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조금 피로하다.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지치는데, 몸도 힘들다.
키가 198이 넘고 손 크기가 13도, 즉 도에서 다음 옥타브 라까지 닿는 괴물 같은 피지컬을 지닌 라흐마니노프의 곡이다.
난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사랑하고 특히 그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내가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 모든 소나타 중 제일 좋아하는 곡이지만, 쉽게 즐길 순 없었다. 신체적인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난 필사적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잠재력을 끌어냈고, 라흐마니노프는 그런 나에게 자신의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뿐이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한다.
“브라바!”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청중석으로부터 열광적으로 쏟아지는 에너지에 피부가 따끔거린다.
콩쿠르에서 굳이 프로그램 중에 일어나 답례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렇게 열성적인 환호를 그냥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는 다시 앉았다. 하지만 답례를 장작 삼아 소리들은 더욱 커졌다.
난 쓴웃음을 지었다. 저 굶주리고, 양식 있는 청중들을 진정시키는 일은 간단했다.
달라는 것을 주면 된다.
다행히 나에겐 아직 한 곡이 남아 있었다.
건반 위로 손을 들어 올리자, 모든 소리가 삽시간에 사라진다.
조용해진 홀에서 내 손동작을 주시하며 수백 명의 사람이 그다음을 기다린다.
“…….”
세 개의 개별적인 곡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 청중들에게 선보이는 하루의 디너라고 한다면, 그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곡.
본래 본선 프로그램에서 보이려 했던 글린카의 종달새는 이미 예선에 썼기 때문에 꺼내 들 수 없었다.
조커로 준비했던 곡을 써 버린지라 다시 마지막 곡을 골라야 했고, 후보는 몇 곡이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와 나는 반드시 이 곡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쇼팽의 뱃노래.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디너의 마지막으로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쇼팽으로 시작해서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다시 쇼팽으로 마무리되는 이 수미쌍관의 구조는 하나의 소나타와도 닮아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왼손으로 곡의 시작을 열었다.
뱃노래는 거의 순수한 절대음악만을 추구했던 쇼팽의 정말 몇 안 되는 표제음악 중 한 곡이다.
무대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떠올리며 잔잔히 흐르는 아르노 강을 그린다.
짧고 희미한 전주는 배경을 어렴풋하게 제시하며 곡 전체의 몰입감을 끌어 올린다.
그 위에 청중 모두를 데리고 간다. 이미 홀 전체는 하나의 곤돌라다.
노를 저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여유로운 뱃놀이에 다급함은 필요하지 않다. 곤돌라 뱃사공의 노는 하나이며, 길고, 느긋하다.
다이나믹한 리듬은 곡 전체에 걸쳐 반복되면서 뱃사공의 개성이자 실력을 드러낸다.
곤돌라는 강물을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스쳐 지나가는 다른 곤돌라와, 피렌체의 풍경이 서서히 바뀐다.
드뷔시 혹은 스크리아빈의 무조음악처럼 조성이 변화하며 보다 깊고 풍부하게 음악을 이룬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순간적으로 루바토를 주면서, 화성의 치환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놓는다.
너무 심취해 버리면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구간이었다.
지나친 느끼함은 고급스러움이 아닌, 싸구려 같은 분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갈무리하며 손끝의 감각에 주의했다.
그리고 약간의 변주된 주제. 미세하게 조금 템포를 올린다.
어깨를 흔들며 강하게 노를 밀치고, 아르노 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출렁이는 강물에 기분 좋게 배가 흔들린다.
“…….”
인위적인 힘 없이 그저 강물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면, 그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마저 보이기 시작한다.
노를 젓지 않고 그저 지켜본다. 조금 더 발랄하고 섬세하게, 정밀하게 그 모든 것들을 배경 위에 올렸다.
넘쳐흐르지 않게, 짧고, 하지만 무언가의 전조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끄러운 노래는 할 수 없다. 나지막하게 흐르는 두 개의 성부는 연인과 속삭이는 작은 노래다. 흘러나오는 대로 선율을 이어 나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선율은 다소 격동적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사르르 가라앉는다.
조성도 몇 번이고 바뀌는 이 선율을 위화감 없이 연결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쇼팽이 말년에 작곡한 곡답게 엄청난 난이도를 보였다. 테크닉적인 것은 차치하고 연주자의 표현력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징이 대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수백 번이고 이 뱃노래를 연습하면서도 만족할 만한 음향을 찾기 힘들었다.
표제음악은 이미지를 확고히 하여 해석에 편의를 가져오지만,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난 절제하고 있던 것들을 조금 더 풀어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감정을 끄집어 올리는 것으로 약간의 해답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 곡이 작곡된 1846년. 쇼팽의 건강은 폐결핵으로 악화되고 있었고, 연인인 상드와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무시당하고, 조롱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약속한다.
그 여행에서 이렇게 평화롭고 목가적인 한때를 보내며 어긋나고 있는 연인과의 화해를 꿈꾸는, 그러한 쇼팽의 꿈이 그 어떤 가식도 없이 여실히 곡조에 드러난다.
어떠한 숭고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다. 아주 소박하고, 수수한 꿈이다.
하지만 이 곡이 작곡되고 1년 후, 쇼팽은 상드와 이탈리아에 가지 못하고 이별하게 되고, 그 후 2년이 지난 1849년에 죽는다.
애잔한 고통, 사랑.
멘델스존의 뱃노래처럼 그저 명랑하고 행복하기만 해야 할 장조의 이 곡이 왜 그보다 훨씬 다양한 색채감을 가지고 있는지, 난 간신히 이해한 모든 바를 건반을 통해 써 내려갔다.
얼마나 전해질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충분했다.
“…….”
노래를 그치고 나면, 다시 서서히 흐르는 강물과 곤돌라뿐이다.
다시 노를 젓는다. 이전보다 조금 더 힘차게.
어둡고 우울함은 담고 있지 않다. 밝고 활기차게 본래 주제를 풀어냈다.
반복되는 주제이지만 테크닉적으로는 조금 더 까다롭다. 손을 펼쳐 내리찍지만,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여기서 일어나 발을 구르면 모든 곡이 뒤집어지게 된다. 이곳은 여전히 강물 위였다.
난 치밀하게 음량을 조절했다. 촉촉한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있는 소리가 만들어져야만 했다.
계속 도약해야 하는 손에 힘이 실린다. 실리는 만큼 거두고, 과하지 않게 서서히 깔아 나갔다.
모든 음이 위에서부터 울리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강물처럼 바닥에서부터 느껴질 수 있도록.
클라이막스에도 온 힘을 때려붓는 듯한 음향은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근사하게, 화려한 색으로 장식하면서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아르노 강 위를 떠다니는 곡은 희망차고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다가 끝을 맺는다.
“…….”
마지막 음의 떨림이 끝나고, 손을 떼었다.
내가 본선에 준비한 모든 곡이 마무리되었다.
전 유럽의 예술을 끌어와 러시아만의 예술로 승화시킨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난 그간 접하고 익힌 모든 예술을 끌어모아 선보였다.
제대로 한 걸까.
별안간 벼락처럼, 엄청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마구 뒤섞여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지만, 그 열화와 같은 성원은 그대로 느껴졌다.
난 이 무대만큼은 정말, 그 누구도 속이지 않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음악을 제대로 보였음을 느꼈고 그 반응은 뜨거웠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린다. 꽤 난곡이라 할 수 있는 곡들을 세 곡이나 연달아 연주했더니 몸 이전에 정신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치는 만큼, 내 전부를 쏟아 냈다고 할 수 있었다.
끝날 줄 모르고 계속 박수가 이어진다. 깊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더불어, 고개를 들고, 내가 무대 위에서 다시 이렇게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허락해 준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상당히 멋대로 구는 연주자였지만, 그래도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감히 이런 박수를 받을 순 없었을 것이다.
내게 기회를 준 누군가와, 내게 목소리를 빌려 준 그녀.
그리고 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죽은 쇼팽과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죽은 라흐마니노프.
특히 이 두 음악가가 작곡한 곡 전반에 깔려 있는 우수와 그리움의 애상은 평생토록 나로 하여금 그들의 곡을 연구하게 만들 것이다.
“…….”
난 너무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
이건 조금 좋지 않은데.
대기실로 돌아오니 시선들이 날아와 박힌다.
그건 상당한 죄책감을 가져왔다.
난 피아노에 있어선 그 누구에게나 평등했고, 늘 당당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난 열일곱 살이 넘어서 진정한 무체급의 세계로 간다면 모를까, 지금 우쭐해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완전히 흡족한 음악을 구사한 것도 아니었고.
“…….”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가 날 무슨 괴물 보듯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들이 차라리 보다 공격적인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저편에 있는 남자 참가자에게선 거의 전의를 상실한 참담함마저 느껴진다.
이 전쟁터 같은 세계에 체급이 어디 있고 나이가 어디 있으며 성별이 어디 있냐는 건 그저 내 각오일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나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당당하게 자기 실력이나 보이라고 무작정 강요할 수는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나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 □□.”
단 한 명.
번호도 이름도 잘 모르겠는 남자아이가 박수를 짝짝 쳤다.
“□□□□ □ □□.”
빠른 중국어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일단 대답했다.
“감사해요.”
“□□□□□ □□□□ □□□…… □□ □□□.”
“…….”
뭐라는 거야?
스마트폰을 꺼내야 할까?
내가 아는 만국공용어라곤 음악밖에 없었으므로, 피아노가 없는 대기실에서 이 아이와 소통을 하려면 구글 선생님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 □□ □□□ □□.”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빠르게 툭 내던지더니 날 스치고 지나가선 그대로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호명하지도 않았는데 무대로 올라갔다.
“……?”
황당해서 얼어 있다가, 무대를 비추는 모니터를 봤다.
난 어이가 없었지만 사회자는 당황한 듯했다.
갑자기 무대 앞에 선 참가자는 꼿꼿하게 서더니, 사회자를 향해 불만스럽게 눈짓했다.
소개하지 않고 뭐 하냔 듯한 눈빛이었다.
“……그, 33번. 후안 시우란. 준비되셨나요?”
“□□□□.”
그리곤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의자가 낮은지 투덜거리며 높이를 올린다.
“후…… 아하하하.”
난 그 모습을 보다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아주 좋았다. 역시 저 정도 패기는 있어야 음악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난 진심으로 바란다. 이 어린 천재들이 나를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길.
좌중을 둘러보니 아까와 같이 얼어 있는 분위기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온 시우란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 있게 무대에 오른 것이 대기실에 막연하게 맴돌던 체념감을 많이 해소시켜 준 것 같았다.
난 아이들과 함께 모여 모니터를 보면서 시우란의 연주를 기대했다. 첫 곡은 에튀드나 왈츠, 마주르카 중 한 곡이었다.
그렇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난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딱히 잠겨 있진 않았지만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되어 있기에 아무나 들어올 순 없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용무가 있는 사람이겠지 싶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계신가요?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
그 용무가 나일 줄은 몰랐는데.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자 한 여성이 내 쪽을 보곤, 환히 웃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무슨 일이시죠?”
난 이제 막 시작될 시우란의 무대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흥이 깨져서 살짝 짜증이 올라온 상태였다. 이제 몇 초 후면 시작될 텐데.
“3초 내로 말씀해 주세요.”
“……예?”
“아…… 죄송합니다.”
어른 여성에게 이렇게 험악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갔다.
빠르게 사과하자 그녀는 생글거리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순간 섬뜩했으나 무서운 물건은 아니었다. 명함이었다.
그녀는 그 명함을 든 채로 다가오면서, 내가 3초 내로 말해 달라고 한 것을 허투루 듣지 않았는지 빠르게 말했다.
“방금 굉장한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전 클래식 레이블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과장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일단 명함 받으…….”
“당신 뭡니까, 지금?”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대기실에 상주하고 있던 직원이 움직였다. 나랑 관련된 사람인 줄 알고 지켜보다가, 그게 아니니 개입한 것이다.
인상을 팍 쓰며 낮게 윽박지른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아직 콩쿠르가 진행 중입니다. 대기실에 누가 출입해도 된다고 했습니까?”
“잠깐, 그 잠깐만요.”
“안 됩니다. 나가세요.”
“얼마 안 걸려요!”
“더 이상 1초도 안 됩니다. 나가요. 할 말은 공식적으로 콩쿠르 끝난 뒤에 하세요.”
“그 하이에나들을 비집고 어떻게요! 전 지금이 아니면 안…….”
“나가라고요!”
“조용히 해 주세요.”
내가 말하자 시끄럽게 싸우던 두 여성이 조용해졌다.
그리곤 물끄러미 내 쪽을 본다. 난 사과하지 않고 모니터를 가리켰다.
“연주가 시작됐어요.”
“…….”
시우란이 준비한 첫 곡은 쇼팽의 에튀드 op.10의 1번이었다.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말끔하게 연주하기 위해선 엄청난 오른손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이다.
유려하게 펼쳐지는 아르페지오가 예사롭지 않다.
난 입을 다물고 모니터에만 집중했고, 레코드사에서 나온 사람과 대기실을 지키는 직원 역시 조용히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그 둘 역시 클래식계에 종사 중인 사람들인 것이다.
시끄러웠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대기실은 조용히 감상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