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1화 (121/1,277)

##  121화

아버지와 오빠는 내 본선 진출 소식을 전해 듣곤 축하해 주었다.

루슬란 오빠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아버지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본 적이 없다며 작게 툴툴거렸다.

아버지가 날 상당히 편애한다는 것은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뭐라고 했느냐? 1점?”

때문에 자세한 점수를 전해 듣고, 아버지는 대뜸 노성을 내지르셨다. 순간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전날 있었던 내 연주에 M.E라는 심사위원은 1점을 주었다. 감점을 감수한 내 연주를 탐탁찮게 본 것이다.

하지만 5점을 준 심사위원 역시 둘이나 있었고, 아버지는 그것이 이해가 안 가는 듯했다.

“예술이란 것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 객관성이 결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건 이상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공정한 심사라고 생각해요.”

난 몇 번이고 심사위원의 판단에 승복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할 말이 많으신 듯 보였지만,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는 음악 외의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성을 존중받아야 하는 세계였다.

아버지는 이 세계를, 그리고 나를 존중하고 싶어 하셨다.

“난 이 점수라는 게 어떻게 매겨지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봤을 때,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지.”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더, 신중하게 물어 왔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냐?”

난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설명을 조금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예. 사실 첫날 예선을 치르고 저도 확신이 없었어요. 에르네스트는 불안하니 이튿날은 더 만전을 기할 수 있는 곡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까지 했었고요.”

“그렇게 완벽한 연주였는데도?”

“완벽하지 않았어요.”

“크흠…….”

아버지는 신음성을 내셨다. 아버지가 듣기엔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가 안 가실 것이다.

적어도 테크닉적으론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제 내 평균점은 4점이 채 되지 못했다.

마흔한 명 중에 10명 남짓을 뽑아내는 이 예선전에서 평균 4점 미만이라면 정말 위험한 점수였다.

에르네스트의 조언에 따라 조커를 꺼내서 만점을 받지 못했더라면 난 그리고리와 함께 집에 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새삼,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정확하게 상황을 지켜본 것인지 감탄스럽다.

“…….”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아버지는 내가 정말 억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이 결과에 아주 만족한다는 듯한 눈빛을 마구 보내자 결국 누그러지셨다.

“그럼 됐다. 알겠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

“일단 이름은 알고 있도록 하지.”

“…….”

심사의 공정성 때문에 심사위원진은 콩쿠르 첫날에야 공개된다.

무대에 올라와서 일곱 명의 심사위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긴 했지만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어서 그냥 잊어버렸기 때문에 M.E가 누군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팜플렛을 꺼내 들었고 조용히 M.E가 누군지 찾기 시작했다. 난 그것까지 말릴 순 없었다.

“마트베이 아파나시예비치 옐라긴. 이 사람이겠군.”

결국 찾아내셨나.

그냥 모른 체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이 콩쿠르가 끝나고 나면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봐야 할 것 같다.

“…….”

사실 나도 마트베이 심사위원에 대해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분이 매긴 점수만 놓고 보자면 나는 1점, 5점으로 그리고리와 점수가 같았다.

적어도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부여한 점수에 나와 그리고리의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 사흘차. 파이널 라운드 본선 첫 경합이 다가왔다.

본선에 오른 10명은 이틀에 걸쳐 세 곡씩 연주를 보이게 된다.

내 차례는 본선 둘째 날이었고, 덕분에 오늘은 청중석에 앉을 수 있었다.

날 응원해 주시는 다른 분들은 모두 쉬고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이 두 명이 나와 함께했다.

아나스타샤가 작게 속삭였다.

“중계영상도 다 녹화될 텐데 그냥 쉬지 그래?”

“녹화로 보는 것과 실황은 다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굳이 오늘도 나올 필요는 없었잖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는 것이라면 모를까, 오늘처럼 굳이 홀에 청중으로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리고리가 남긴 말이 기억났다.

그는 마치 옆을 보지도 않고 달려 나가기만 하는 풍조가 싫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경쟁하다가 밀려나 쓰러진 것이 아니라, 타티아나라는 연주자와 직접적으로 마주하여 깨어져 나간 것을 꽤나 흡족하게 여기기까지 하는 듯했다.

내가 그의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못했다는 점엔 안도감마저 들지만, 한편으로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나오지 않아도 될 자리에 일부러 나왔다. 그냥 앉아 보았다.

연습 시간을 많이 빼앗기진 않는다.

본선에 준비해야 하는 곡은 쇼팽의 왈츠, 마주르카, 에튀드 중 한 곡과 자유곡 한 곡, 그리고 소나타 한 곡 이렇게 총 세 곡으로 한 사람당 약 30~40분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

하루에 다섯 명이니 길어 봐야 3시간 남짓 정도 걸릴 것이다.

바로 내일 무대를 앞두고 그 3시간도 아까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피아노라는 것이 하루 종일 벼락치기처럼 연습량을 늘려서 결과가 나아질 일도 아니고, 이렇게 잠시 청중의 입장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보자, 3번, 11번, 13번, 17번, 26번인가.”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는 누가 본선에 올랐는지 외우고 있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는 차치하고 콩쿠르 참가 당사자인 나조차 눈으로 한 번 훑고 말았는데 약간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 그래도 기억나는 사람은 한 명 있었다.

11번. 임세연.

그녀는 유일하게 본선 진출자 명단에 끼어 있는 한국인이었다.

“…….”

관심이 안 간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의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한국을 대하고 싶었다. 너무 집착하지도 않고, 병적으로 멀리하지도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내게 있어선 꽤나 친숙한 나라. 2015년엔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나왔을 정도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입지를 지닌 나라.

그 정도 감상이었다.

노력 중이다.

“타티아나?”

“예?”

깜짝 놀라 대답하니 에르네스트가 이상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참…….”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더니 툭 내뱉었다.

“적어도 오늘 이 다섯 명 중에 네 적수는 없어. 그러니까 편하게 봐, 그냥.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왜 보겠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

에르네스트의 평가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고 그것은 어제 내게 1라운드가 불안하니 조커를 꺼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증명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니,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시작하네.”

잠시 후, 콩쿠르를 진행하시는 분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고,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본선의 시작을 알렸다. 상당히 빠른 진행이었다.

“3번. 제임스 휘태커.”

호명과 동시에 한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15세 이하만 참가할 수 있는 청소년 콩쿠르니 분명 나와 동갑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어리겠지만, 외모만으로는 도저히 청소년이라 부르기 힘들어 보였다.

심지어 루슬란 오빠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제임스가 청중들을 향해 인사했고, 박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고.

제임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

본선 첫 곡은 쇼팽의 왈츠, 마주르카, 에튀드 중 한 곡을 골라야 한다.

제임스는 쇼팽의 에튀드 중 op.10의 네 번째 곡을 선택했다. 총 24곡의 쇼팽 에튀드 중 특히나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재빠르고 가벼우면서도 리듬감 있는 연주가 중요한 좌우교대의 무궁동 형태의 곡으로서 그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다.

제임스 휘태커는 커다란 허리를 굽히고는 피아노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달려들었다. 저래서야 양팔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헷갈리진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다.

템포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각 음들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조금 뭉개 버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주 약간만 템포를 늦추고 페달을 쓰지 않는다면 더 수준 높은 음악이 되었을 것 같은데 약간 아쉽다.

2분 정도의 짧은 에튀드는 순식간에 끝났다.

연주 사이에 박수가 있진 않았다. 본선은 총 세 곡을 연주해야 끝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곧바로 다음 자유곡을 이어서 쳤다.

“…….”

그의 자유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이었다.

리스트는 17세기 우크라이나 코자크 족의 지도자였던 이반 마제파의 일대기를 음악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은 그의 교향곡 6번과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의 부제가 되었다.

똑같은 주제의 교향곡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거대하고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 곡인데, 거기에 기교도 초절기교 에튀드 중 한 곡이기에 부족함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요하는 곡이었다.

난 살짝 불안해졌다.

바로 이전의 쇼팽 에튀드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이미 제임스 휘태커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향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빠른 템포로 쇼팽 에튀드를 연주하던 그 모습을 보면 마제파처럼 화려한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 또한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제파는…… 그에게 조금 이르지 않을까 싶은데.

“…….”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에 등장하는 긴 스케일이 지나가고, 옥타브 도약으로 선율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첫 주제에 도착하자 그는 바로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어떻게든 커다란 손으로 건반을 찍어 가며 곡을 빠르게 만들어 가지만,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툭툭 끊어지는 숨 막히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2도로 이어지는 꾸밈음은 본래 뭉개듯 가는 경우가 유리했으나, 거의 한 음으로 들릴 정도로 과하게 뭉개는 것은 음악성을 심각하게 저해시켰다.

마제파는 너무 어려운 곡이었다.

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도약과 연타로도 프레이징을 살리고 음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제파가 난곡으로 인정받는 이유였다.

조금 무리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7분 동안 제임스는 마제파를 완주했고, 난 그가 상당히 많은 감점을 당했으리라 생각했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이미 흥미가 다 식어 버린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제임스 휘태커는 마지막으로 쇼팽 소나타 1번을 연주했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연주를 보여 준 그에게 박수가 쏟아졌고, 그는 꾸벅 인사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음, 소나타는 나쁘지 않았다. 약간 아쉬운 기분이다.

제임스는 스스로가 굉장히 남성적이고 강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힘자랑하듯 과한 에튀드들을 보이지 않고 좀 더 차분한 곡들을 선곡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소나타에서 보여 준 아름다운 선율은 충분히 그의 음악성이 부드러운 면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선생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임스가 자신의 음악을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이것으로 지나갔다.

다음 참가자의 차례였다.

“11번. 임세연.”

평균적으로 보면 그리 작은 키는 아니지만, 참가자들 중에선 작은 키에 속하는 한 여자아이가 걸어 나왔다.

하얀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청중석을 향해 90도로 인사했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난 옅게 미소를 지었다.

“타티아나, 넌 조금 흥미가 갈 수도 있겠네.”

에르네스트는 그런 말을 했다.

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지금?

입을 열어 무언가 묻기 전에 묵직한 분위기가 내려앉았고, 난 입을 다물고 무대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한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세연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난 바로 에르네스트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쇼팽의 마주르카 op.24의 네 번째 곡. 쇼팽이 60곡 가까이 작곡한 마주르카 중에선 열일곱 번째 곡이다.

폴란드의 춤곡인 마주르카 고유의 리듬. 박자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은근한 루바토가 몸을 끌어당기는 듯하다.

혹자는 폴란드인 외에는 이 마주르카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본래 유럽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클래식을 세계인들이 즐기게 되면서 이 마주르카 역시 다양한 해석으로 연주되곤 했는데, 난 이 익숙한 리듬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굉장히 친숙함을 느꼈다.

정말 우스운 소리지만, 이건 한국식 마주르카 리듬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꼭 나라와 민족의 차이로 음악이 해석되고 연주된다고 할 순 없었지만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문화에서 빚어지는 감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니 그가 히죽 웃었다.

난 그에게 한국인 교수에게 사사한 적 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