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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4화 (124/1,277)

##  124화

「죄송해요. 어제 사진을 찍다가 깜빡…… 아, 어차피 못 알아들으실 텐데.」

“…….”

새하얗게 되어 버린 머리로, 눈동자만을 돌려 멀거니 세연을 바라보았다.

왜소한 편인 나보다 작은 소녀는 내게서 위압감을 느꼈는지 어깨를 옹송그리며 주춤했다.

그녀에게 겁을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내게 세연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제 악보, 돌려주시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 작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난 바로 돌려주지 않고 다시 악보를 펼쳐서 필체를 확인했다.

“…….”

다시 봐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했다. 특히나 이 ‘근사하게’라는 어휘와 필체는 몇 번이나 봐 왔기에 도저히 착각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계신 박성재 교수님의 글씨다.

난 다시 세연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애였다.

교수님에겐 분명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음대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견해서 어릴 때부터 데려다가 키우시다시피 한 제자는 분명 나밖에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근 1년 사이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순간, 가슴 어딘가에 섬뜩한 기운이 틀어박혔다.

「왁! 괜찮으세요?」

현기증이 도는가 싶더니 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숨이 안 쉬어진다. 세연이 다가와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 괜찮다. 정신이 송두리째 뭉개진 기분이다. 머리는 무언가로 죄는 것 같고,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다.

요즘 조금 괜찮았었는데, 다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대체 왜.

난 저리 꺼지란 뜻으로 악보를 거칠게 내밀었다. 한시라도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이 꼴사나운 상태를, 저열한 감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었다.

말없이 내민 악보를 받아 들고, 세연은 한동안 날 내려다보더니 등을 돌렸다.

난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폭발해 버리지 않도록 갈무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대로 나가, 지금 네 잘못이 없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날 미친년으로 만들지 말고 사라져.

“…….”

「그, 이것 좀 마셔 보세요.」

하지만 세연은 대기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테이블에서 물을 한 컵 따라서 다시 돌아왔다.

가까스로 눈을 들어 물컵을 바라보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충동적이고, 발작적인 생각들. 당장 이걸 후려치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을까? 난데없이 빼앗아서 끼얹는다면?

“…….”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우으…… 흑…….”

「괜찮으세요? 왜 우세요? 아니…… 참…….」

왜 안 나가는 거야, 대체. 왜.

너만 나가면 이런 꼴 안 보여도 되는데, 말 걸지 말고 그냥 무시하고 나가서 문 닫아 버리면 되잖아.

그냥 나가란 말야.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무섭지도 않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해?

하지만 모든 생각에 앞서, 갑자기 목 언저리 어딘가를 뚫고 터져 나온 울음이 날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도저히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세연은 티슈를 뽑아 와서 내 눈가에 대 주었다.

「그만 우세요…… 화장 다 망가져요…….」

“……으.”

너만 나가면 된다고 하마터면 한국말로 말할 뻔했다. 제발, 내게 필요한 건 이런 친절이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였다.

“…….”

하지만 혼자 있었더라면 조금 더 추스르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세연이 몇 번이고 티슈를 바꿔 오고, 다정한 어투로 말을 걸어오자 난 안정이 되어서가 아니라 창피해서라도 울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한순간 밀물처럼 정신을 휩쓸고 간 감정이 다시 쓸려 내려가자, 다시 분노가 들어섰다.

“…….”

「괜찮으세요?」

아무리 사납게 노려보려고 해도 코를 훌쩍이고 있어서야 모양이 서지 않는다. 난 죽고 싶어졌다.

세연이 보내는 조금 안쓰럽다는 눈빛.

놓고 간 악보를 찾으러 왔는데 먼저 주워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으니, 얘가 날 얼마나 정신병자로 보고 있을지 두렵다.

난 내가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냈다.

꺼 놓은 전원을 다시 켜는 데에 체감상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난 번역기를 켜서 한 문장을 썼다.

[이제 괜찮아요. 나가셔도 돼요.]

「…….」

세연은 잠시간 날 내려다보더니 나가기는커녕 본인도 스마트폰을 꺼내서 빠른 속도로 문장을 타이프해 내 쪽으로 보여 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아요? 조금 있으면 다른 참가자들도 올 텐데.]

그러니까 나가 달라는 거잖아. 제발.

[예.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빠르게 문장을 보여 준 그녀가 내가 읽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무언가를 이어 쓰려다가 멈칫했다.

왜 울었냐고 이유를 묻고 싶은 듯했으나 내가 다시 발작하진 않을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난 먼저 썼다.

[전 그냥 가끔 이래요.]

세연은 약간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그래도 그냥 특이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글을 썼다. 난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무언가 사명의식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잘하시잖아요. 제 교수님이 그러셨는데 당신 연주가 참가자들 중 제일 낫다고 하셨어요. 제자인 저보다 더요.]

대충 무시하려던 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

“뭐라고요?”

무의식중에도 다행히 러시아어가 나왔다. 세연은 내 반문을 듣고는 다시 썼다.

[제가 온 한국에서 실황 중계되고 있는 걸 계속 모니터링하고 계셨다더라고요. 당신의 연주를 듣고는 아주 원숙하고 깊은 연주라고 하셨죠. 그런데 막상 제자인 제 연주는 잘 안 보셨나 봐요. 너무하죠.]

놀라다 못해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교수님이 내 연주를 다 보고 있었다고? 실황 중계로?

이건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조금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졌다.

아까처럼 무턱대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인 생각들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난 이제야 마주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저 미뤄 둘 것이 아니라 제대로 확인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교수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입을 열면 덜덜 떠는 바보 같은 소리가 나왔겠지만, 다행히 스마트폰으로 써 내리는 글자는 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내 감정을 감쪽같이 숨겨 주었다.

세연은 갑자기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화색이 만연하여 대답해 주었다.

[박성재 교수님이에요. 한국의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죠.]

예상했던 이름이 다시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가 쿡쿡 아파 온다.

다행히 아까처럼 숨도 못 쉴 정도는 아니다. 난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무표정을 연기했다.

세연은 내가 이해했는지 가만히 지켜보더니, 다시 이어서 썼다.

[한국에선 정말 유명하신 분이신데, 실력도 실력이지만 대학생도 아닌 절 따로 가르쳐 주실 정도로 훌륭하신 분이세요. 레슨비를 받으면 불법이라시면서 돈도 안 받으시고요.]

해외 음대 교수들은 자유롭게 콘탁으로 자기 학교 학생이 아닌 학생들에게도 레슨을 해 주곤 하지만, 한국엔 그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돈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되레 사비를 더 지출하시곤 했다. 본래 그런 분이셨다.

난 그것을 너무 잘 알았다. 나 역시 음대에 입학하기 전엔 그렇게 레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확실해졌다. 임세연은 내 뒤를 이어 두 번째 교수님의 교외 제자였다.

“…….”

[그분에게 배운 지 4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저같이 평범한 애도 이렇게 큰 콩쿠르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실 정도예요. 정말 대단하시죠.]

세연의 말을 들으며 난 다시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간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되고 난 뒤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계속 피해 왔다.

음악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러시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굳이 맞서서 극복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애초에 극복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린 그 판단은 정확했다.

난 단지 그 근황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인데도, 가슴이 미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연주를 보고 평가해 주셨다는 것엔 정말로, 굉장히…….

[그러니 힘내세요. 한국 속담 중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을 밖으로 굽히면서까지 당신을 우승후보라고 보증해 주셨으니……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시려나요?]

[이해했어요.]

[다행이네요.]

세연은 웃으면서 그렇게 썼다. 난 이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연기로도 웃음이 안 나왔다.

내가 죽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4개월 전 교수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 아이를 제자로 키우기 시작하셨는지. 세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못 견디겠다.

세연은 그런 날 보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허리를 쭉 펴며 일어섰다.

그대로 떠나나 싶더니,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다시 내게 보였다.

[아, 그리고. 예선 첫날에 당신이 절 도와준 일도 이야기했더니, 러시아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긴 쉽지 않으니 친하게 지내라 하셨어요.]

어리긴 어렸다. 러시아인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잔 건가?

하지만 세연은 지금이 기회라는 듯, 이어 적었다.

[싫지 않으시다면, 저와 친구 하지 않으실래요?]

“…….”

방금 내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지 뻔히 봤으면서도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넉살이 좋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얘도 제정신이 아닌 건지.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지금 세연은 내가 그녀와 가까이해야 하는 동기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그녀와 친구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명확했고, 또 달콤하게 날 유혹해 왔다.

어쩌면 세연은 직감적으로 내게서 그런 것들을 읽어 냈는지도 모른다.

[싫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건 내가 세연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난 딱 잘라 거절했고 세연은 대뜸 격렬하게 문장을 썼다.

[왜요?]

[친구라면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지금 대화 중 아닌가요?]

[싫어요.]

세연이 싫진 않았다. 날 잃은 교수님이 찾아낸 또 하나의 재능이라면, 기쁘게 생각한다. 난 그렇게 세연을 여겨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변덕이 날 휘두를지 잘 모른다. 그 무엇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난 음울하고 어두운, 그런 감정 등에 턱까지 몸을 담그고 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기 위해선 상당한 균형감각을 필요로 했다. 이미 충분히 힘겹다.

그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적당히 잊고 살면서 무뎌지길 바라는 것이 나았다. 언젠가 괜찮아지리라.

고집스럽게 세연을 올려다보자 그녀 역시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난 그녀가 생각보다 쉽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연이 불쑥 한국어로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지 뭐. 그럼 친구 해 주는 거지?」

“…….”

기가 막혔다. 아니, 무서웠다.

입을 벌리고 있자 그녀가 가볍게 웃더니 스마트폰으로 썼다.

[욕 아니었어요. 또 볼 일이 있겠죠. 그럼 전 가 볼게요. 연주 잘하세요.]

세연은 지금까지 미적거렸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빠르게 문장 더미를 우르르 써서 보여 주더니, 재빨리 자리를 떴다.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랬어?

“…….”

드디어 홀로 남겨진 나는 무심결에 눈가를 비비려다가, 일어나서 대기실 한쪽에 있는 거울로 갔다.

생각보다 그렇게 기절할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붉게 충혈된 눈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다.

화장을 옅게 하면서 눈화장에 쓴 워터프루프 제품은 전혀 안 번져 있었다.

연주를 하면서 땀을 흘리는 경우가 많아 쓴 제품이었는데 이렇게 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지만 대충 점검한 후, 난 대기실 구석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정말 잠시 후면 다른 참가자들이 대기실로 입장할 시간이었다.

빠르게 평정을 되찾아야 했다. 첫 번째 순서인 데다가, 한국에서도 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잘하는 것 외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조건 잘해야만 했다.

“…….”

그렇게 주먹을 꾹 쥐고 있다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도 선생님인 미하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지금 내가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지도 선생님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잘하라고 한 마디만 해 주신다면 정말 괜찮아질 것 같았다.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이제 무대에 올라야 할 내가 아니라 왜 선생님의 전화가 꺼져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꺼 놓아야 할 이유가 있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그만 전원을 끄려다가, 문득 또 한 명의 다른 선생님이 떠올랐다.

난 무심결에 주소록에서 그 이름을 찾았고, 전화를 걸었다.

“…….”

착신음이 가는 와중에도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걸었던 전화를 끊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무대를 앞두고…….

- 타티아나.

“구세프 선생님.”

선생님 중 한 분에게 전화를 거는 것 정도는.

난 공손하게 선생님을 불렀고 구세프 선생님은 대뜸 말했다.

- 뭐냐.

“…….”

이유 모를 죄책감과 의무감으로 전화를 건 것은 맞다. 상당히 불순한 의도다.

하지만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반응은 정말 아니지 않은가?

난 중얼거렸다.

“에르네스트가 불쌍해요.”

-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해라.

구세프 선생님과 어떤 사제 관계일지 문득 그가 생각나서 한 말이었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헛소리 말라는 듯 일축했다.

“…….”

내 걱정이나 하라는 말인즉슨 걱정을 하긴 하신다는 건가?

“선생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무슨 부탁.

끝까지 퉁명스러운 어투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말했다.

“잘하고 오라고 한마디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

당혹스러움이 전화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이런 식으로 한 방 먹일 생각은 없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입이 비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지금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는데, 구세프 선생님의 당황은 더 심하리라.

구세프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더니 빠르게 말했다.

-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본선이라 너도 긴장한 거냐?

“그냥 해 주실 수도 있잖아요.”

난 조금 골이 나서 말했다.

“전 비록 선생님을 제대로 사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마디쯤은 해 주실 수 없나요.”

- 네가 왜 날 제대로 사사하지 않았지?

그런데 갑자기 구세프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 넌 누구보다 충실하게 미하일과 내게 배웠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대충 배우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열심히 하긴 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난 지금 내가 있는 위치와 해야 할 일을 다시금 자각했다.

아직까지도 조금 혼곤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맞아요.”

- 너야말로 날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약간 자신 없다는 듯 말끝을 흐리던 구세프 선생님이 언제나처럼 뭉툭하게, 그렇게 말했다.

- 그래, 잘 하고 와라. 타티아나.

“…….”

- 올해는 운이 좋은지 딱히 잘난 녀석도 없어 보이더군.

꼭 이렇게 한마디를 붙이셔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 문제없겠지?

“문제없어요.”

어쨌건 구세프 선생님이 날 믿어 주시고 계시다는 건 분명하게 느껴진다.

전화를 끊자마자 남은 참가자들이 들어왔다.

난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다시 오롯이 혼자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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