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화 (119/1,277)

##  119화

농담이 아니라 힘들어서 기절할 것 같다.

팔이 지쳐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피아노에 대한 노하우들을 상당히 많이 체득하고 있었고, 덕분에 약한 몸으로도 두세 시간은 멀쩡히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5분 동안 피아노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것으로 정신이 지쳐 버렸다.

족히 10시간 정도의 집중력을 한 번에 쏟아 낸 기분이었다.

그만큼 난 최선을 다해 집중했고,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글린카와 발라키레프가 꿈에 나와 호통을 치진 않을 것 같다.

“…….”

대기실로 들어오자 약간 질린 눈으로 날 보는 몇몇이 보였다. 저런 눈빛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음 순서인 그리고리를 돌아보았다. 그가 긴장한 눈으로 날 마주 보았다.

난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리.”

“……어, 응?”

이름을 부르니 그리고리가 말까지 더듬었다. 그를 또다시 흔들 생각은 없었다.

“안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농담처럼 그렇게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리는 슈만의 아베그 변주곡을 연주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적잖이 날 의식한 행동이었지만, 난 아베그 변주곡을 연주할 생각이 없다고 확실하게 못 박은 바 있었다.

그제야 그리고리가 웃음기를 보였다.

“그렇네. 발라키레프의 종달새라니 정말 놀랐어.”

“놀라셨나요?”

“놀랐지.”

그리고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잘 친다면 상당한 점수를 딸 수 있겠지만, 거꾸로 못 친다면 한도 끝도 없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곡이니 쉽게 선택하기 힘들잖아.”

“그렇기도 해요.”

“그런데 네 표현력은…… 성악가가 함께하는 줄 알았어.”

난 약간 낯부끄러웠다. 이렇게 칭찬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머뭇거리고 있자 그리고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게 네 본 실력이구나.”

잃을 것이 없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는지,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였다.

난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글린카의 종달새는 지금 제가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곡 중 하나였어요.”

“……최선?”

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난 어제의 쇼팽의 폴로네이즈도 결코 대충 연주한 적이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곡을 다듬었고, 최고의 형태로 펼쳐 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건 결코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오늘 연주한 종달새는 그야말로 지금 내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곡에 가까웠다.

“원래 본선에 올리려고 했었죠.”

“뭐라고?”

내 말에 그리고리가 깜짝 놀랐다. 농담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이다.

하지만 전혀 농담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난 글린카가 작곡하고 발라키레프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이 종달새를 본선에 올릴 생각이었고, 본선에서 연주할 세 가지 곡 중에서도 일종의 조커로 쓸 생각이었다.

본래 성악곡으로 작곡되었다가 피아노 독주곡이 된 이 곡은, 최근 내 연구 방향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몇 안 되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무식하게 피아노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날 본 구세프 선생님께서 방향성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추천해 준 곡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곡, 종달새를 추천받고는 생각보다 굉장히 쉽게 조커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성도로 끌어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조커로 쓸 곡이었다면 아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난 일찍 예선전에서 이 곡을 사용했다.

“대체…….”

가장 자신 있는 곡은 당연히 본선에 올리는 것이 유리했다.

때문에 귀한 카드를 먼저 써 버렸다고 선언한 내 말에 그리고리는 굉장히 당황해했다.

“왜…… 왜 그랬어? 왜 아껴야 할 곡을 예선에……?”

뭘 그렇게 당황해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봤으면서.

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음악을.”

“뭐? 나한테?”

“예.”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나? 대체 뭣하러?”

그리고리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분명히 내게 더 이상 그를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가 더듬거리더니, 이런 말까지 했다.

“사실상 내 콩쿠르는 이미 끝났잖아?”

이미 끝장난, 그것도 손수 끝장내 버린 경쟁자에게 뭐 하는 짓이냔 뜻이었다.

난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요.”

실제로 그가 본선에 오르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하여 모든 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는가?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결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에게 일방적으로 대결을 건 나는,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었고, 그렇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이런 날 이해하지 못했고 난 여전히 그리고리가 마음에 안 들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그러니 그리고리도 최선을 다해 저와의 대결에 임해 주세요.”

어이가 없겠지.

그리고리는 입을 벌린 채 내가 제정신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을 했다.

막 나가는 짓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신조에 입각하여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다.

살짝 실례인데.

약간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였다.

그가 돌연 눈빛을 달리했다.

목소리 역시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던 힘없는 목소리에서, 다시 무언가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리가 말했다.

“굳이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다행이에요.”

당당하게 슈만의 아베그 변주곡을 연주할 것이라고 목청 높여 소리 지르던 그의 모습을 보고도 혹시나 싶었는데 내가 무언가 신경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리는 한층 더 호승심을 불태우며 손목과 어깨를 풀었다. 건반을 만지고 싶어 근질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30번.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쉬르바고프.”

“예.”

그리고 호명되자마자 힘차게 무대로 향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난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냥 소파에 늘어져 버렸을 것 같다.

난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끌어 올려 그래도 자세를 너무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자꾸만 힘이 빠진다. 2시간의 수면,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던 연주, 그리고리에게 향한 약간의 신경. 그 모든 게 내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

난 멍하니 무대를 비추는 텔레비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늘 그렇게 종달새를 올린 것까지 내 독단은 아니었다.

충분히 미하일 선생님, 그리고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와도 상의를 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예선전에 통과하는 것 또한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제 감점을 당했어도 충분히 다른 곡으로도 예선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은 들지만 심사위원들이 괘씸죄로 날 떨어뜨린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예 확실하게 통과해 버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확실하다는 말을 난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난 그만큼 이 조커에 자신이 있었다.

아깝긴 하지만 심사위원들을 하여금 날 떨어뜨리는 것을 아깝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정작 이렇게 중요한 카드를 본선에 쓰겠답시고 꼭 쥐고 아끼고만 있다가 써 보지도 못한다면 바보 같은 일이지 않겠는가?

“…….”

난 옆머리를 톡톡 치며 생각을 흘려 버렸다. 곡을 망쳤으면 또 모를까, 잘 했다면 문제될 건 없었다.

단 것이 필요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선, 다과가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와 먹기 시작했다.

***

로비로 나와서 날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합류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사샤의 칭찬이 있었고, 뒤이어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정말 잘했어, 타티아나!”

“고생 많았어. 음…… 아니지, 이렇게 말하면 예선으로 다 끝났다는 것처럼 들리나?”

“장난해? 에르네스트?”

“어떤 말씀이신진 알아요. 고마워요.”

난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어제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기분이 조금 좋아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사납게 쏘아붙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했다.

“뭐, 결과 꼭 봐야 할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예선 통과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는 듯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난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봐야 하지 않나요?”

“그래도가 어디 있어? 실력으로 다 보였고, 끝났는데.”

그러면서 에르네스트는 주변을 슬쩍 훑었다.

그를 따라서 옆을 보니 회장 밖 로비에는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기도까지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솔직히 말해, 나도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의견이다.

실력을 보였다면, 그다음은 엄격한 심사위원들이 판단할 일이다.

만일 신에게 기도를 한다면 내가 바라야 하는 것은 심사위원들의 공정함뿐이었다.

기도로 심사위원들이 내게 무언가 유리한 방향으로 평가를 해 주도록 바라는 것은 적어도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음악의 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기도는 무시할 것이 분명하다.

“…….”

그래도 무심결에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못해도 본선엔 가고 싶었다.

날 보더니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 너도 사람이구나.”

“……예?”

그럼 내가 사람이지 뭐야?

이게 무슨 말 같잖은 소린가 싶어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폭소를 터뜨렸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어 대던 그가 말했다.

“난 네가 어제 콩쿠르에서 그런 짓까지 하는 걸 보곤 내심 정말 거물이라고 생각했었거든?”

“……?”

“그런데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퀭한 눈 하며…… 지금은 혹여나 떨어질까 불안해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 말끝을 흐리던 그가 다시 웃었다.

“풉…….”

에르네스트가 웃는 건 좋다. 그는 웃을 때 굉장히 순수한 미소를 보여 준다.

그건 꽤나 귀여웠다. 때문에 난 에르네스트가 웃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

좋다. 정말 다 좋은데. 난 왜 살짝 화가 나려고 하지?

“말씀을 하세요.”

“아냐, 됐어. 그냥 나 혼자 생각하고 있을래.”

“무슨 생각이신데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말해 주면 되잖아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아웅다웅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결과 떴어!”

“……!”

나와 에르네스트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 무언가 표가 올라왔다.

“가자.”

에르네스트가 앞장섰고, 그 뒤를 뒤따랐다.

사실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정말 만에 하나 예선 탈락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커로 아껴 두었던 곡까지 꺼냈다.

에르네스트의 말마따나 오늘 연주만으로도 난 어제의 감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만회했을 것이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 있는데, 앞장서던 에르네스트가 내 쪽을 보았다.

“잡아.”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뻗었다.

뭐지? 의아해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는 순간, 에르네스트가 휙 나를 끌어당겼다.

반항할 틈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요령 좋게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갔고, 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장 앞에 설 수 있었다.

“자, 너 몇 번이었지?”

“…….”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니터에만 집중했다.

그 옆모습을 흘겨보기도 잠시, 난 환하게 변하는 에르네스트의 얼굴을 보았고, 곧 이쪽으로 홱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에르네스트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본선 진출이야. 축하해.”

“아…….”

그제야 난 모니터를 보았고, 곧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이름 옆에는 일곱 명의 심사위원들이 각 라운드에 어떻게 점수를 주었는지 표시되어 있었고, 가장 오른쪽의 본선 진출 여부를 알려 주는 칸에 초록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하아.”

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예선 탈락은 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저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자세히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점수는…… 젠장, 왜 점수를 합산해서 보여 주지 않는 거야? 보기 힘들게.”

“그, 그렇네요.”

나도 더 자세히 모니터를 살폈다. 숫자가 가득했다.

어제 있었던 1라운드에 대한 점수로 일곱 개, 오늘의 2라운드 점수 일곱 개로 총 열네 개의 숫자가 한 사람의 이름 옆에 쭉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가 투덜거리는 것처럼 상당히 보기 불편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점수를 보니, 오늘 연주한 글린카의 종달새에 대한 점수는 일곱 명의 심사위원 모두가 만점을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유심히 지켜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제오늘 통틀어서 만장일치 만점은 오늘 너 하나인 것 같은데.”

“…….”

역시 조커로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이걸 본선에 올렸더라면…… 하는 생각은 이제 안 하기로 했다.

여기서 만점을 받아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어제 자 1라운드.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

“4, 5, 4, 4, 3, 5, 1……?”

생각보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5점을 준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1점……?

“1점! 푸하하!”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와, 너 오늘 정말 많이 웃는구나. 나도 참 기분이 좋네……?

살짝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렇게 웃으실 것까진 없잖아요.”

“저 사람 누구지? M.E?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인사라도 하러 가야겠어.”

“그만 놀리세요!”

내가 자초한 일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래도 다른 심사위원들 중 두 명이나 5점을 준 마당에 1점이 끼어 있으니 조금 충격이었다.

억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정말 강단 있으신 심사위원님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나는 기분은 아니었다.

M.E…… 누구지…….

“아, 진짜, 에르네스트! 타티아나는 그렇게 끌고 다니면 안 된다니까!”

뒤이어 사람들을 비집고 온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에게 타박을 놓았고, 에르네스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 웃으며 내 점수를 가리켰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보더니 대뜸 인상을 썼다.

“아무리 그래도 1점은 아니지 않아?”

“아나스타샤…….”

역시 내 편은 아나스타샤뿐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가차 없었다.

“어제 타티아나가 연주한 폴로네이즈, 너도 들었잖아?”

“들었지. 그래서 뭐?”

“그게 저만큼 위험했었다는 거지. 아나스타샤 너 어제도 계속 예선에 종달새를 올리는 것에 대해 반대했었잖아.”

“그…… 그야.”

어제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예선전 2라운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할 수 있다면 내가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곡을 절대 아끼지 말고 꺼내 들 것은 조언했다.

그에겐 1라운드가 그만큼 불안하게 들렸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른다고, 그는 굉장히 우려를 많이 표했다.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반대했고, 때문에 그 둘은 어제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다.

결국 미하일 선생님에게 전화까지 걸어서 내 비장의 카드였던 종달새를 쓰는 것으로 결정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오늘 점수가 어설펐다면 본선 진출 여부는 정말 불투명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명이나 5점을 줬잖아?”

“두 명밖에지. 넌 타티아나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아 보여?”

“윽……!”

아나스타샤가 수세에 몰렸고, 난 급히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했다.

“그,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본선 진출자들 중에 혹시 아는 사람은 안 계신지…….”

어려서부터 피아노로 크고 작은 콩쿠르에 많이 출전했던 그들은 아는 이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아는 이름이 전혀 없는 모니터를 죽 훑었다.

그리고 오래 볼 것도 없이 발견한 그리고리 세르게예비치 쉬르바고프의 이름 옆의 본선 진출 여부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