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올해 열다섯 살의 소녀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말씨가 조곤조곤했다.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라 긴장된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적이 사랑스럽다.
수백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몸무게의 열 배도 넘는 그랜드피아노를 완벽하게 지배하던 화려한 모습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의 무대는 결코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 피아노부문 1등, 상트페테르부르크 평론가 협회상, 세계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유럽협회 우수 신인상,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상.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한 손에 거머쥐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앙팡 테리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와의 인터뷰 시간을 어렵사리 가질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레스 예쁘네요, 무대에서 입었던 것이죠?
-앗, 예……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아무튼,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우승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 콩쿠르라고 하셨죠?
-예. 처음이에요.
-처음 콩쿠르에 출전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나요?
-도와주신 분들이 많아서…… 괜찮았어요.
-콩쿠르의 모든 무대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죠. 인터넷에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어요. 알고 계신가요?
-몰랐어요.
-SNS 계정도 없으신 것 같은데, 전혀 안 하시나요?
-예. 하지 않아요.
-요즘엔 안 하는 분을 찾아보기가 더 힘든데 말이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도 딱히 없어요. 단지…… 안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할 이유가 없어서인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평상시에 여가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학교 갔다가…… 연습하고…….
-학교 가는 걸 여가라고 하진 않죠. 취미로 하고 계신 것은 없나요?
-죄송합니다. 취미……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전 취미도 피아노로 해결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성은 누구나 들으면 다 알 만한, 그런 성이잖아요? 그렇죠? 때문에 수십 개나 되는 취미를 즐기면서 화려한 삶을 살고 계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아닌가요?
-아하하…… 취미가 하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어요.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최근 관심사는 없나요? 피아노 말고요.
-관심사라면…… 요리를 배워 볼까 해요.
-요리요?
-예. 레시피를 따라서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맛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 음악과 상당부분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요리도 하나의 예술일까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미각이라는 감각을 상대로 하는.
-굉장히 재미있는 답변인데요, 본 인터뷰는 요리 잡지에 실릴 인터뷰가 아니므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스스로를 음악가라고 생각하시죠?
-예. 그래야만 하고요.
-그래야만 한다…… 준엄하시네요.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나요? 만약 단 한 음악가의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다면?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요.
-주저하지 않네요.
-주저할 이유가 없어요.
-최후의 낭만주의자…… 본선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을 연주하셨죠?
-예, 맞아요.
-선곡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타이기도 하고……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무대에서 꼭 하나쯤 연주하고 싶었어요.
-거기에 쇼팽의 에튀드와 바르카롤…… 청소년 콩쿠르에선 잘 안 나오는, 굉장히 어려운 곡들을 선곡하셨는데,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음……. 중앙음악학교 8학년에 편입하셨다고 하는데?
-예. 작년에 편입했어요.
-그전엔 일반 쉬꼴라에 다니셨나요?
-예.
-이 특이한 학업 과정과, 부정할 수 없는 굉장한 실력 때문에 모두들 궁금해하는 부분이 많은데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 특이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절 중앙음악학교에 데려가 주신 미하일 표도로비치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에요.
-현재 사사 중인 선생님이신가요?
-맞아요.
-아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스스로 재능이 충만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진 않아요……. 그저 제게 허락된 만큼, 최선을 다할 뿐이죠.
-연습은 하루에 얼마나 하시나요?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2시간 정도…… 학교에서 3시간 정도 하면 귀가 후에 또 3시간쯤 하는 것 같아요. 더 할 때도 있고요.
-아침에 2시간이요? 상당히 일찍 일어나셔야겠군요?
-예. 다행히 아침잠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요.
-상당히 긴 시간을 피아노와 보내시는 것 같은데, 콩쿠르를 앞두고 있을 때가 아니라 평소 스케줄이 그러시다는 거죠?
-되레 콩쿠르를 앞두곤 연습을 별로 안 했던 것 같아요……. 아, 죄송합니다.
-평소 연습했던 것들이 쌓여 있기 때문에 우승을 하실 수 있었던 거겠죠. 무대로 증명하는 것이 연주자 아니겠어요?
-감사합니다.
-무대에서 보여 주셨던 곡들에 대해서…… 평소 악곡의 해석은 어떻게 하시는지?
-음…… 일단 테크닉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생각을 많이 해요. 이 부분은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썼을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음표 하나하나에 축약되어 있는 의미가 너무 깊어서 상당히 고민을 오래 하는 편이에요. 연습도 혼자 앉아서 음색을 살필 때가 많아요.
-하하, 테크닉적인 부분은 너무 당연한 부분이라서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는군요?
-아니에요. 굉장히 신경 써요. 연주자라면 비르투오시티 역시 반드시 중요시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커다란 피아노를 마음대로 다루려면 우선 테크닉이 기반되어야 비로소 연주자가 자유로워 질 수 있으니깐요.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난 뒤엔 사색을 깊게 하시는 편이로군요?
-예, 맞아요.
-그렇군요. 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연구는 꽤 성공적으로 보여요. 심사위원들로부터 앙팡 테리블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요. 프로코피에프가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불렸던 별명이기도 하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그렇게 불러 주시는 건 상관없지만…… 저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음악가인 프로코피예프를 떠올리시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요. 그분은 제 나이 때 원숙한 소나타를 쓰셨던 분이에요. 피아니스트로서도 월등히 뛰어나셨고요.
-하지만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그 찬사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해도 훌륭하실 것 같아요.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음량으로 말이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 음량에 대해서도 칭찬이 많다는 것 아시나요?
-잘 모르고 있었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열다섯밖에 안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성인 피아니스트와 맞먹는 음량을 내시잖아요? 이 가는 팔로 말이죠. 많은 피아니스트가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인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힘과 속도의 분배는 감각적인 부분이지만……. 아무리 세게 눌러도 건반의 깊이는 1센티미터 남짓이라는 것을 안다면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오호.
-음색만큼이나 음량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분처럼 강렬하면서도 명징한 연주를 하고 싶어요.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제야 그 폭발적인 연주가 이해가는군요. 거기에 모든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한 감수성과 호소력까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앞으로도 멋진 연주자가 되실 것이라 기대를 해도 될까요?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하하, 분명 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중요한 첫 콩쿠르에서 1등을 하셨습니다. 향후 계획은?
-우선 학교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전 아직 갈 길이 멀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요.
-콩쿠르나 연주 활동에 집중하시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군요?
-조금 더 준비가 되면, 그때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콩쿠르 결과에 만족하지만 거기에 너무 도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 어린 연주자의 성장을 더욱 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으으으으…….”
바로 다음 날이 되자마자 올라온 인터뷰를 보고, 난 소파에 머리를 박고 신음성을 냈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타티아나! 얼마나 좋은 인터뷰야? 안 그래?”
“제발 그만해 주세요, 아나스타샤…….”
부끄러워 죽어 버릴 것 같다.
대충 무엇을 물어볼 것이라는 질문지를 주고 딱 10분 만에 모든 생각을 정리해서 인터뷰에 응하라니…… 이건 너무 심한 처사였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거의 대부분 질문을 즉흥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이 인터뷰다.
이것 말고도 앞으로도 인터뷰와 여러 일정이 잡혀 있는데…… 그냥 싹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다.
“텔레비전 틀어 볼까? 뉴스에 분명 네 얼굴이…….”
“아나스타샤!”
리모콘을 막 들어 올리려는 아나스타샤에게 달려들었다. 힘으로는 상대도 안 되지만 나에겐 그녀에게 없는 절박함이라는 것이 있었다.
가까스로 리모콘을 빼앗아 멀찍이 떨어지자 아나스타샤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어 댔다.
“알았어, 알았어, 타티아나.”
“제발 그만해요.”
“그런데 타티아나, 애초에 이건 놀리는 게 아니라니까? 콩쿠르 우승자를 무슨 수로 놀려?”
“…….”
“하지만 네가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 하잖아?”
“뭐, 뭘 해요?”
“이번 달에 나올 모든 클래식 관련 잡지 사서 스크랩 하는 거.”
“절대 하지 마세요!”
빽 소리를 지르자 아나스타샤가 알았다며 살살 날 달랬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전혀 그만둘 태세가 아니다.
기절할 것 같다.
유난히 장난스러워진 아나스타샤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너 오늘도 일정 있었지?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기 전까지.”
“예…… 인터뷰 더 있고…….”
“음반사에서도 연락 왔었다며?”
“그랬죠.”
본선이 끝나기도 전에 대기실로 쳐들어왔던 에우테르페 레코즈 말고도 또 다른 음반사에서 두 곳이나 연락을 해 왔다.
난 적잖게 놀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가 규모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2년에 한 번 열리는 청소년 콩쿠르에 불과했다.
이러한 청소년 콩쿠르 우승자일 뿐인 내 데뷔 음반을 내겠다는 곳이 총 세 곳이나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베로니카 과장과 이야기하면서 생각했던 부분들, 난 아직도 그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난 그저 조금 잘난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음반사는 결코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팔지 못 할 음반을 낼 리 없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돈은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팔아 치울 것이다.
잠시 그런 역학 등을 생각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래서, 음반은 어디서 낼 거야?”
“…….”
아나스타샤는 내가 당연히 음반을 낼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할 정도로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냥 시간예술이라면 흘러가 버리니 상관없었다.
인터넷에 중계된 영상은 남겠지만 내가 남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 좋지도 않은 음질일 테니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내가 집중해서, 내 의지로 남기게 되어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음반이라면 보다 완성도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데 음반 같은 걸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막말로, 내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이유로, 지금은 하기 싫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자기 음반을 내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할 테니 아나스타샤는 또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빅토르였다.
“예, 빅토르.”
- 죄송합니다 아가씨, 허가를 여쭈어야 할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인가요?”
빅토르는 정말 죄송하다는 듯 조용하고 빠르게 말했다.
- 음반사에서 다시 연락을 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아가씨를 찾아뵙고 싶다는데,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내 전화번호가 아무에게나 드러나지 않도록 사적인 일이 아닌 대부분의 바깥에서의 연락은 빅토르를 거치고 있었다.
덕분에 쓸데없는 것들은 빅토르의 선에서 처리되고, 그는 내게 나중에 보고를 하기도 하지만 음반사의 이야기처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곧장 내게 연락을 해 오기도 한다.
잠시 생각했다. 난 어차피 바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거절하더라도 만나서 거절하는 것이 옳은 일 같았다.
“만나 볼게요.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 편하신 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제가 전달하죠.
“고마워요, 빅토르.”
전화를 끊고, 난 오늘 일정을 떠올리며 정리했다.
조금 일찍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