일은 본 실력을 보여 주신다네요.”
조금 무섭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뭘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 실례되게.
***
조금 더 대기실에 남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
조용하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난 그렇게 생각했다.
몇 시간 동안 전쟁터에 있다가 갑자기 별세계에 뚝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바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 누구도 날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타티아나!”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날 불렀다. 갑자기 현실감이 확 되살아났다.
“……?”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날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난 덜컥 겁이 났다.
“……아나스타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요 이틀간 연습실에 틀어박혀선 콩쿠르에 올릴 곡들을 연습했었다.
이틀 내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곡들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고, 그녀는 이 정도 준비와 완성도라면 우승도 충분히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굉장히 기대해 주었다.
그런데 난 콩쿠르 첫 곡부터 준비하지 않은 곡을 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제발 그게 배신감이 아니길 빌 뿐이다.
도망쳐 버릴 수도 없어서, 주춤거리며 다가갔더니 아나스타샤가 묵묵히 날 내려다보았다.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혹시 키 컸나요,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예…….”
완전히 죄인 된 심정으로, 수백 마디의 설명과 변명 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일단 그 그리고리가 대기실에서 어떤 몰상식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부터 설명하고 거기에…….
“네 뒤에 나온 걔 때문이지?”
“……!”
난 아나스타샤에게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렇게 다분히 공격적으로 곡을 바꿔서 연주했는데, 뒤따라서 똑같은 곡이 엉망으로 연주되었잖아.”
사실 어렵게 추리할 것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대번에 무대 뒤에서 있었던 일들을 꿰뚫어 보고는, 범인을 특정해 낸 탐정처럼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걔랑 대결이라도 한 거지? 즉흥적으로.”
“……예.”
난 길게 말하지 않고 곧장 수긍했다.
아나스타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콩쿠르 중인데?'
“어차피 콩쿠르도 일종의 대결이잖아요?”
어이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하…….”
그러곤 날 내려다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난 뭐라고 더 말해 봐야 역효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처분을 기다렸다.
곧, 아나스타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승산이야 충분했고, 너도 생각이 있었겠지…… 하지만 감수해야 할 것도 있었어, 분명히. 알고 있는 거야?”
“감점되었겠죠. 알아요.”
“큰 점수는 아니겠지만.”
“그렇죠.”
태연하게 대답하자 그녀가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앗, 대답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난 바로 당당했던 태도를 지우고 꼬리를 내렸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무작정 사과하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할까?”
“예?”
“어쨌든, 네가 이긴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아. 그놈이 어쨌건 난 상관 안 해.”
아나스타샤는 간단하게 그렇게 상황을 일축했다.
그러고는 정말 간곡하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내게 부탁해 왔다.
“하지만 준비한 곡을 접어 가면서까지 그러는 건…… 안 그랬으면 좋겠어.”
숨이 턱 막혔다.
난 멀거니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
“…….”
도저히 무언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게, 아나스타샤가 날 올곧게 바라보았다.
내가 콩쿠르에서 갑자기 곡을 바꾼 것이 그녀에겐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새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실감이 되었다.
난 자책하며 말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나스타샤는 제가 콩쿠르에 충실하게 임하길 바라셨겠죠. 그건…….”
“뭐? 충실? 그건 전혀 아닌데.”
무슨 소리야?
내가 콩쿠르 예선 탈락의 위험도 무릅쓰고 멋대로 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것 아니었어?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 넌 피아노에 굉장히 진지하고 연습량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사실 마냥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녀가 이어 말했다.
“절대 아니지.”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날 평가했다.
이건 약간 의외였다. 그녀는 분명 날 피아노 외엔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구제불능의 범생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간 책임감도 없고 의무감도 없는 못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인 모양이다.
살짝 반성하며 침묵하자, 아나스타샤가 날 조용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음엔 또 밟아 버리고 싶은 녀석이 있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그래도 콩쿠르라면 준비해 온 곡으로 해라, 이 말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착한 아이이길 기대하는 건 아니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하되, 기본은 지켜 달라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상당히 민망한 단어가 들려서 반항했다.
“밟다니…… 그러진 않았어요.”
“우와, 시치미 떼는 것 봐라.”
아나스타샤가 이제야 웃음기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멘탈을 산산조각 내 놓았잖아? 아까 보니까 대기실에서 뛰쳐나가던데?”
“아…….”
“둘 중 하나가 바로 안 나왔으면 내가 거꾸로 쳐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어쨌든.”
궁금해 죽겠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그 녀석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그게…….”
막 설명을 하려는 찰나였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우리 둘은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약간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에르네스트가 서 있었다.
“에르네스트!”
“뭐 해? 여기서. 끝까지 볼 것도 아니면서.”
“그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 내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려다가, 순간적으로 에르네스트에게 달려들어서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세상에, 에르네스트 정도면 얼마나 점잖고 착했던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그의 머리에 손을 대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내 눈빛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상당히 꺼림칙하다는 태도로 반걸음 물러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너무 그렇게 위험한 사람 보는듯한 눈은 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