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우리 가족과 베샤스트니흐 가족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내 친구로서 함께였고, 그래서 저녁 식사에 모인 사람들은 총 여덟 명이나 되었다.
“직접 가 보지 못해 미안하구나, 타티아나.”
“괜찮습니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뒤늦게 일을 마치고 합류한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난 새삼 에르네스트와 사샤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 우월한 유전자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사업가가 아니라 영화배우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멋진 외모를 지닌 중년이었다.
아버지가 재차 감사를 표했다.
“와 주어서 고맙소, 스테판.”
“별말씀을, 유리. 하하하, 재작년 에르네스트가 이 콩쿠르에 참가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에르네스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올해 타티아나가 우승하게 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는 베르체노프와 베샤스트니흐 두 가문이 연달아 석권하게 되겠군요?”
아버지가 듣기에도 그것이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 참 멋진 일인 것 같소.”
“하하하, 전 그리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히 그리 될 겁니다. 흠, 에르네스트.”
그리고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아들인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옆에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가 뚱하니 고개를 들었다.
“예.”
“예선전을 본 네 생각은 어떠냐?”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선 세 살짜리가 봐도 명확할 정도였고, 기특한 에르네스트는 그 정도는 충분히 읽고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알았다.
“타티아나의 적수는 없어 보이더군요. 충분히 우승하고도 남을 겁니다.”
“들었습니까? 하하, 전 우승자의 말이니 신뢰해도 좋습니다, 유리.”
“정말 믿음이 가는군. 고맙소, 스테판, 에르네스트.”
나 또한 여기에서 이제 예선전 1라운드를 치렀을 뿐이고, 실제로 마흔 명이나 되는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우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 봐야 아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어설픈 농담을 하나 던질까 생각하다가, 그것도 바보처럼 보이겠다 싶어서 그냥 감사하다고만 인사했다.
그것만으로도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흡족해했다.
식사를 마치고, 어른들은 작은 모임을 따로 가지게 되었다. 아마 술이 포함된 모임이리라.
그리고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그리고 사샤는 따로 빠져나왔다.
우리 네 명 모두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모임을 가질 곳은 한 장소뿐이었다.
“누나, 폴로네이즈 한 번만 더 연주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까요?”
연습실에 비치된 소파는 좁았고, 사샤는 내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난 사샤가 하는 부탁은 무슨 일이라도 들어줄 생각이었으므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사샤, 타티아나는 내일도 무대에 올라야 해. 지금 놀 때가 아니야.”
“나도 알아, 형.”
“그런데 지금 놀아 달라는 거잖아. 귀찮게 하지 마.”
“……괜히 그래, 형은.”
사샤는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얌전히 소파에 도로 앉았다.
내 상황을 고려해 준 것이리라. 예뻐라, 조금은…… 한 3시간쯤은 사샤가 바라는 대로 놀아 줘도 괜찮은데 말이지.
에르네스트가 자꾸 뭐라고 하면 집에 보내 버리고 사샤와 놀아 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서서 나와 사샤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약간 토라진 투로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뭘 모르네. 지금 타티아나의 머릿속엔 내일 그 녀석을 또 어떻게 괴롭힐까 그 생각밖에 없을걸?”
“그 녀석?”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고 난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나스타샤.”
“아니긴 뭐가 아냐.”
“정말, 앞으론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흥.”
난 아나스타샤를 달래기 위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녀와 함께 연습했던 곡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어딘가 살짝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보였다.
분명 용서해 줬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조금 남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녀석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야?”
도중에 에르네스트가 끼어들어서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오늘 내 연주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곡을 바꿨다는 것을 그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의상으로라도 잘했다고 한 마디도 안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무언가를 캐치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조금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설명해 주기로 했다.
“못 보셨나요? 제 뒤 번호인 30번 남자애요. 이름은 그리고리.”
“난 네 연주 끝나고 나와 버려서 못 들었어.”
“……아, 그러신가요.”
내 순서가 끝나자마자 에르네스트는 쿨하게 홀을 나와 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럼 그게 심사위원들을 향한 게 아니라 뒤 번호 참가자를 향한 것이었단 말야?”
“음…… 맞아요.”
에르네스트는 심각하게 날 쳐다보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게 다야?”
“……그런데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다른 곳도 아니고 콩쿠르 무대에서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음악가 전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 놓곤 말이지, 그게 한 놈 때문이었다고?”
난 어이없어하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도 그렇게 들으셨나요?”
“물론, 그 자리의 모두가 네가 흔드는 깃발을 따라가다가 진창에 빠져 휘청했을걸. 난 균형을 다시 찾긴 했지만,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어.”
에르네스트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타티아나. 언제부터 그런 것까지 할 수 있게 된 거야?”
“…….”
언제부터일까?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난 항상 한 건반으로 한 음밖에 못 내고, 주법도 굉장히 한정적인 이 악기로 어떻게 하면 다양한 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구해 왔다.
그리고 몇 가지 것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연주하는 내 쪽뿐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음감과 심리에 달려 있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고 몇 가지 것들을 터득했다. 난 그 음감을 혼란시키고 심리를 조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별로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음악은 언제나 마법과도 같았으니까.
“돌아가야 할 집을 알게 되었으니……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본 거예요.”
난 음악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 잘 할 줄 몰랐고, 때문에 그와 공유하고 있는 비유로 조금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진지하게 내 말을 들었다.
“폴로네이즈는 조금 용감하게 갈 수 있었어?”
“예. 모든 곡을 그렇게 할 수 있진 않아요. 운 좋게도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는 제게 조금 더 익숙한 곡이었고, 샛길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 샛길로 유도했고?”
“예, 기술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요…….”
“아니야. 대충 뭔지 알겠어. 이즈음을 말하는 것 같은데. 반복하기 이전에.”
에르네스트는 불쑥 그렇게 말하더니,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그러곤 영웅 폴로네이즈의 한 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무언가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벌써 굉장히 근접해 있었다.
난 그에게 말했다.
“맞아요. 그 지점.”
“여길 정확히 어떻게 한다고? 이렇게?”
“아뇨, 본 프레이즈를 고정하지 마시고 루바토로 비틀어서 뒷마디를 자르세요. 정확하게는 왼손에 맞춰요.”
“이 말인가.”
더 가까워졌다.
난 에르네스트가 순식간에 내 기술을 따라 하는 것을 보며 기가 막혔다.
사실 무언가 엄청난 기술인 것도 아니고, 그 본질은 그냥 모르면 당하는 간단한 잡기술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리고리를 끔찍하게 무너뜨리고 다른 음악가들에게도 혼란을 주었던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쉽게 쫓아오고 있었다.
“…….”
그나저나 내가 얘한테 이걸 왜 가르쳐 주고 있지.
“아셨나요? 별것 아니죠?”
“정확히 이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한번 보여 주겠어? 내가 들었던 건 이보다 훨씬 더 무의식중에 파고드는 직관성을 가지고 있…….”
“싫어요.”
“……뭐?”
한껏 말이 많아져 있던 에르네스트가 얼빠진 투로 물었다.
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사실 이건 누구에게 가르쳐 줄 만한 것도 아니고요, 이 이상 했다간 오늘 밤에 쇼팽이 절 야단치러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걸 걱정하기엔 이미 늦은 게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싫어요.”
난 딱 잘라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날 보더니, 낮게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티아나는 오늘 꿈에서 쇼팽을 만나겠군. 부럽네. 혹시 그를 만나면 좀 물어봐 주겠어? 발라드 4번의 코다를 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죄송하지만 전 쇼팽에게 달리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그래, 그렇겠지.”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무언가 묻지 않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아마 이 정도 힌트만으로도 그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만큼 대단한 천재였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들이 왜 하나같이 입을 모아 에르네스트가 몇십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추켜세우는지 이해가 갔다.
이렇게 이해력이 좋고 흡수가 빠르다면,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정말 에르네스트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그나마 내가 가진 것이 조금 더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난 가능하다면 뭐라도 더 떠먹여 주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엔 못 느끼던 그런 감정이었다.
***
예선전 2라운드를 앞두고, 콩쿠르장에 있는 화장실에서 퀭한 눈으로 거울을 보며 절망했다. 이게 뭐야 대체.
“…….”
우울했다.
사실 우울할 일이 아닌데 우울했다.
어젯밤, 정말 쇼팽이 꿈에 나왔다. 세상에나, 에르네스트에게 무한한 감사를.
난 본래 꿈을 잘 꾸지 않았고, 하물며 존경하는 음악가를 꿈에서나마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꿈에서도 잔뜩 흥분해선 악수라도 신청하려는 찰나, 쇼팽은 자신의 곡으로 이상한 짓을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난…… 약간 미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약간이 아니라 많이 미쳤지. 난 내가 해석의 자유를 가진 연주자이며 음악가이자 구도자라며 대들었고…… 잠을 설쳤다.
“…….”
“타티아나, 너 오늘 대체 몇 시에 일어났어?”
“새벽 2시요…….”
“……긴장했니?”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정말 막 나가는 강심장으로도 맨정신으론 못 할 짓을 바로 어제 해 놓고선 이제 와서 긴장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깨어나선 뭘 했는지 생각났다. 잠에서 깨어나선 자책감과 절망을 느끼며 뒹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쇼팽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을 한 거야, 타티아나!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나스타샤가 깨지 않도록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곤, 거실로 나와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폰을 끼고 쇼팽의 곡들을 연속 재생시켰다.
반성의 감상회였다. 그간 난 너무 천방지축처럼 살고 있었다. 반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난 2시간 남짓밖에 못 잤다. 본래 잠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 2시간 자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볼썽사납게 하품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틀어막고, 거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보지 않고 일부러 시선을 내렸다.
오늘은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턱 밑까지 꼼꼼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가 손수 고르신 것이었다.
어제는 내 마음대로 했으니 오늘은 아버지 뜻대로 하시겠단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입었다.
“안 답답해?”
아나스타샤가 조금 질색하는 투로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겠나요?”
“……너희 아버지도 참.”
아나스타샤는 툴툴거리더니 내 어깨 쪽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편하게 해 주려는 것 같지만, 어림도 없었다.
“괜찮아요, 아나스타샤.”
“아니, 팔이라도 편해야 하잖아.”
“보기보단 편해요. 남자들도 다 소매 있는 슈트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잖아요.”
“피 안 통할 것 같은데?”
“잘 통해요. 괜찮아요.”
그렇게 난 아나스타샤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 줘야 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오고 나서, 난 곧장 그녀를 끌고 회장 안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커피를 마시고 싶기도 했지만, 가뜩이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몸 안에 카페인을 넣었다간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그냥 시원한 주스나 한 잔 마실 생각이었다.
그렇게 카페테리아의 입구로 들어설 때였다.
“읏.”
난 커피를 들고 나오는 사람을 피해 급히 물러나야 했다. 거의 부딪힐 뻔했다.
커피를 들고 있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사과해 왔다.
“엇, 미…… 타티아나?”
그제야 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피아노 부문 참가번호 30번. 그리고리가 커피를 들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
어제 마지막엔 호기롭게 소리를 지르고 나가 버리긴 했지만, 지금 그가 날 얼마나 불편해할지 안 봐도 훤했다.
그리고리는 어물거리더니 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태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아나스타샤는 모르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차가운 면이 있었다.
“왜 사과를 하다 말아요?”
“……?”
그리고리가 당혹스럽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았다. 아나스타샤가 계속 말했다.
“부딪힐 뻔했다면 사과를 제대로 하셔야죠.”
“……아는 얼굴을 보니 좀 당황해서요.”
“아는 얼굴?”
아나스타샤가 날카롭게 되풀이해 말하더니, 대뜸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되게 쉽게 말하네요?”
“아나스타샤.”
난 급히 그녀를 불렀다.
어제 내가 왜 화가 났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리가 대기실에서 무슨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도 아닌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적의를 보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리 역시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굴렸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팔을 잡아끌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던졌다.
“어제 연주는 잘 봤어요. 상당히 인상 깊더군요. 배운 바 많으실 테니 오늘도 기대하죠.”
그리고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아나스타샤는 덧붙였다.
“하지만 똑바로 알아요. 타티아나는 그 누구의 선생도 아니라는 걸.”
“…….”
“가자, 타티아나.”
내 팔을 잡아끄는 아나스타샤의 손아귀를 느끼면서 그녀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