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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7화 (117/1,277)

##  117화

“아나스타샤.”

“…….”

넌지시 아나스타샤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

딱히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무슨 생각인지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녀를 더 부르지 않고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그렇게 나와 아나스타샤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서로에게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미안해.”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낮게 눌린 목소리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온다.

“그냥…… 난…….”

아나스타샤는 답잖게 웅얼거렸다.

방금 그리고리를 윽박지르고 쫓아 버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웃으며 받아 주고 안심시킬 말들을 생각하며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돌연 쌍심지를 치켜세우더니 내게 말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다 네 탓이야.”

“……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날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는지, 눈에 힘을 풀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내 탓이라는 주장을 거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잖아. 아까 그 녀석, 왜 보자마자 네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되는 거야?”

“무, 무슨 말씀이세요?”

계속 바보같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것 아니야? 곡까지 바꿔 가면서 대결을 걸었잖아. 그런데 왜 눈을 마주치자마자 네가 죄인이 된 것처럼…… 그러냐고.”

“그건…….”

“내가 맞혀 봐도 돼?”

단순히 맞혀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통찰력은 굉장히 날카롭고 예민하다.

“그 녀석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면 네가 그 눈을 피할 이유가 없어. 물론 잘 알아, 네가 되레 더 비웃고 놀리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 네 성격에 그렇겐 못 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욘 없잖아?”

그리고리와 마주친 순간, 그가 날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피해 주는 게 일종의 배려가 되리란 생각도.

곧바로 깨닫진 못했지만, 그 저변엔 죄책감이 깔려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은 정확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타티아나 너는…… 이 와중에도 그 녀석이 잘되길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이번에야 어쨌든, 연주자로서 더 클 수 있도록. 그러니까 너무 심했던 게 아닐까 살피고 있는 거야.”

“…….”

한 마디도 못 하고 그 말에 수긍했다.

정말 내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리고리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까? 다시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치는 건 꿈도 못 꾸도록?

내가 미쳐 버리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하진 못할 것이다.

난 그리고리가 앞으로도 연주자로서 피아노 앞에 서길 바라고,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성숙하길 바랐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켰다.

“난 그게 이해가 안 가.”

“…….”

“네가 선생님은 아니잖아? 왜 그러는 거야? 그것도 바로 어제 만난,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걔랑 더 볼일이라도 있어?”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답답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푸념하듯 말했다.

“저도 제가 답답해요.”

“무슨 말인데 그게.”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녀석, 널 아주 편하게 부르더라?”

그랬……나?

그냥 타티아나라고 불렀던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어제 그 정도로 눌러놨으면 말도 못 붙여야 정상인데…… 진짜로 선생처럼 미지근하게 대했던 것 아냐? 쉽게 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돼.”

“…….”

어제 대기실에서 진짜 그리고리를 울려 버릴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입을 다물자 아나스타샤가 이마를 짚었다.

“으휴…….”

더 이상 답답함을 토로할 힘도 없는지, 한숨을 푹 내쉬던 아나스타샤가 이대로 둘 순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타티아나. 평소에 너 비밀리에 경호해 주시는 분들을 네 옆에서 다 보이게라도 해야…….”

섬뜩해졌다.

내 전담 경호원인 빅토르와 자하르, 소로킨.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지만, 내가 어딜 가든 그들이 옆에 밀착해서 따라붙는다면 농담 하나 없이 정말 마피아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들이 내 옆에 있는 게 창피하단 뜻이 아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조리 겁을 주고 다니고 싶지 않단 뜻이었다.

이번만큼은 얌전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쳤다.

“아나스타샤! 그건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무리 봐도 넌 그렇게 독한 애가 못 돼. 그러니까 아예 다른 놈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게 맞지.”

대체 날 어떻게 보이게 만들려는지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가 내 가장 친한 친구로서 경호 상태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면 충분히 그녀의 말대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내가 격렬하게 반대한다면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결국 난 그녀를 이길 수 없을 테고…….

잠깐, 가장 친한 친구?

“저, 그…… 아나스타샤가 있잖아요!”

“……어?”

난 갑자기 떠오른 탈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처럼요, 제가 바보처럼 굴어도 아나스타샤가 절 지켜 주시니까…….”

“내가? 지켜?”

“아…….”

아차 싶었다.

이건 아나스타샤에게 너무 실례되는 이기적인 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딱히 날 위해 무언가 힘써 주도록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겨우 열다섯 살인 내 친구였고, 나 따위보단 사실 그녀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나은…….

그때, 곰곰이 내 말을 곱씹으며 생각하던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너무 귀찮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나스타샤가 틀린 이야기를 했다면 모를까, 나보다 몇 배는 어른스러운 그녀는 언제나 옳은 말만 했다.

나보다 더 나에 대한 걱정이 많은 그녀에게 감사한다면 모를까, 귀찮아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요, 전혀요.”

“정말?”

“물론이에요.”

“그런 거겠지?”

“예?”

이상한 말을 하더니, 아나스타샤는 반색하며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우곤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덜커덩 의자를 흔들었지만, 이미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눈빛이 반짝거렸다.

“타티아나, 오늘 했던 말 다 잊어버려.”

“……예? 잊으라니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넌 그냥 너대로인 게 좋아. 그걸 내가 잊고 있었어.”

“……?”

뭐라고요?

“아무 놈들이나…… 어쨌든 그런 건 모두 착각에 불과해. 안 그래?”

“……음, 예?”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싱글벙글 웃으며 커피를 들었다.

뭔가 더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도 주스를 들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의 기분이 풀렸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날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홀로 대기실로 향했다.

“…….”

예선전 2라운드.

생각이 조금 복잡했지만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내 연주는 테크닉적으론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심각하게 많은 점수를 감점당하진 않았을 테고, 오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마흔한 명 중 열댓 명 정도 뽑는 본선진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까진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심사위원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정도는 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어제 1라운드에서 난 그 정도 자신감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준비한 곡이나 잘하면 나도 만족하고 모두 웃을 수 있는…….

“……!”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두고 있던 얼굴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그리고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물론 그가 먼저 반갑게 인사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 역시 먼저 알은체를 하진 못했다.

카페테리아 앞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는 나 대신 상당히 신랄하게 그를 후벼 팠다.

그건 음악가뿐이 아닌, 남자로서 그의 자존심에도 상당히 스크래치를 낸 일이었다.

그리고리가 그로 인해 차라리 내게 아무 말도 안 건다면 모르겠지만 무언가 말을 건다면 그건 별로 좋은 말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살짝 불안해하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까 네 언니, 장난 아니던데.”

“……?”

루슬란 오빠가 여장을 했었단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방금 전만 해도 오빠는 멀쩡하게 있었고 난 언니가 없는…….

“아나스타샤 말씀이신가요?”

“아나스타샤라고? 언니가 아니라 동생이었나?”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제 친구예요.”

“아…… 그래?”

“…….”

무슨 태도지 이건?

어쩐지 살짝 짜증이 났다.

약간의 책임감 등을 생각하고 있던 머리에 안 좋은 감정이 스민다.

사실 그리고리를 보면 아나스타샤가 했던 일에 대해서 대신 사과라도 건넬 생각이었는데,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럼.”

“자, 잠깐만.”

무시하고 구석에 가서 벽 보고 명상이나 하려는데 그리고리가 날 불러 세웠다.

나도 모르게 냉랭한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그…… 있잖아.”

어제 그 까불거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굉장히 경계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가 날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의 걱정과는 별개로 그가 날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한참을 그러던 그리고리가 말했다.

“오늘 무슨 곡 올릴 거야?”

“제가 그걸 왜 말씀드려야 하죠?”

까칠하게 대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그걸 왜 궁금해하지? 내가 준비한 곡들의 리스트는 아나스타샤와 미하일 선생님밖에 모른다.

물론 알려 준다 한들 그가 내게 무슨 영향을 끼칠 방법은 전무하겠지만, 그래도 굳이 그럴 이유는 모르겠다.

불퉁하게 쏘아보자, 그리고리가 조금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제 난 말해 줬잖아.”

“…….”

그야 그렇긴 하지만……. 내가 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리는 조금 더 확신을 가졌는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 왔다.

“아베그 변주곡을 칠 생각이야?”

슈만의 아베그 변주곡.

난 슈만 특유의 화성과 느낌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고, 아베그 변주곡 역시 좋아라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조금 어이가 없다.

“제가 왜요? 그럴 생각 없어요.”

“하…….”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과잉행위였다.

난 딱히 그리고리를 견제하거나 어떻게 할 생각이 아니라, 그냥 대기실에서 망나니처럼 군 것에 대해 혼쭐을 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리고리가 지금처럼 조금 얌전히, 다른 참가자들을 방해하지 않고 있어 줄 생각이라면 나 역시 그에게 더 이상 무언가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이 이상으로 뭘 하다가 나 스스로도 컨트롤을 잃게 될 것 같아 그것도 두려웠고.

하지만 그리고리는 척 보기에도 내 말을 안 믿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상관없어. 네가 치든 안 치든.”

“안 칠 거예요.”

곧바로 받아치자 그가 멀뚱히 날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어요.”

“……어쨌든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난 잃을 게 없거든.”

“…….”

잃을 게 없긴 왜 없어?

콩쿠르 예선 점수가 위험하기 때문에?

연주자가 잃을 게 얼마나 많은 생물인지 네가 뭘 안다고 지금…….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표출하기엔 매우 부당한, 그런 감정.

난 짜증을 가라앉히며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꾹 눌렀다.

“불편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당신이 무슨 곡을 올리든 관심 없어요.”

“…….”

내 한마디에, 눈에 띄게 풀이 죽는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다. 그러니까 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하게 만드는지, 정말 난 잘 모르겠다.

끔찍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잃을 것이 없는 당신이 어떤 연주를 보여 줄지에 대해선 조금 관심이 있죠.”

“……!”

무슨 강아지처럼 고개를 드는 걸 보며 거의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난 지금 웃을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자격이 되는 입장도 아니었다.

난 깐깐하게, 할 말만을 했다.

“그러니 준비한 곡에 집중해 주세요.”

그리고리가 수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이번엔 어제 같지 않을 거야. 오늘 네가 아베그 변주곡으로 다시금 내 머리를 휘저어 놓아도 이번엔 절대 흔들리지 않…….”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리는 결국 내가 소리를 지르게 만들고야 말았다.

아, 짜증나. 역시 아나스타샤의 혜안은 언제나 옳았다.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게 맞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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