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중국에서 온 후안 시우란은 쇼팽 에튀드 op.10의 1번에 이어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8번, 베토벤 소나타 23번을 연주했다.
어려서부터 꽤 기초를 잘 다졌는지 굉장한 기교를 지니고 있었고, 스스로의 장점을 잘 알고 멋지게 이용할 줄 알았다.
또한 베토벤 소나타에서 보여 주는 음악성도 훌륭했다.
또 한 명의 천재를 지지하는 박수를 받으며 시우란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
가만히 보고 있자 그가 대뜸 말했다.
“□□□ □ □ □□□.”
“…….”
세상엔 참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쪽 세계에선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할 말을 꿋꿋하게 하는 것은 특이한 축에도 못 낀다.
나도 질 수 없지.
“연주 정말 잘 들었어요. 쇼팽 에튀드는 저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 □□ □□□ □□□□.”
“같은 시대에 당신 같은 천재가 많다는 게 기쁘네요.”
“□□□ □□□ □ □ □□□□□.”
“오늘 결과에 관계없이, 빠르면 2년 후에,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 □□□□□ □□.”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역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테니 무승부였다.
시우란은 날 잠시 바라보며 씩 웃더니 대기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쿨한 태도였다.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높은 곳에서.
그렇게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중국어도 할 줄 아시는건가요?”
“아뇨?”
“그럼 방금 대화는……?”
“연주자 사이에 대화가 중요한가요?”
“……?”
에우테르페 레코즈라는 음반사에서 나온 베로니카는 약간 실례스러운 눈빛을 했다. 얘도 살짝 상태가 이상한데? 라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 그녀는 돌연 싹 표정을 바꿨다.
난 무대에서 연주자에게 중요한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잠시 이야기 좀 가능할까요? 이제 인터미션인 것 같은데.”
“아.”
두 명의 차례가 끝났고 이제 쉬는 시간이긴 했다.
내가 눈을 돌리자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바라보는 눈초리가 영 탐탁잖다.
“보호자도 없는 연주자에게 접촉하지 마시죠. 어디서 나오셨다고 하셨죠?”
“에우테르페 레코즈입니다. 이상한 곳 아니고요. 마이너 레이블일 뿐이에요. 아니, 저도 에이전트와 이야기하고 싶죠. 하지만 아무 소속도 없으니 본인과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보호자와…….”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은 분위기여서 난 살짝 끼어들었다.
“이야기를 조금 들어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직원이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난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보호자분을 불러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괜찮아요. 오늘 무언가 결정할 것도 아니고요.”
아버지나 루슬란 오빠 없이 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상당히 흥미로웠다.
베로니카는 문 쪽으로 손짓했다.
“대기실의 다른 분들께 방해가 될 테니 잠시 나갈까요?”
“예.”
먼저 나가는 베로니카를 따라 나가는 내내 직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혹 성사될 수 있는 계약이 불발이 되면 그걸 책임질 수도 없으니 적당히 하는 것 같다.
내가 열다섯쯤 되니까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나와 베로니카는 로비에서 조금 벗어나 사람이 별로 없는 쉼터를 찾아내었고,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마실 것이라도?”
“아뇨. 괜찮아요.”
“그런가요? 음…….”
난 가볍게 거절하며 베로니카를 주의 깊게 살폈다.
170cm 정도의 큰 키에 안경을 쓴 베로니카는 꽤나 눈에 띄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쁜 사람인 것 같아 보이진 않았고, 정말 젊어 보이는데 과장이라면 능력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쨌든 빠르게 대화를 진행해야 할 것 같아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소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
베로니카는 내가 보호자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약간 당황한 듯했다.
내가 이렇게 정말 일대일로 상대해 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곧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저희 데이터베이스를 조금 찾아봤죠. 계약한 에이전시는 있는지, 아니면 매니지먼트는 있는지. 음반은 냈는지 디스코그래피까지.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깨끗하게. 인터넷에도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콩쿠르조차 이번이 첫 출전이시라고요?”
그녀가 속한 음반사의 데이터베이스가 얼마나 좋은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못 찾는 것이 당연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맞아요.”
“분명히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 커리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어요.”
베로니카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학교는 어디에 다니시죠?”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에 다녀요.”
“맙소사, 선생님이 가만두시던가요?”
“가만두지 않았죠. 그래서 참가한 것이에요.”
베로니카는 도저히 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보였지만 난 그녀에게 내 역사를 깊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기록도 경력도 없는 제게 명함을 주시려는 게 사실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매니지먼트나 에이전시도 아니고 스폰서도 아니다. 베로니카는 음반사에서 나온 사람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같은 거대 메이저 레이블이 아닌 영세한 마이너 레이블이라서 빠르게 한발 앞서 연주자와 계약을 원하다 하더라도, 이건 약간 비상식적이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맞아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기록도 경력도 없지만 오늘 연주를 보자마자 감이 왔거든요.”
단순하게 그녀가 이야기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
이거 순 사기꾼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 아닌가 싶은데, 베로니카는 상당히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디스코그래피는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열다섯에 음반은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죠. 하지만 반대로, 이미 원숙한 경지의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디스코그래피를 쌓아 나가는 게 좋아요.”
“…….”
당황스럽다. 베로니카는 날 일찍 잡아 두려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바로 음반을 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본선에서 객관적으로 괜찮은 실력을 보였다 하더라도, 난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콩쿠르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처럼 대형 콩쿠르가 아니라 2년에 한 번 열리는 청소년 콩쿠르에 불과했다.
대체 지금 내 이름으로 음반을 내 봐야 누가 산단 말인가? 음반사는 연주자의 음반을 내 주는 자선사업을 하는 사업체가 아니었다.
실제로 난 스물한 살까지 데뷔 음반 한 장 내 보지 못한 연주자를 안다.
그는 훌륭한 교수에게 사사했고 큰 국제 콩쿠르 입상 경력도 많았으며 협연 경력도 있고 작은 개인 연주회도 몇 번 열었지만, 결국 음반을 내진 못했다.
그 정도 커리어를 가진 피아니스트는 널리고 널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음반을 낼 실력이 되는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가능해요. 제가 장담하죠.”
대체 이 사람은 내 뭘 보고 이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저희 회사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최신식 음향시설을 전부 갖추고 있고 사장님이 직접 레코딩 엔지니어로 오랜 경험을 가지신 분이라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계속해서 말하는 베로니카의 말을 끊고, 날을 세우며 말했다.
“그 말씀인즉슨, 제가 팔릴 것 같다는 건가요?”
“……예?”
베로니카는 멍하니 되물었다. 막 열이 오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리가 맺힐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는다.
이게 상당히 나쁜 태도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지금 나야?
“그렇지 않나요? 지금 제가 콩쿠르에서 제대로 수상을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대기실로 오셔선 커리어도 아무것도 없는 제게…… 대체 뭘 보신 건지 약간 의아해요.”
“당연히 연주를…….”
“못 믿겠어요.”
날카롭게 잘라 말하자 베로니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 연주 실력? 물론 열다섯 살치고는 좋은 편이지. 하지만 난 음반사가 오롯이 내 실력만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간 착잡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자 베로니카는 날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정말 미안한데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혹시 저희 회사가 음반 내용보단 앨범 재킷 사진에 집중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그 노골적인 질문에 난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다물자 그녀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보다 진지하게 날 설득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냅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자존심! 진지함! 아주, 아주 대견하네요! 정말 훌륭해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끅끅거리는 웃음이 아직도 맺혀 있다.
“걱정 마세요. 아, 이 부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만약 함께하게 된다면 첫 음반은 이름도, 사진도 없이 만들어질 겁니다.”
“예?”
무슨 소리야, 이게?
“물론 이 콩쿠르에서 우승하시게 되면 단번에 유명세를 타시게 될 테고, 저 역시 그걸 바랍니다만, 이 청소년 콩쿠르 우승자라는 커리어를 내세운다고 해서 판매량이 높을까요? 아뇨, 전혀.”
베로니카 역시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냥 피아노를 만지는 법밖에 모르는 나 같은 연주자와 달리 이 클래식 업계를 실질적으로 꾸려 나가는 측에 속한 사람이었으니 나보다 훨씬 더 잘 알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열다섯 살짜리가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열광하고 음반을 사 줄까? 꿈 깨라.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내게 접촉한 것은…….
“그러니…….”
“그러니 다른 부분으로 마케팅을 하리라 생각하시겠죠?”
약간 소름이 끼쳤지만, 정답이었다. 내가 우울해하는 부분은 그런 부분이었다.
베로니카는 킥 하고 웃었다. 그녀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저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완전 거꾸로요. 그래서 당신이 우승하시든 못 하시든 간에 연주자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오로지 피아노 소리만을 판매할 겁니다.”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하니 있자 그녀가 다시 손가락을 치켜들며 못 박았다.
“당신의 피아노 소리만.”
그건 너무 이상적인 헛소리로만 들렸다.
난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팔아요?”
“그건 저희 회사가 고민할 일이죠. 안 그런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음반사가 음반을 파는 마케팅 방법에 대해 우울해하다가, 순식간에 이젠 내가 거꾸로 걱정을 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난 현실에 우울해하긴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정말 내 피아노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베로니카가 즐겁게 말했다.
“후후후, 물론 귀는 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대형 메이저 레이블은 아니어도 마이너 레이블에선 이 콩쿠르에 꽤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겁니다. 저처럼 확신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요.”
주위를 휘둘러본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장담하건대 몇 시간 후면 에이전시에서도 접촉을 해 올 것이고…… 상당히 복잡해질 거예요. 당신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는 꽤 규모가 있는 콩쿠르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엔 날 예쁘게 잘 포장해서 세상에 상품으로 내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비위가 상하면 그건 바보다.
난 연주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여 실력으로 혹평당하지 않도록 좋은 연주를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된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전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 잠깐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당신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에 대해선 약간 알 수 있겠어요. 이 세상에 부대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느껴질 때도 있겠죠.”
그것은 마치 예언처럼 들렸다.
어린 나이에 과장이라는 자리에 오른 데다가, 직접 청소년 콩쿠르에 발품을 팔며 연주자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지니는 통찰력은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생긋 웃으며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그때 한 번쯤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난 조심스레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내게 명함을 전달한 베로니카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우승하실 거예요.”
그러곤 먼저 떠나 버렸다.
대기실로 와서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매달리던 것과 굉장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확신을 얻은 듯한 자신 있는 발걸음이다.
혼자 남겨진 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본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아직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