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화 (123/1,277)

##  123화

깊이 잠들어 있던 의식이 뒤뚱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어둡다. 나는 단지 꿈속에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존재의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텅 빈 공허함과 그 한가운데에 툭 떨어져 있는 듯한 황량함.

무언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모호한 가운데 멀리서 들려오는 애달픈 새소리.

난 종종 이런 꿈을 꾼다.

그리고 난 이 꿈을 악몽이라고 생각한다.

이 꿈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귀신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일도 없고, 독사가 꿈틀거리는 일도 없다. 단지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내버려 둘 뿐이었다.

하지만 난 혼자서 멍하니 있다가 몇 번이고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바보처럼 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나는 늘 내가 서 있는 곳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이 자리에 의미를 주기 위해 늘 자격과 책임, 그리고 의무를 양손 가득 쥐고 있었다.

쥐고 있을 땐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혼자 있으면 자꾸 눈물만 났다.

책임을 내려놓았다면 편해져야 할 텐데, 그것 말곤 내게 남아 있는 것이 그저 다 부서지고 남은 잔해 같은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 잔해들 속엔 날카로운 바늘들도 숨어 있어서, 방심하고 헤집다 보면 잔인하고 날카롭게 내 손을 찌르기도 했다.

이미 내 양 손은 피투성이다. 더 다치는 것이 두려워서 난 꼼짝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렇게 악몽 속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꿈속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새소리가 아닌, 현실의 새소리가 내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으, 읏.”

목메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버릇처럼 스마트폰부터 챙겼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였다.

어젠 아나스타샤와 호텔로 돌아와서 10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 그보다 늦게 자고 이보다 일찍 일어나는 내 생활 패턴에 따르면 오늘은 정말 깊게 숙면을 취한 것에 속했다.

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내리며 옆 침대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

옅은 수면등에 비치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

내가 음악이 아니라 미술을 전공했더라면 아마 하루 종일 아나스타샤만 그렸을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음악, 그것도 작곡이 아닌 연주라 내 재주의 빈곤함이 아쉽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그녀의 침대로 조금 더 가까이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

난 아직 내 무의식을 믿지 않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에 대해선 잘 정리하여 서랍에 차곡차곡 채워 넣는 중이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침실 밖으로 나온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모포를 두르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던 화려한 호텔의 거실이 이제는 꽤나 익숙했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이어폰을 스마트폰에 꽂고 귀에 넣었다. 그리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내 본선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난 그냥 쇼팽의 발라드를 틀어 놓았다.

오늘 있을 내 무대와 전혀 상관없는 곡이지만, 콩쿠르와는 전혀 상관없이, 발라드가 듣고 싶어졌다.

“…….”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선율에 젖으며 난 몸을 웅크렸다.

폴란드에는 러시아에게 지배당하고,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역사가 있었다. 때문에 쇼팽은 평생 동안 러시아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쇼팽을 좋아한다. 난 이민자가 아닌 분명한 러시아인이지만 그래도 음악가로서 쇼팽을 사랑했다. 거기엔 그 어떤 배경과 이해도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점이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다.

쇼팽이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은 이유를 들으며, 여전히 차가운 소파 위에서 난 다시 눈을 감았다.

***

“오늘 정말 예쁘구나,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난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흐뭇하게 웃으며 몇 번이고 칭찬을 해 주셨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휴가가 아니라 업무를 보러 오신 것이라서 예선 첫날 저녁에 한 번 뵈었던 것 말고는 그간 뵐 수 없었다.

오늘 역시 본래 스케줄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내 주신 것 같았다.

예선이 끝나고 탈락한 참가자들과 함께 비어 버린 자리를 운 좋게 구하셨다고 한다. 가족도 아닌데 직접 응원을 해 주러 오시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스테판 니콜라예비치가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이 녀석아. 너도 타티아나에게 한 마디 해 주거라.”

“……무슨 말요.”

“무슨 말이냐니? 전 우승자로서 예비 우승자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말 하지 마시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이미 어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가로서, 친구로서. 솔직히 말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상당히 고심하더니, 결국 말을 내놓았다.

“드레스 예쁘네.”

“……고마워요.”

오늘은 푸른빛 드레스를 입었다. 너무 파격적이지도 않고, 너무 꽉 감싸지도 않는 편안한 연주용 드레스였다.

무대에 자주 올라야 하는 연주자는 이런 포멀한 의상들을 입을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칭찬 역시 이러한 의상 등에 대한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할 말이 없는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표정도 좋고, 컨디션 괜찮아 보이네. 간밤에 잘 잤나 봐?”

“덕분에요.”

“그래, 중요한 날이니까…….”

차라리 날씨가 맑아서 기분 좋다는 이야기를 하지 그래요? 에르네스트.

난 그가 옆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눈빛을 받고 부담스러워하면서 말을 배배 꼬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

에르네스트는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승하라고 말해도 부담되진 않지?”

괜히 에두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실망은 무슨…….”

“실망은 무슨 실망이야,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불쑥 말했다.

“넌 그냥 준비한 대로, 그대로만 보이고 오면 돼.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어.”

“그래도 우승하면 좋겠죠?”

“그야 그렇지만…….”

내가 입상할 수 있을지 없을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적인 생각 이전에,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너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 우승하고 와, 타티아나.”

“알았어요, 아나스타샤.”

그것만으로도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을 전해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조용히 날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

요 며칠 사이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다니는 듯해서 자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져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루슬란 오빠.

이러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루슬란 오빠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힐긋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본선까지 왔구나. 난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네 실력이 상당히 높다는 건 알아.”

그렇게 이야기하던 루슬란 오빠는 문득 이상한 말을 꺼냈다.

“그 자리에 가기까지 넌 무엇 하나 도움받지 않고 홀로 올랐지.”

“……?”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이어 말했다.

“난 그게 자랑스럽고, 부럽다.”

“……예?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많이 도움을 받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예. 물론이죠.”

당연한 말이었다.

물론, 내가 무언가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렇게 콩쿠르에 나서서 또한 아무런 외적 요소 없이 내 피아노만으로 실력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정말 파렴치한 소리였다.

당장 집과 학교, 연습실 등등 모든 환경과 조건이 더할 나위 없이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날 돕고 있었고, 그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축복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강하게 내 뜻을 전하자, 루슬란 오빠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맙고.”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루슬란 오빠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 실력을 가감 없이 완벽하게 보이고 오길 바라.”

“……예.”

실력을 가감 없이 완벽하게. 쉽고도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해내야만 했다.

난 약간 풀어져 있던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말했다.

“오늘 순서로는 제가 첫 번째예요. 대기실에 일찍 가 있으려고 해요.”

“그러려무나.”

아버지가 대답했고, 곧이어 다시 응원의 말들이 이어졌다.

난 이 모두를 결코 가볍지 않게 감사히 받으면서도, 어깨를 무겁게 하지 않고 마음에 간직했다.

어깨가 무거워지면 팔과 손이 둔해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이번엔 스피커로 참가자들을 부르기 전에, 먼저 대기실로 들어섰다.

다섯 명밖에 안 되기도 하지만, 내 순서가 첫 번째였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참가자만 하더라도 30분 정도 시간이 있겠지만, 첫 번째인 나는 아예 조금 일찍 가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편이 좋았다.

내가 아무리 긴장을 덜 하고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다지만, 그건 다 이러한 노하우로 긴장을 컨트롤할 줄 알기 때문인 부분도 있었다.

대기실에 들어온 나는 아직 아무도 없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래도 한두 명쯤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응원해 주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

살짝 으스스함을 느끼며 대기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자니 곧 내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가 찾아왔다.

무섭다기보단, 마음이 차분해졌다. 집중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오늘 프로그램을 재점검하려 할 때였다.

“?”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대기실의 테이블들은 모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개중 한 테이블에만 책이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꺼운 소설책은 아니었다. 보다 크고, 얇은 책이다. 그냥 잡지인가 싶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익숙한 모양이다.

직업병적인 충동으로 의자에서 내려와 그 책을 집었다. 역시나 악보였다.

“마주르카.”

약간 낡은 악보의 가장 겉표지에 쓰여 있는 제목은 쇼팽의 마주르카.

어제 이후로 조금 경계하게 된 곡이었으나, 평소 난 마주르카도 굉장히 즐겨 연주하는 편이었다.

무생물인 악보만 놓여 있는데 무서워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장 넘겼다.

난 이 악보의 소유자가 상당히 꼼꼼하게 곡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연필로 악센트와 프레이징 등을 표시해 놓았고, 어떤 부분은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지 이상한 구름 모양의 그림도 그려 놓았다.

낙서로 보이진 않는다. 이건 이것대로 연구의 흔적이리라.

“……아?”

온갖 부호와 그림이 그려진 악보에서 한글로 쓰인 글씨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냥 한글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 악보의 주인이 세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 필체는 너무나 익숙하게 보였다.

「지금 들어가도 되나……? 저기…….」

그리고 난, 대기실 문을 막 열고 들어오는 임세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악보를 보고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난 머리가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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