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타티아나가 대기실로 입장하고, 에르네스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보호자인 유리와 루슬란은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스테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관심도 없는 사업 이야기가 오가는 듯한 분위기인 그 사이에 끼기도 싫었고, 요 근래 많이 신경질적으로 변한 아나스타샤와 딱히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에 있어선 조금 아쉬웠다.
타티아나와 찰싹 붙어 다니면서 거의 무슨 보호자 행세를 한다는 건 알겠고, 또 존중해 주겠는데…… 이건 정도가 심해도 조금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하지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아나스타샤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천성적으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종종 막 나가는 것을 보면 성질머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유순하기 짝이 없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가까운 에르네스트까지 경계한다고 해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아.”
그런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처음엔 타티아나의 외모에 끌렸고, 베르체노프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는 거의 운명을 느끼기까지 했다.
장남인 에르네스트가 늘 사업을 하길 바랐던 그의 아버지는 몇 번이고 베르체노프가 얼마나 중요한지 수없이 말해 왔던 것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접근조차 어렵겠지만, 같은 연주자로서 타티아나와 친분을 쌓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사람을 음악성으로만 평가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를 나누면서,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에게 그저 단순히 품었던 생각들을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
타티아나에겐 나이 차 나는 오빠가 있어서 직접 사업을 물려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에르네스트의 삶은 겉보기보다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들이었고 맏이였다. 사업을 잇길 바라는 아버지에 대항해서 한참이나 어렸을 때부터 1등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외줄타기를 해 왔다.
이렇게나 다른데도,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자신이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남부러울 것 없어야 할 타티아나는 늘 약간 울적해 보였다. 고민이 많았고, 삶을 어려워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피아노 앞에서 연주자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타티아나 역시 그와 같았다.
“…….”
연주자 대기실에서 본선 무대를 준비 중일 그녀를 떠올리며 에르네스트는 옅게 웃었다.
여전히 아예 관심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타티아나가 교제를 원한다면 그는 농담으로라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환영이었다. 그냥 연인으로만 놓고 생각하더라도 타티아나는 매력적인 상대였다.
하지만 그 전에, 연주자로서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부딪치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그런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어떻게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
에르네스트는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타티아나가 했던 말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는 중이었다.
물론 아버지인 스테판은 아직도 무슨 운명처럼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를 엮으려 들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심지어 같은 콩쿠르에 연달아 참가. 이유도 참 많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마저도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남녀 사이의 운명 같은 시시한 것으로 이름 짓기 싫었다.
“…….”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간 타티아나의 본선 프로그램의 연습을 지켜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승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했던 말들은 결코 입발림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위협할 수 있는 참가자들은 없다고 확신했다.
물론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어제 연주를 듣다 말고 도중에 울면서 나와야 했을 정도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앞으로 나아갈지 뒷걸음질 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타티아나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택하곤 했다.
그렇다면 연주자로서, 친구로서 타티아나가 이겨 내길 바랄 뿐이다.
“우리도 들어가자.”
“…….”
본선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
자리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청중들이 모두 착석하자 잠시 후, 사회자가 간단한 안내를 했고 빠르게 본선 파이널라운드가 시작되었다.
“29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열렬한 응원의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무대 위로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걸어 나왔다. 우아한 걸음걸이가 인상 깊다.
조명 앞까지 나온 타티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얼마든지 연기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박수를 치는 대신 유심히 타티아나를 주시했다.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곳에서 타티아나가 큰 슬럼프를 겪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 에르네스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본선에서 연주해야 하는 세 곡 중 첫 번째 곡은 쇼팽의 에튀드, 왈츠, 마주르카 중 한 곡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준비한 본선 프로그램의 첫 번째 곡은 쇼팽의 에튀드 op.25의 11번 곡이었다.
쇼팽 본인은 에튀드에 부제를 붙이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사람들이 붙인 부제로는 ‘겨울바람’이라고 불린다.
낮게 깔리는 도입부에 에르네스트는 안도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예선에서 갑자기 돌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또 마주르카 등을 꺼내 들까 봐 불안해했었다.
어제 타티아나는 분명히 마주르카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타티아나는 준비된 음악을 펼쳤다.
타티아나는 얼음으로 된 인형처럼, 천천히 한 선율을 늘어놓았다.
어린아이도 따라서 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만큼 표현하기도 까다로우며, 이 곡 전체에 반복되는 선율이었다.
그 선율은 닫힌 집 안에서 두 번 반복해서 울리다가, 갑자기 문을 열자,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느닷없이 집 안을 통째로 장악했다.
홀 전체에 강렬한 아르페지오로 채색된 눈보라와, 거대한 주선율이 내려앉는다.
본래 순수음악이었던 곡에 굳이 겨울바람이라는 단어로 된 부제를 붙여 많은 사람들이 표제음악으로 부르게 된 것은, 그만큼 이 곡이 그려 내는 이미지가 강렬하고 직관적이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하강하는 듯한 오른손 아르페지오는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 듯하더니, 완전히 주저앉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곤 갑자기 치솟고, 다시 허물어뜨리면서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로 옆에서 발을 구르는 듯한 파괴적인 음향이 선율을 이어 나간다.
얼핏 화려한 아르페지오에 속을 수도 있지만, 곡 전체를 지배하는 주선율은 왼손에서만 이어진다.
버티어 내는 모든 것들을 거꾸러뜨릴 것만 같은 음악이 홀을 울렸다.
에르네스트는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닫힌 연습실이 아닌, 제대로 된 음향을 낼 수 있는 무대에서 터져 나오는 타티아나의 연주는 가히 기적과도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강렬한 왼손을 만들기 위해 저 작은 체구의 타티아나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술적으로 흠잡을 곳은 거의 없었다.
극히 까다롭기 짝이 없어서 피아니스트들도 최악의 난이도를 지닌 곡 중 하나로 꼽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그 특유의 노련함으로 매끄럽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도약 아르페지오라는 말도 안 되는 구간에서도 전혀 템포를 늦추지 않았고, 박자를 저는 일도 없이 매끄럽게 처리해 나갔다. 어마어마한 기예였다.
작은 스케일 하나, 음 하나도 뭉개는 일 없이 페달을 아끼면서 청중의 귀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청중들은 살갗을 에는 듯한 음색에 몸서리를 쳤다.
단순히 소스라칠 정도로 차가운 냉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독할 만치 음울한 고뇌, 사무치는 외로움과 처절함,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희망과 음산하게 목 뒤로 와 닿는 손아귀.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칼날과도 같은 바람.
에르네스트는 목을 움츠렸다.
연습실에서도 충분히 소름 돋는 음색들을 보이긴 했었다. 어떠한 이미지에 대한 표현력은 타티아나의 천재성이자 특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게 맞지 않게 굉장히 심도 깊고 무거운 표현들을 그려 내곤 했다.
하지만 이건 수준이 달랐다.
조성이 변화하고 나서도 똑같이 반복되는 주제와 형식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이라도 두 번, 세 번 보면 기대와 역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몰고 오는 겨울바람엔 방심할 틈이 없었다.
잠깐 정신을 놓을 만하면, 반대편에서 거칠게 후려쳐 온다.
급하게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목을 움츠려 보지만,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변화하며 다시금 생각지도 못한 곳을 파고들어 온다.
그렇게 파고드는 음악은 스멀거리며 몸을 타고 오른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지 않고, 달라붙었다.
이 곡은 연주는 난해하지만 해석은 에튀드답게 단순했다.
어렵고 난해한 이미지가 아닌 보다 명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그 정도를 소화하는 데에 만족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주제를, 저 어둡고 깊숙한 어딘가에 직접 손을 집어넣고, 가득 쥐고 끌어냈다.
회장 전체에 짐짓 공포감마저 감돈다.
사람은 공포에 연약하다.
그렇게 겨울바람이 아닌 그 이상의 끔찍한 무언가로 주제를 오해하기 직전, 곡 전반에 서린 품위와 순수함이 청중들을 현실 세계로 끌어당겼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치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마법과도 같은 균형감각.
그냥 노련하다는 평가는 이 연주를 아주 박하게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며칠간 그녀의 연습을 봐 준 에르네스트조차 예상치 못한 완성도였다.
“…….”
에르네스트는 놀라워하면서도 고심하며 연주를 지켜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연습실에서 타티아나와 함께 연습을 봐 주면서도, 아직은 자신이 반걸음 남짓 앞서 있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타티아나는 음악에 있어서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았고, 가르쳐 주는 대로 넙죽 받아들이는 학생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아니즘을 찾아 나선 구도자였으며, 때문에 지금은 약간 헤매는 중이었다.
타티아나 본인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알았다. 매 연주마다 조금씩 음악이 달라지고 있었고, 기준은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 흐릿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어떤 연주자도 완성된 피아니즘을 가지고 있진 못했고 조금씩 찾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피아니즘은 가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흔들리곤 했고, 이것은 타티아나가 정신적으로 자주 불안해하고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는 무대 위에서 타티아나의 음악에 변화가 생긴다면, 분명 굉장히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으리라 예상했다.
시간예술을 하는 특성상 즉흥적인 부분 역시 중요시해야 하는 연주자이지만, 예상치 못하고 돌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진행되는 연주는 만전을 기한 연주보다 못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는 성큼, 한 걸음 앞섰다.
대기실로 들어가기 전 타티아나는 이렇게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무언가 변화를 얻었고, 그걸 무대에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에르네스트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타티아나를 강렬한 피아니스트로 만들어 놓았다.
타티아나는 숙련된 화가처럼 익숙한 정물화를 잘 그려 내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그 이상으로 심원한 무언가를 끌어내는 데엔 항상 과하게 물감을 덧칠하거나, 아예 손을 대지 못하곤 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인상주의와는 잘 안 맞는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건 잘못된 평가였다.
타티아나는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갈수록 신묘해지는군.
이제 막 첫 곡을 보였을 뿐인데 예상을 송두리째 박살 내버린 친구를 보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