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기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버리고 이제 날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은 음악뿐이었으니, 내가 누구를 사사했는지에 대한 것은 사실 내 본질에 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야기를 에르네스트에게 대체 왜 했을까 후회가 든다.
하지만 그 대처를 생각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마주르카가 내 정신을 끝없이 뒤흔들었다.
음악을 이루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음색도 선율도 화성도 아닌 바로 박자다.
선율이 없고 화성이 없는 음악은 있지만 박자가 없는 음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음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박자는 규칙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질서와 운동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이 균형, 즉 리듬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근간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이론은 굉장히 많다.
인종별로 핏줄에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문화적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각 언어별로 나타나는 운율과 발음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이론도 있다.
꽤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사실 난 잘 모르겠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난 이 리듬에 저항할 수 없는 친숙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간 한국인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한승우의 연주도 몇 번이나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여태껏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난 러시아인이었고 앞으로도 러시아인으로 살아야 했으니까.
난 늘 경계하며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명확하게 지켰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혼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세연이 연주하는 자유롭고 특징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듣자, 아직까지 내 영혼에 새겨져 있던 무언가가 반응했다.
이성으로 묶어 놓고 있던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다른 그 어떤 곡을 들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진 않았는데.
쇼팽의 마주르카는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콧잔등이 아려 온다. 난 이 전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무대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피아노 소리는 가차 없이 내 영혼을 뒤흔들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음색이 걸러진다 한들 리듬까지 지워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감동? 잘 모르겠다. 난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
“…….”
옆에서 툭툭 치는 손길을 느낀다.
고개를 드니 에르네스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입 모양만으로 내게 말했다.
나가자.
난 머뭇거렸으나 그는 기다리지 않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콩쿠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빠져나가는 것은 상당한 결례였지만 소란을 피울 수도 없어서 얌전히 따라 나갔다.
뒤이어 아나스타샤도 따라 나왔다.
“…….”
로비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세연이 연주했던 폴로네이즈를 들었을 땐 그럭저럭 괜찮다는 감상뿐이었다.
대체 왜 여태껏 아무렇지도 않다가 마주르카에 눈물이 쏟아질 뻔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유독 마주르카의 리듬이, 내 안의 무언가와 공명하고 있었다.
이건 굉장히 위험했다.
난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음악은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이론이나 이성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부분도 가지고 있었다. 난 음악의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
특히나 내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음악에 무식하게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아주 미련한 짓이었다.
당장은 피하는 것이 옳았다. 난 다시는 한국인, 특히 한국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듣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진정되자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냥 고개를 내저었더니 그가 허망하게 말했다.
“그렇게 감동적인 마주르카였어? 잘 모르겠던데.”
“……맞아요. 평범하죠.”
“그래. 수준 차이가 확 나잖아. 그런데 왜 그런 연주에 그렇게…….”
에르네스트는 한참 고심하며 단어를 고르다가 말했다.
“감상적이 된 거야?”
잘 모르겠다.
나 역시 마주르카를 자주 연주했고, 그 리듬은 아직 한국에서 배운 것들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난 내가 연주하는 것으로부터 이런 걷잡을 수 없는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극도로 몰입할 수도 있겠지만 피아노는 상당히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악기라 그러긴 사실 쉽지 않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연주엔 쉽게 영향을 받는다.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간지럼을 태울 수 없지만 타인의 손은 옆구리에만 닿아도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미안해요.”
그냥 놀랐던 걸까? 사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사과했다.
“마실 거라도 좀 사 올게.”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내가 예선 첫날 1점을 받았던 것으로 한참이나 놀렸을 정도로 음악에 관해선 결코 날 봐주는 일이 없던 그가 이렇게 배려를 보이니, 지금 내 꼴이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지 알 것 같아 창피해졌다.
곁에 남은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괜찮아?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난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조금 속이고 싶었다. 단순히 내가 음악에 감동받아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비치고 싶었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타티아나.”
내 이름을 부르던 그녀가 말했다.
“음악이 널 울리기도 하는구나.”
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음악이 절 울리기도 하네요.”
“무슨 생각이 났어?”
“…….”
난 사실대로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었다.
“솔직하네.”
“예? 아뇨, 그게 무슨…….”
“솔직하니까 말하지 못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내가 뭐라 한들 아나스타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솔직하다는 건 좋은 거고…… 너 역시 내가 솔직한 걸 좋아하겠지.”
“전 아나스타샤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 줄 알았다.
“아니야. 타티아나.”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아닌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처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
난 차마 거기에 무언가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격류가 지금 내겐 너무 어렵고, 벅차다.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날 올려다보더니, 이윽고 내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곤 평상시처럼 킥 웃으며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뭘 사 오려나? 걔는 어떨 땐 상당히 센스 있어 보이다가도 은근히 허당인 구석이 많아서 말야.”
“……그래요?”
“응. 우리한테 뭔가 묻지도 않고 제 맘대로 마실 걸 사 오겠다고 가긴 했지만, 지금 아마 골치 아파 하고 있을걸?”
“아나스타샤와는 오랫동안 친구였잖아요?”
“그래도 모를 거야. 걔 그런 부분은 영 아니거든.”
듣고 보니 에르네스트가 무엇을 사 올지 궁금해졌다.
난 상당히 가려야 할 것이 많다.
음식 자체를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혀가 약해서 매운 것을 잘 못 먹고, 카페인에 약해서 커피나 초콜릿 등도 피해야 하고, 심지어 탄산음료는 마시면 취기를 느끼기까지 한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콜라를 사 올 것 같진 않지만…… 조금 기대된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조금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에르네스트가 돌아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의 센스를 기대하며 나름 엄격하게 평가를 내릴 준비를 했다.
“하나씩 골라.”
“……?”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뜬금없이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뭔가요, 이게?”
“아이스크림이잖아.”
“지금 2월인데요……?”
“원래 추울 때 먹는 게 맛있어.”
“……예?”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얘 약간 이상해…….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훨씬 과격하게 표현했다.
“너 우리 얼어 죽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아이스크림에 얼어 죽는 러시아인은 없어.”
단호하게 말하는 투가 장난 같지도 않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추위에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2월에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을 정도로 추위를 즐기진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당당하게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난 대충 아무거나 하나 집었다.
“……고마워요.”
고마워해야 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사 준 것이니 먹어야 했다.
한겨울에 아이스크림이라니, 상당히 비상식적이지만 난 그래도 에르네스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진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열고, 한 입 물었다.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
이거 너무 차갑잖아!
난 뜨거운 것을 먹었을 때처럼 입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헤매다가 간신히 녹여 먹었다.
턱 언저리가 쨍하다. 입과 목이 시원해지다 못해 머리까지 말끔하게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고통에 떨면서 원망 어린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능글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센스? 0점이다, 0점!
***
연주회장에서 나온 우리는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이미 충분히 내 본선 프로그램에 대해 조언을 받았고 이 이상은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를 함께 데리고 갈 필요는 없었지만, 난 그래도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에르네스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딱히 걱정할 부분은 없어. 연습한 대로만 하면.”
“그래도 타티아나는 이번이 첫 콩쿠르잖아? 보통 조금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하는데…… 긴장할 만도 하잖아.”
“긴장? 난 타티아나가 당장 카네기 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져도 긴장이라곤 전혀 안 할 것 같은데?”
“……저기, 에르네스트. 저도 사람이에요.”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긴장을 크게 하지 않고 컨트롤을 잘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카네기 홀 같은 어마어마한 큰 무대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세상 그 어떤 피아니스트라도 그런 큰 무대에선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멀뚱히 날 보더니 웃었다.
“그래, 그랬지.”
의자에 편히 앉으며 그가 말했다.
“여기가 카네기 홀이라고 생각하고 연주해 봐. 그럼 본선이라고 떠는 일은 없겠지.”
“…….”
말 같잖은 소리를 하는 그를 흘겨보다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가지런한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약간은 불안하고, 어지러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난 준비한 본선 프로그램을 연습실 피아노로 친구들 앞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충분히 검수와 레슨을 받은 곡들이었고 실황을 지켜보고 있는 에르네스트 역시 나쁘지 않다는 평이었다.
연습이지만, 실전처럼 눈앞의 피아노와 연주에만 집중했다.
“…….”
첫 번째 곡을 끝내고, 약간 관조하는 듯한 기분으로 냉정하게 내 연주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와의 듀엣으로 이끌어 낸 지금 내 실력은 이전의 볼품없기 짝이 없던 수준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궤도에 올라 있었다.
이전엔 피아니스트로서 커리어가 될 콩쿠르는커녕 학교에서 적응이나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지만, 성악을 배운 이후로 예민함을 되찾은 감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섬세하게 피아노를 다룰 수 있게 했다.
기준을 찾은 음색은 변화무쌍하지만 기준을 가지고 있어 멋대로이지 않았다.
난 지금 내 연주를 충분히 음악이라고 칭해도 그리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정도 자신감은 찾을 수 있었다.
난 잘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잘못되지 않았다.
다시 내 연주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심사가 어찌 될진 모르는 일이니 1등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어떤 상이든 꼭 수상할 생각이었다.
비록 청소년 콩쿠르이긴 하지만 그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금 그녀와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으로는 그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익힌 지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콩쿠르에서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굉장한 결과였지만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했다.
난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 음악가로서 다시 얻은 기회를 살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구세프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진 못했지만, 이런 추세라면 구세프 선생님과 약속한 3년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녀도, 나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되어 못해도 한 곡 정도는 내 미련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또한 불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계획이 가능해지려면 내일 있을 본선에서 내 최대의 실력을 보여야 했다.
“…….”
잠깐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내 연주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두 번째 곡을 연주하지 않고 무엇 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난 더욱 만전을 기해서 저 까다로운 심사위원을 만족시키기 위한 연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