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6화 (126/1,277)

##  126화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쇼팽의 에튀드를 들으며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전날 타티아나가 약간 불안증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걱정했었다.

때문에 중요한 스케줄도 양해를 구하곤 모두 취소하고 바로 비행기 표부터 샀다.

눈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지만 않았더라면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미 대기실로 일찍 들어가 버렸다.

대기실로 따라 들어가서 짧은 격려라도 한마디 해 줄까 싶었지만, 본래 올 예정이 없었던 지도 선생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면 쓸데없는 긴장만 더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일단 청중석에 앉은 것이다.

“…….”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타티아나는 위축되거나 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모든 실력을 자신만만하게 꺼내 들었다. 심지어 거기에서 더 나아간 듯했다.

타티아나의 기본 바탕은 매우 단단하고 또렷했다.

거의 기계처럼 완벽한 템포와 악상을 기준으로 두고도 또 하나의 과감한 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미하일은 웃어 버릴 뻔했다. 타티아나처럼 표현력이 뛰어나고 호소력 짙은 음색을 낼 줄 아는 연주자가 정체된 그림에만 골몰하고 있을 리 없었다.

타티아나는 항상 순종적이었지만 막 나갈 땐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막 나가는 학생이기도 했다.

기가 막힐 정도의 표현력이었다.

이 쇼팽에선 심지어 드뷔시나 라벨의 느낌마저 든다.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흰 눈밭에 색을 칠했다.

점수를 따기 위해 보이는 음향은 전혀 없었다.

그냥 잘 치고, 툭 던져 놓았다. 합당한 점수는 알아서 매겨 보라는 시험문제같이 들렸다.

개인 콘서트가 아닌 콩쿠르에선 어디까지나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기기 좋은 객관적인 연주를 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 누구도 이 연주를 감점할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

그리고 이러한 타티아나의 연주는 단지 심사위원 일곱 명뿐이 아닌, 수백 명을 모두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 중인 보리스는 평소 자신을 클래식 애호가라고 생각했다.

꽤 오랜 기간 클래식을 들어 온 그는 완성도 높은 공연을 주로 관람하러 다녔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청소년 콩쿠르도 보면서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본선엔 꽤 훌륭한 실력을 지닌 아이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어설프게 프로라 불리는 피아니스트들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 그런 옥석들을 발견하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옥석들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보리스는 이렇게 청소년 콩쿠르에 나오는 어린 연주자들을 보면서, 앞으로도 클래식 음악이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 나가며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는 증거들을 종종 확인하고 싶었다.

“……29번, 29번, 29번.”

보리스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거리며 팜플렛을 내려다보았다.

29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다시 고개를 들고, 막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숨을 고르는 연주자를 바라보았다.

맑은 바다처럼 푸른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외모만큼은 한눈에 확 들어왔다.

특히 피아노 앞에 앉은 자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부정하지 않고 곧게 편 목과 등허리에서 품위가 느껴진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였다면 보리스는 급히 팜플렛을 뒤져 이름을 찾진 않았을 것이다.

연주,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연주 실력이 보리스의 온 신경을 옭아매었다.

쇼팽 에튀드는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었고, 연주자별로 수도 없이 많이 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에서도 방금 전의 연주와 같은 음색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단순히 휘몰아치는 바람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음악이었다.

빠르게 고동치는 음울한 음색에 이끌려 삽시간에 깊은 감정의 골짜기로 끌려 내려갈 뻔했다가 도로 올라온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특별한 음악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쇼팽 에튀드 중에서도 난곡으로 손꼽히는 op.25의 11을 완벽한 테크닉으로 연주하면서도 크게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고, 저 나이 대면 슬슬 습관으로 나타나는 거장 같은 몸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목을 펴고, 자연스럽게 앉아서 자연스럽게 연주해 나갈 뿐이었다.

도저히 어린 소녀가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보리스는 다시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나름 클래식 애호가인 자신이 이런 보석을 여태껏 몰랐다는 것은 조금 슬프지만 저 실력에 무명이진 않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수천, 수만 단위로 팬이 있을 테니 인터넷을 찾아본다면 보다 자세한 정보 등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켤 수 있게 되면 당장에 그 이름을 찾아보고, 다른 콩쿠르나 연주회 영상이 있다면 모조리 찾아볼 생각이었다.

“…….”

그리고 지금 당장은 눈앞에 주어질 남은 두 개의 보물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타티아나가 건반 위로 손을 드리웠다.

***

뭐였지, 도대체?

방금 마신 커피에 환각제라도 들어 있었나?

일곱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 마트베이 아파나시예비치 옐라긴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선전에서 보여 준 쇼팽 폴로네이즈, 글린카의 종달새 그 무엇도 범상치 않았다.

마트베이는 그 두 곡에 각각 1점, 5점으로 극과 극을 달리는 점수를 주었지만 사실 그 무엇도 타티아나의 실력을 평가절하 할 순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보란 듯이, 다시 이번엔 쇼팽의 에튀드로 기겁할 만한 실력을 보였다.

워낙에 훌륭한 연주들이 많아서 거의 교과서처럼 정형화되어 버린 쇼팽의 에튀드. 그중에서도 25-11. 타티아나는 그것을 완전히 가지고 놀아 버렸다.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는 이미 무의미해졌다. 마트베이는 타티아나를 마냥 어린 신예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난곡을 이 정도까지 소화해 낼 수 있는 연주자라면 응당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줘야만 했다.

마냥 어리다고 무시한다면 크나큰 실례였다.

과거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프란츠 리스트, 카미유 생상스, 요제프 호프만 같은 음악가들이 데뷔해서 프로 피아니스트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 열 살 남짓이었다.

열다섯은 이미 충분한 나이였다.

그렇게 미처 생각을 정리하고 충격이 가시기도 전.

타티아나는 에튀드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다음 곡을 시작했다.

“……!”

느닷없이 얼굴 앞에 음악이 와닿았다. 마트베이는 갑자기 시작된 두 번째 곡에 깜짝 놀랐으며, 그 선곡엔 두 번 놀랐다.

최후의 낭만주의자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그 피아노 소나타 2번.

악보로 존재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위대한 유산이 한 소녀의 손에 의해 이 시간을 장악하는 예술로 승화된다.

쓸어내리듯, 하강하는 아르페지오와 거대한 두 화성이 곡의 시작을 알린다.

불과 2초 남짓 되는 사이에 빼곡히 전달되는 장엄한 주제에 절로 뇌리가 전율한다.

숨죽이며 서서히 침잠하던 선율은 다시 치솟고, 반복되다가, 곧바로 전주곡처럼 빠르게 이 곡 전체를 암시한다.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온다.

불과 몇 초 전에, 열다섯에 불과하지만 피아니스트로 간주하겠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다섯 살이 이런 대곡을 연주해도 되는가 의구심이 든다.

말이 안 된다. 일단 테크닉적으로 3악장을 소화할 수 없을뿐더러 이 곡을 1913년에 작곡한 라흐마니노프 본인조차 장황하다고 생각해서 1931년에 100마디도 넘게 삭제하는 개정을 강행하고, 그러고도 개정판에도 만족하지 못해 결국 자신의 레퍼토리에 넣지 않은 곡이다.

그만큼 난해하고, 이해도가 떨어진다면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어려운 곡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화려하게 자신의 테크닉을 펼쳐 냈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는 듯, 물 만난 고기처럼 선율과 화성 사이를 헤엄쳐 다녔다.

언뜻 허무하게 흩어져 버릴 수 있는 화성이 또렷하게 잡히면서 주제를 이어 나갔다.

거대한 전주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자 라흐마니노프가 평생을 함께한 주제인 종과 죽음, 종교적인 색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울한 질감, 이 모든 것을 타티아나는 조금 독백하듯 풀어내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는 마냥 조용히 속삭이진 않는다.

목소리는 점점 더 낮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가라앉더니 돌연 분위기를 바꾸어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변한다.

“……!”

마트베이는 누구도 듣지 못하게 입을 벌려 탄성을 냈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1931년 개정판이 아닌 1913년의 오리지널판을 연주하고 있었다.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손에서 연주되는 것은 1931년 개정판이나 호로비츠가 또 한 차례 개정을 한 호로비츠판이 대부분이었다.

훨씬 더 난해하고 테크닉적으로 까다롭다는 오리지널판은 잘 연주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1913년 버전을 준비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급격하게 상승했다가, 발전하면서 이 전주의 클라이맥스를 보다 화려하고 장엄하게 끌어온다.

귀 속에 새겨 넣기라도 할 듯 명확하게 울린다.

마치 이 홀의 어쿠스틱을 계산이라도 한 듯한 폭발적인 음향에, 마트베이는 기막혀했다.

이것이 열다섯짜리 여자아이의 소리란 말인가? 이럴 수도 있는가?

음색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엄청난 재능을 가진 듯한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홀 전체를 쥐락펴락했다.

어디에도 음이 꽉 차 있어서 공간감을 상실할 것만 같다.

1악장 말미의 종소리에서, 그 천재성을 또다시 느낀다.

10분 남짓의 1악장을 듣는 내내 간신히 숨을 세 번 정도 쉰 기분이었다.

“…….”

2악장이 시작되기 직전, 마트베이는 제발 쉬었다가 하자고 하고 싶은 마음과 어서 빨리 시작하라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2악장은 굉장히 서정적이고 1악장에 비해 조용한 분위기였다. 악장지시는 Lento. 느리게 시작된다.

이미 글린카의 종달새에서 타티아나가 서정적인 악장을 얼마나 잘 표현해 내는지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또 한 차원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청중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 같다.

1악장의 속삭이는 듯한 독백과는 전혀 다르다. 보다 농밀하고 관능적인 목소리였다.

언뜻 에로틱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음색이 귀를 간질였다.

아끼던 페달도 유감없이 써 가면서, 타티아나는 2악장의 주제를 아름답게 그려 나갔다.

때론 오케스트라처럼 터져 나오는 음의 파도보다 이런 환상적인 선율이 사람의 마음을 더 강하게 휘어잡는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주저 없이 이용했다.

“…….”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애상이 풍부한 선율은 한 번 1악장의 주제를 품고 화려하게 날개를 퍼득였다가, 다시 우아하게 접혔다.

황홀함마저 느껴지는 원숙한 솜씨였다. 한 마리 커다란 백조가 떠올랐다.

다시 날개를 접은 백조는 무대 위를 떠돌아다니다가 3악장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청중들을 바라본 백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날개를 펴고 비상했다.

몇 번이고 날갯짓을 하더니 그대로 우아하게 활강한다.

“…….”

마트베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극도로 어려운 구간을 놓고도 타티아나는 그 어떤 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건반을 타건했다.

날아오르는 무언가는 추락하기도 쉽다. 약간의 머뭇거림이나 작은 실수도 거대한 위화감으로 이 모든 음악을 내동댕이쳐 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구간이었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타티아나는 화려한 주제를 깔끔하게 그치곤 다시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성은 장조로 변화했지만 그것을 온전히 전하면 혼란스럽다.

타티아나는 교묘하게 조성이 변화한 1악장의 변주를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전해 주었다.

예선전에서 장조인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조로 들리게끔 하는 기상천외한 짓도 가능케 한 바 있었다.

타티아나는 연주자에게 주어진 한계를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자신이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해 나갔다.

1악장을 회상하는가 싶더니, 다시 무대를 맴돌던 백조가 홰를 친다. 그것만으로도 마트베이는 모든 신경을 빼앗겼다.

무대가 하나의 작은 연못처럼 느껴졌다. 타티아나와 피아노는 그 위에 떠 있었다.

타티아나는 청중 모두를 자신의 연못에 초대하고는 연주를 선보였다.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면 응당 영향을 받아야 할 역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처럼 타티아나는 화려한 패시지를 아주 가볍게 연주해 나갔다.

왼손이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기계처럼 도약한다.

오른손을 들어 쿡 찍는다.

가느다란 팔은 그리 큰 힘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크기만 하고 속이 텅텅 빈 음이 아닌, 묵직한 무게를 지닌 음이 피아노에서 쏟아져 코에 직접 와 닿는다.

귀가 아닌, 얼굴 전체로 듣는 기분을 느낀다.

다채롭고 화려한 음의 스펙트럼에 압도된다.

“…….”

정신없이 쏟아지는 음의 폭포수는 라흐마니노프에게서 자주 보이는 그 특유의 교차 연타와 화려한 하강 피날레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복잡하다 못해 끔찍하다는 평가까지 듣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열다섯 살 연주자에 의해 깔끔하게 요리되어 선보여졌다.

향신료가 과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기름지거나 느끼하지 않게.

담백하고 따뜻하다.

“브라바!”

마트베이는 사방에서 울리는 환호성에 여기가 콩쿠르장이 아니라 콘서트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참가자들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과한 환호는 안 보내는 것이 에티켓이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면 찬사를 보내야 마땅했다.

홀이 떠나가라 울리는 박수소리에 타티아나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묵례했다. 환호성은 더 커졌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이상 답례를 보내지 않고 자리를 잡고 건반을 내려다보더니 왼손을 들었다.

마트베이는 예선전 1라운드에서 타티아나에게 1점을 준 것을 격렬하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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