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마트베이 심사위원은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옅게 미소를 머금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트베이 심사위원의 심사를 부당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순간 마트베이 심사위원은 두말 않고 스스로 말한 그대로 이행할 것이다.
이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그렇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수습할 생각이었다.
난 그를 잘 모르지만 분명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한 난 인터네셔널 피아노라는 곳에서 나온 기자에게 대답했다.
“저는 마트베이 심사위원의 모든 심사를 존중해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가 지금 우승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만약 예선에서 탈락했다 하더라도 전 그 심사에 아무런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기자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물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대범하신가요?”
뭘 묻는지 모르겠다.
“아뇨, 엄청 소심한데요…….”
“하하하하!”
느닷없이 옆에 있던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이 그리도 우스웠나.
껄껄 웃던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우승자께선 다 납득하신 것 같지만,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설명해 드리죠.”
이번 기회에 더 확실하게 말을 해 놓으려는 것 같았다. 수첩에 펜을 놀리는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은데, 마트베이 심사위원은 전혀 위축되는 모습 없이 여유롭게 말했다.
“타티아나 우승자가 예선전 1라운드에서 연주한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 그 곡에 대해선 심사위원들 간에서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해석이 굉장히 특이했기 때문이었죠. 그건 아주 특이하고도…… 도전적인 해석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수 십 년간 연주하면서 영웅 폴로네이즈를 수천 번도 넘게 들어 봤지만, 그런 해석은 처음이었습니다. 때문에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마트베이 심사위원은 내 쪽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생기긴 했다.
잠시 텀을 주고 한껏 시선을 모은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말했다.
“앙팡 테리블.”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온다. 난 저 단어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한 기자가 말했다.
“무서운 아이라는 뜻 아닙니까?”
“맞습니다. 1904년에 열세 살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에게 붙었던 별명이죠. 그는 당시 받아들여지기 힘든 화성과 주법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교수들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았습니다.”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일순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입으로만 웃을 뿐, 여전히 기자들의 눈빛은 날카롭고 움직이는 손은 바빴다.
당시 평가가 많이 엇갈렸던 천재 작곡가 프로코피에프와 그의 별명이었던 앙팡 테리블. 이것에 기자들의 신경이 쏠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갑자기 위가 쓰라린 느낌이 든다.
물론,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무작정 날 논란의 소용돌이로 집어넣고 내버려 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본선도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아시다시피, 타티아나 우승자는 불가해하고 파격적인 음악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다채롭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성숙하고 깊은 소리를 지니고 있죠.”
그리곤 내 쪽을 향해 사과해 온다.
“제가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순간적인 기습에 목이 굳는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셔터가 몇 번이나 터진다. 마트베이 심사위원이 다시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타티아나 우승자는 단순히 이해하기 힘든 앙팡 테리블이 아닙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프로코피에프처럼, 앞으로 러시아를 대표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앙팡 테리블, 무서운 신예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연달아 터지는 셔터 소리와 질문 소리에 귀가 아프다.
앞을 보니 심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인터네셔널 피아노의 기자는 흡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수첩에 적어 넣고 있었다.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내 대답보다 훨씬, 마트베이 심사위원의 대응이 기삿거리에 적합한 모양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이젠 일이 더 커지지 않고 적당히 수습될 것 같긴 하지만…….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괜히 프로코피에프같이 위대한 작곡가까지 함께 언급될까 이젠 그것이 겁이 난다.
혹여나 그런 기사가 난다면 프로코피에프에게 죄송해서 잠도 못 잘지도 모른다.
마트베이 심사위원은 그것까지 고려해서 그 명성을 끌어옴으로써 나를 더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하나도 안 고마웠다.
난 누군가가 추켜세워 준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 부담스러운 것은 싫다. 이미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기자들은 각자 내일 신문에 쓸 기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내 손을 떠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난 제발 자극적인 기사가 나지 않기를 기도해야 했다.
***
기자들을 상대하고, 짧게 인터뷰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5층의 제일 큰 홀을 빌려서 축하연을 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제안은 제안일 뿐 내가 정말 피곤하다면 모두 취소하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내가 어떻게 피곤하다고 하겠는가?
“괜찮아요, 아버지.”
조금 지치긴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난 잠시 시간을 내어 연주용 드레스를 벗고 이브닝드레스로 환복했다. 보다 화려하고 긴 드레스였다.
더불어 아나스타샤도 일반 사복이 아닌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화장을 고치고, 5층의 홀로 향하자 이미 파티 세팅은 한참 전에 되어 있었다.
초대한 사람들이 연이어 입장하고, 파티가 시작되었다.
“하하하, 정말 축하드립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따님이 정말 자랑스러우시겠군요.”
“고맙소.”
파티의 규모는 내 상상보다 꽤 컸다.
날 응원해 주시던 분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침 있던 아버지의 동료분들, 거기에 오늘 콩쿠르 참가자들과 그 가족들, 심사위원들과 기자들까지 그 모두를 초대했다.
물론 초대받은 모두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주어서 현재 모인 사람들은 얼핏 마흔 명이 넘어 보였다.
내게 다시 한 번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 친목을 다지고 싶은 사람들 등등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해 왔고 난 성실하게 한 명 한 명을 대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또래가 아닌, 이렇게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어색했지만 잘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위치라는 건, 가끔은 조금 놀랄 정도이기도 했다.
“교수님이시군요?”
“그래요. 타티아나는 중앙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했죠?”
“예.”
“전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지도 교수입니다. 받으세요.”
명함을 받아 들자 차이코프스키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피아노과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상당히 풍채가 좋은 중년인 이분은 심사위원 일곱 명 중 한 분이셨는데, 알고 보니 모스크바 음악원의 현직 교수님이셨던 것이다.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날 보며 아르카디 교수님이 허허 웃었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심사위원 중 현직 교수만 네 명인데요.”
“그렇지만요…….”
보통 콩쿠르 심사위원 자리는 저명한 피아니스트나 교수님에게 부탁하는 편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성인 대상으로 하는 콩쿠르가 아닌 청소년 콩쿠르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이 오실 줄은 미처 몰랐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청소년 콩쿠르이니 더더욱 신경 써서 봐야죠. 그러면, 오늘처럼 놀랄 일이 가끔 있거든요.”
“놀랄 일이요?”
“그래요, 타티아나.”
아르카디 교수님이 양팔을 펼쳐 보이며 호탕하게 말했다.
“놀라고말고요! 전 살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봐 왔지만, 오늘 콩쿠르에서만큼 놀란 적은 없었던 것 같군요. 그만큼 타티아나의 실력은 훌륭했어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쇼팽 세 곡 모두 아주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해석이 담겨 있었고 훌륭했어요. 폴로네이즈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전 우리의 앙팡 테리블에게 5점을 주었답니다. 알고 계셨나요?”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하, 마트베이가 땅을 치고 후회하더군요.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 사람도.”
아르카디 교수님은 내가 콩쿠르에서 연주한 다섯 곡에 모두 5점을 주었다고 말씀하시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나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이 날 그렇게나 좋게 봐 주신다는 데에야 조금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나이를 감안하시긴 하셨겠지만, 어쨌든 이분에게서 좋은 평을 얻어 낸 것은 앞으로를 생각하더라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특히 말이죠…… 손을 보여 주시겠어요?”
“아…… 손이요?”
“예.”
난 아무에게나 손을 맡기는 것을 조금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래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이라면 신용도는 충분했다.
손을 내밀자 교수님이 내 손을 잡고 돌려 보며 말했다.
“크기가…… 8도쯤 되나요?”
“9도에 닿아요.”
“상당히 유연하군요? 우리 학생들에게 이 손을 보여 주고 싶네요.”
내 손은 9도. 도에서 한 옥타브를 넘어 다음 레까지 닿는다. 아주 편안하게 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젠 익숙했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자신의 손과 내 손을 대 보았다. 남자인 교수님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손이었다.
아르카디 교수님이 웃으며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그건 우리 학생들도, 특히 여학생들은 굉장히 어려워하는 곡이죠. 아시나요?”
“……그런가요?”
“흔히 피지컬적인 부분에 모든 문제를 돌리곤 하지만…… 열다섯의 타티아나가 이 손으로 소나타 2번을 연주하는 것을 보면 그런 말들은 아무도 하지 못하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 알리샤 데 라로차 같은 분들도 손은 작았다고 하니까요.”
“그래요! 바로 그거죠!”
에스파냐의 여류 피아니스트 알리샤 데 라로차는 8도에 닿는 손을 지녔지만 그래미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을 정도로 엄청난 기량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다.
타계한 지 오래라 실황을 들어 볼 순 없지만, 난 그녀의 음반들을 꽤 자주 듣곤 했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알리샤 데 라로차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정말 감탄한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손을 놓아주었다.
“정말, 정말 마음에 드네요, 타티아나. 피아니즘도 음악가정신도.”
“감사합니다…….”
너무 극찬하시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밉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내가 얌전히 감사를 표하자 아르카디 교수님이 불쑥 물었다.
“타티아나, 중앙음악학교에서 누구를 사사하고 있죠?”
“제 지도 선생님은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 선생님이에요.”
“미하일? 아, 방금 뵈었는데, 그분이었군?”
“그리고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선생님에게도 도움을 받았어요.”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타티아나는 정말 운이 좋군요!”
저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신 분인 것 같았다.
그저 바흐의 스페셜리스트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위상은 상상 이상인 듯하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과연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시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운이 좋아요, 타티아나. 운이 좋아요.”
“……?”
“지금 이 상황은 과연 누가 운이 좋은 걸까요? 운 좋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의 심사를 맡게 되어 타티아나를 만나게 된 저? 아니면 제 눈에 띄게 된 타티아나? 실력이 있어도 눈에 못 띄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무슨 말씀이신지…….”
“타티아나.”
갑자기 아르카디 교수님이 눈빛을 달리하며 물어 온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올 생각 없어요?”
“……!”
난 기절할 듯 놀랐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정말 진지하게 내게 입학을 제안하고 있었다.
“본교에 아무 시험 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드리죠. 제가,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가 직접 타티아나의 지도 교수가 되어 주겠어요.”
“아…….”
아무 말도 못 잇자 아르카디 교수님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대체 당신 같은 재원이 왜 아직까지 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깝죠, 너무 아까워요. 왜 거기에 있어요? 보다 넓은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하지 않겠어요?”
난 반년 만에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성악을 배우기 전 난 내 몸의 잠재력을 굉장히 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중앙음악학교에 가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젠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이 당장 오지 않고 뭘 하냐고 안달을 내고 있었다.
“타티아나?”
난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갑작스러울 게 어디 있어요? 이미 중앙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잖아요? 지금 8학년이겠군요. 3년 후 졸업하면 음악원에 진학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게 조금 빨라지는 것뿐인데 문제가 있나요?”
“…….”
문제는 없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하는 것은 분명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저편에서 와인을 들고 계시는 미하일 선생님을 찾아내었다.
“…….”
물론 언제까지고 중앙음악학교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나는 또 다른 선생님을 찾아야 했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알면서도 되도록…… 자연스러운 시점이 올 때까지 미루고 싶다.
당장이라도 날 데려가고 싶어 하는, 동경하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정말 멍청한 고민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난 아직…….
“타티아나!”
“……?”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덥석 달라붙어 왔다.
“이따가 갈라콘서트 비슷하게 무대도 잠깐 만들 생각인데 나랑 듀엣 안 할래? 응? 아니, 해야 해!”
“예?”
“할 거지?”
“하, 할게요.”
갈라콘서트? 생각도 안 했는데.
기세에 눌려서 대답을 하니 그제서야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놓아주었다.
“친구분?”
“예. 아, 죄송합니다. 타티아나와 이야기 중이셨나 보네요.”
아르카디 교수님이 묻자 아나스타샤가 급히 사과했다.
그 태도에 아르카디 교수님은 피식 웃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뇨, 뭐……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타티아나, 그렇죠?”
“……예.”
“언제라도 좋으니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르카디 교수님은 나와 아나스타샤를 더 방해하고 싶진 않은지 그리고 저편으로 걸어갔다.
조금 머리가 아파서 어딘가에 앉아 쉬고 싶었는데,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내 팔을 다시 붙잡았다.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갈 거야……?”
“……예?”
멍하니 되물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아나스타샤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뭘 묻는진 분명했다. 그녀의 눈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전해져 온다.
그녀는 날 막지도, 안 막지도 못하고 헤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다가, 이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친구인 에르네스트도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구석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음악학교를 떠올렸다. 발렌티나와 리처드, 한승우, 그리고 어린 후배들, 파티에서 만난 선배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
“…….”
난 아직 정리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이제 반년밖에 안 되었는데, 싫었다.
“안 가요. 아나스타샤.”
“응?”
“안 가요.”
보다 나은 공부를 위해 떠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겨우 반년이지만, 벌써 내겐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겨 버렸다.
난 아무것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왜 안 가? 음악원이잖아. 가야지, 타티아나…… 넌 원래 더 일찍 갔어야 했어. 여기에 있을…….”
“안 갈래요, 아나스타샤. 제 마음이잖아요?”
괜히 칭얼거리면서, 아나스타샤를 붙잡았다.
그녀가 날 더 놓지 못하도록.
날 내버려 둘 수 없도록.
“애처럼 왜 이래…… 정말…….”
“애를 받아 주진 않겠죠. 그렇죠?”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