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8화 (118/1,277)

##  118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의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일곱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 마트베이 아파나시예비치 옐라긴은 막 연주가 끝난 28번 참가자의 채점표에 점수를 적어 넣고는 다음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곤 골치가 아파 와서 머리를 싸맸다.

“크흠…….”

참가번호 29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그녀는 진행위원회에 오디션용 DVD를 보내왔을 때부터 어마어마하게 주목받은 인물이었다.

나이는 열다섯 살.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의 8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으로 그 프로필만 본다면 여느 참가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베르체노바라는 성에서 혹시 재벌인 베르체노프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닐지 추측했고, 실제로 베르체노프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가문 때문에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어 관심을 얻을 순 있었지만,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은 되레 심사위원들을 더더욱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이었다.

재벌가의 딸이건 총수 본인이건, 음악의 세계에 왔다면 맨몸으로 피아노를 가지고 보일 수 있는 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그렇게 턱을 당기고, 팔짱을 끼고 있던 심사위원들은 30분 남짓한 타티아나의 오디션용 DVD를 다 보고는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중앙음악학교에 있다고요……? 그것도 8학년 편입? 대체 왜? 본교 영재클래스에 특례입학을 하지 않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심사위원이 중얼거렸다.

마트베이는 적잖이 동감했다. 저 정도 실력이 있다면 굳이 11학년까지 꽉 채워서 음악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당장 어느 음악원이라도 장학금을 줘 가면서 타티아나를 모셔 가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베르체노프가에 장학금이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당연히 DVD 오디션 통과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콩쿠르가 시작되기도 전에 주목받은 참가자였다.

마트베이 역시 기대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 30년 이상을 살아온 그는 타티아나의 음색에 꽤나 매료되어 있었다.

실제 무대가 아니라 DVD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타티아나가 실제 무대에 올라 연주를 보여 준다면, 이 회장 전체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제, 타티아나가 무대에 올랐고, 실제 일대 파란을 몰고 오긴 했다.

일반 청중들에겐 화려한 스타성을 지닌 신예로, 심사위원들에겐 문제 덩어리로.

‘이 해석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하죠?’

‘아주 묘해요. 이조를 한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군요.’

‘미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

마트베이는 옆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심사위원들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천진난만하게 웃는 타티아나를 보며 조금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연주한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선율과 화성의 구조를 타티아나는 완전히 다르게 들리게 만들어 놓았다.

연주되는 곡 자체가 악보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곡이 시작되고 잠시 후 시작된 무언가가 인위적으로 모두의 감각을 마비시켜 음치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들어 보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폴로네이즈를 듣게 된 마트베이는 확신했다.

이것은 실수나 연습 부족이 아니라 되레 타티아나가 이 곡에 대해 너무나 낱낱이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종의 실력 과시라는 것을.

수백 년이나 된 곡을 남들보다 잘 연주해야 하고, 보다 뛰어나야만 하는 콩쿠르에서 그러한 실력 과시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딱딱하고, 원전에 가까운 연주가 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수학적으로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 이상을 노릴 실력이 된다면, 당연히 그리하는 것이 좋았다.

심사위원들 역시 음악가인 이상 보다 훌륭한 연주를 보인 쪽에 점수를 많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나갔다.

지나치다 못해 건방져 보일 정도였다.

마트베이는 DVD에서 보았던 깔끔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 곡들을 연주했던 타티아나가 이렇게 막 나가는 곡을 홀에 터트린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고, 그녀의 예선 1라운드 채점표에 1점을 주었다.

5점 만점에 1점은 아주 박한 점수였다.

피아니스트로서 지녀야 할 기술적 부분엔 흠잡을 곳이 없고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음악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세가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청소년 콩쿠르라지만 엄격해야 할 부분에 있어선 성인들과 다를 바 없이 엄격해야만 했다.

이것은 객관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였다.

특히, 뒤이어 연주한 30번 참가자의 망가져 버린 연주를 듣고 나서, 마트베이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고수했다.

오늘 예선전 2라운드도 타티아나가 그렇게 심사위원들을 우습게 보고, 음악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해서 억지로 다른 참가자들을 찍어 누르고 올라서려 한다면, 또다시 1점을 주어 철저하게 가로막을 생각이었다.

“하아…… 젠장.”

자신의 필체로 숫자 1이 쓰여 있는 채점표를 내려다보며 마트베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좋은 실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펼쳐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심사위원 중엔 5점을 준 심사위원도 있었다. 문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력에 비해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살며시 눈을 감아 버린 것이었다.

마트베이는 그리하지 않았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타티아나가 자신을 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심사위원의 권한으로 준 점수라 할지라도 1점이라는 점수는 싸움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트베이는 같은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선배이자 동료로서 타티아나와 되도록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트베이는 자신의 채점표를 고집했다.

무슨 말이 나오든 간에 자신이 할 말은 명확했다. 심사위원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해서 정당한 점수를 주었을 뿐이다.

“어디…….”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마트베이는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예선전은 모두 자유곡이다. 타티아나가 무슨 곡을 가지고 나올진 심사위원인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수작을 부린다면, 마트베이는 점수로 답할 뿐이었다. 여기엔 그 어떤 타협도 없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무대 뒤편에서 올라왔다.

이때까지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큰 박수가 쏟아져 내렸다. 박수 소리가 홀에 울려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조금 파격적이기까지 했던 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상아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손목 끝까지는 물론, 턱 밑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는 맨살이라고는 얼굴과 손, 발밖에 드러내지 않았다.

보통 소매가 없는 편한 드레스를 입는 연주자들의 성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것 역시 또한 상당한 파격이었다.

작게 인사하며, 타티아나가 심사위원석을 일견했다.

순간, 마트베이는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심사위원석은 조명이 없이 어두워서 이쪽의 표정을 보진 못했겠지만, 마트베이는 타티아나가 무언가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

그게 무엇인지는 연주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

종달새라는 제목의 곡이 감미롭게, 애절하게 홀을 울렸다.

마트베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제에 이어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평범하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지금 보이는 연주는 어제 있었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변화가 아닌, 음악적으로 월등하게 앞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밀리 알렉세예비치 발라키레프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버전이 더 유명한 이 곡, 종달새는 본래 19세기의 작곡가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가 1840년에 작곡한 열두 곡의 연가곡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별 중 열 번째 곡이었다.

테너와 소프라노를 위해 지어진 성악곡이었고, 애틋한 가사를 가지고 있었다.

마트베이는 지금 그 가사가 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늘과 땅에 노래가 가득하다는 가사로 시작되는 원곡처럼 홀 전체에 소리가, 노래가 가득해졌다.

오로지 음악성에만 집중하는 타티아나가 전력으로 보이는 곡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몽환적이지 않게, 깔끔하지만 건조하지 않게, 달콤한 종달새의 울음소리 하나에도 페이소스가 짙게 깔리도록.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 작품 64-5번의 부제 역시 종달새인데, 그 곡에서 보이는 밝고 사랑스러운 종달새와는 달리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음색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귓가에 직접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한 부분이 지나가고, 곧 발라키레프가 화려하게 편곡한 변주가 시작되었다.

“…….”

끝이 없는 듯한 스케일이 마치 피아노가 고정된 음계를 지닌 건반악기라는 것을 부정하는 듯 이어져 나갔다.

만약 피아노 건반이 88개보다 많고, 인간의 팔의 길이에 한계가 없다면 그대로 하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화려한 스케일이 홀을 휘감듯 쏟아져 나온다.

양손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소양이었지만, 타티아나의 손은 정말 두 사람인 것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정확한 박자로 함께하지만, 마트베이는 이 곡이 독주곡이 아니라 듀엣 같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음의 파도에 뇌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변주가 지나가고, 빈 공간에 다시 차분히 음악이 들어선다.

보통 연주자들은 곡 전체에서 종달새를 연상시키기 쉬운데, 타티아나는 이 곡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유려하게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종달새는 처음과 마지막에 울 뿐이다.

분명하게, 타티아나는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곡이 끝나고, 어제 있었던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보다 두 배는 더 될 정도의 환호성이 청중들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마트베이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놓아 버리고, 박수를 쳤다.

이번엔 옆의 심사위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반드시 최고 점수를 줘야 했다. 기교적으로도, 해석도 어느 하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글린카와 발라키레프가 살아 있었더라도 똑같이 최고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기가 막히는군.”

도대체 무슨 천재가 나타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듯 심사위원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더니, 오늘은 마치 어젠 죄송했다는 듯 살며시 사과해 온다. 마트베이는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훨씬 자기과시적인 강렬한 곡을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그 누구도 피로하게 하지 않는 편안한 선곡을 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드러냈다.

예선전 2라운드였지만, 마트베이는 벌써부터 올해 콩쿠르의 행방을 무척이나 좁힐 수 있었다.

많아 봐야 세 명 정도. 본선에 오르는 것은 대략 열 명 정도지만, 아마 그중에서도 세 명 안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

환호와 찬사를 받으며 타티아나가 무대 뒤로 돌아가고, 마트베이는 그다음 참가자를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쉬르바고프.

청소년 콩쿠르에서도 몇 번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고, 꽤 장래 유망한 연주자로 한창 실력을 쌓아 나가고 있는 참가자였다.

하지만 어제, 그리고리는 하필이면 앞선 타티아나와 같은 곡을 자유곡으로 준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위압당하고, 장악당해선 준비한 폴로네이즈를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엉망으로 망치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그리고리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앞 연주자가 뭘 하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멘탈이 약하단 뜻이고 그건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연주자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마트베이는 그리고리를 이해했다.

타티아나의 폭력적인 수단은 심사위원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비쳤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어린 연주자인 그리고리가 그것을 초연하게 받아넘기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향은 보통 하루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컨디션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아는 마트베이는 다시 한 번 타티아나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동시에 그리고리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서인 그리고리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

타티아나가 대기실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고리가 무대 위로 올라왔고, 청중들로부터 박수가 있었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한 느낌이 물씬 느끼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결국 실전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곳이다.

그리고리는 어제 제 실력을 보이지 못했고 거기엔 어떠한 변명도 소용없었다.

마트베이는 타티아나와 똑같이 1점이 적힌 그리고리의 채점표를 보곤, 펜을 쥐고 그의 연주를 기다렸다.

“…….”

예상외로 무대 위에 선 그리고리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마트베이는 조금 의아해했다.

타티아나에게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고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져서, 그 어떤 격려도 그를 일으켜 세울 순 없을 것 같았는데, 그리고리의 눈빛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리는 담담하게 서선 꾸벅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리고리의 연주를 들으며 마트베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채점표 위로 펜을 놀리는 그의 손은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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