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너무 포멀하게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캐주얼한 사복 차림도 곤란했다.
아나스타샤와 고민하며 옷을 입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타티아나. 나야.”
익숙한 목소리다. 문을 여니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가 서 있었다.
“루슬란 오빠?”
“잘 잤어? 아나스타샤도.”
“예. 덕분에요. 무슨 일이세요?”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기도 잠시, 루슬란 오빠가 별안간 화를 냈다.
“음반사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면서?”
“예. 그런데요.”
“그런데요, 가 아니라. 그럼 왜 날 안 부른 거야?”
어차피 오늘 그 음반사 사람을 만나려는 이유는 얼굴을 보고 제대로 거절하기 위해서였지만, 오빠는 보호자 없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루슬란 오빠가 투덜거린다.
“넌 대체…… 빅토르와 이야기를 좀 하다가 네 이야기가 나와서 망정이지. 타티아나. 네가 계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는 해?”
“……모르죠.”
“물론 그쪽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미성년자인 너와 마음대로 그 어떤 계약도 못 할 테고 설령 한다 한들 내가 아주 박살을 내 놓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면 안 돼, 타티아나.”
“……잘못했어요.”
“앞으로도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아버지 아니면 나, 그것도 안 되면 변호사라도 불러 상담을 해서 판단을 하는 습관을…….”
얌전히 듣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오빠를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뭐? 귀찮?”
“아…….”
도끼눈을 뜨는 루슬란 오빠를 보니 말실수였던 것 같다.
난 더더욱 불같이 화를 내는 루슬란 오빠에게 몇 번이고 사과하고, 옆에서 한숨을 쉬는 빅토르에겐 눈을 흘겼다. 아무 말도 않는 것이 더 얄밉다.
전담 변호사? 빅토르가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면 깔끔하게 해결되는 일 아니겠는가? 내일부턴 그에게 변호사 공부를 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오빠를 방에 들여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빅토르의 전화로 음반사 직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호텔 1층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큰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큰 키에 안경을 쓴 중년 남자였다. 다부진 어깨와 움푹 들어간 눈이 꽤나 강인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일견 험악한 외모와 달리 상당히 친절한 어투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요.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입니다.”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이것 참, 사진으로 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군? 멀지 않은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그, 감사합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하는데, 옆에서 루슬란 오빠가 툭 끼어들었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라고 했습니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크게 웃더니 품속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루슬란 오빠에게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대표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보호자 되십니까?”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입니다. 타티아나의 오빠이자 보호자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괜찮겠죠?”
“괜찮고말고요, 되레…….”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사람 좋게 웃던 미소를 지우고, 날카로운 사업가의 눈빛을 했다.
“이야기가 더 순조롭게 진행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자, 앉으시죠.”
그리고 나와 루슬란 오빠, 표트르 발레예비치까지 세 명은 둥근 테이블을 두고 앉았다. 곧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난 그가 어떤 제안을 해 올진 모르지만 일단 거절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때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상당한 결례이기 때문이다.
조금 기다리자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연주는 잘 봤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이더군요. 특히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은 거의 감동이었습니다. 성인 피아니스트들조차 그렇게 편안하게 3악장을 소화해 내진 못할 것 같은데, 정말 대단했어요.”
“감사합니다.”
살며시 감사를 표하자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웃었다. 그러곤 재차 질문했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중앙음악학교에서 한 학기 배운 것 말고는 집에서 독학을 하셨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피아노를 어떻게 배웠는지 공식적으로 답변한 적은 없으니 독학이라 생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내겐 언제나 선생님이 있었다.
“독학이라고 할 순 없어요. 레슨을 받았으니까요.”
내 대답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음악 선생이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단 말이군요? 흐음…….”
잠시 무언가 빠르게 생각하더니,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스토리네요.”
“……예?”
스토리?
난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충분히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 표트르 발레예비치. 죄송하지만…….”
“음반에 대해선 고민이 많으신 것 같군요?”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모든 것엔 때라는 것이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이 부분은 루슬란 유리예비치와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천연덕스럽게 대상을 돌렸다.
난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차라리 지금 나보단 루슬란 오빠가 상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한층 여유로운 태도로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루슬란 오빠에게 말했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루슬란 유리예비치. 영국, 독일에 본점을 두고 있는 메이저 레이블들을 기다리면 너무 늦고, 많은 손해를 보게 될 겁니다.”
루슬란 오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가 늦고 무슨 손해를 본다는 겁니까? 전 예술가로서 타티아나가 성장하는 데엔 메이저 레이블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급하게 음반을 내는 것보단 워너 클래식이나 유니버설 클래식 같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는 것이 좋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그에 비하면 마이너 레이블일 뿐이다.
하지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전 세계를 놓고 보는 마케팅력이라면 당연히 그리 생각하시겠지만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러시아 전역에 방대한 유통망과 인프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료를 보시죠.”
그리고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우리 쪽으로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러시아 지도와 그들이 계약하고 있는 음반매장, 유통사 등을 정리해 놓은 서류였다.
러시아 내에선 꽤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자신 있게 말을 맺었다.
“서방의 그 어떤 레이블과 비교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이익을 가져다 드리죠.”
당연한 말이지만, 루슬란 오빠도 나도 이런 말에 쉽게 혹하지 않았다.
루슬란 오빠가 서류를 툭 치며 말했다.
“상당히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군요.”
“돌려 말하는 것은 실례이지 않습니까?”
돌려 말하는 것이 실례라는 말은 조금 독특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돌릴 이유가 없다는 것 같았다.
“루슬란 유리예비치. 예술은 연주자의 역할이지만 음반사업에 대해선 냉정하게 봐 주시죠.”
약간 가르치는 투로,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도록 껄껄 웃더니 그가 설명했다.
“독일이나 영국의 메이저 레이블들은 엄청난 수의 음악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만약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우리 식구가 된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그녀에게 집중될 겁니다.”
음반사가 가진 모든 역량을 내게 집중시키겠다는 말은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조금 더 깊은 본론을 꺼냈다.
“그렇게 러시아의 레이블인 저희는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메세나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 이미지를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교두보가 되어 드리겠단 말입니다.”
“…….”
“이건 서방국가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의 음반사가 가능한 일이죠.”
루슬란 오빠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한층 더 열성적으로 말했다.
“러시아의 예술계를 지원하면서 국가와 사회에 헌신한다는 기업 이미지는 그 어느 때나 막강했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노골적입니까? 이것 역시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할 비지니스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메세나는 기업이 문화나 예술 활동 등에 사회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부분을 따진다면 해외의 음반사와 계약하는 것보단 국내 음반사가 나을 수도 있었다.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론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정확하게 짚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베르체노프는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계기로 관심 있어 하리라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군요. 아예 손 놓으실 겁니까?”
조용히 듣던 루슬란 오빠가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든 동생분을 지원하실 것 아닙니까?”
“당연한 일이죠.”
“그러면서 베르체노프 전체에 이득이 된다면 더 좋을 테고요. 확실한 한 팔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엔 나도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난 이기적으로, 오로지 피아노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내 뒤를 지지해 주고 있는 분들, 특히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것도 사업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도울 수 있단 것은 정말, 정말 매력적으로 들렸다.
문득, 루슬란 오빠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벌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와 함께 음반을 낸다면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루슬란 오빠 쪽을 향하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러곤 살살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말한다.
“저는 분명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재능 역시 러시아에 또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재능에 날개를 달 수 있는 여건도 준비되어 있죠. 그걸 무의미하게 낭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낭비.
내가 과연 무언가를 낭비할 수 있을 만큼 많이 가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와닿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슴이 시큰거린다.
이 남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보다 비즈니스적인 접근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난 이 부분에 대해 굉장히 신경질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점점 뇌리에 스며 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그리고 베르체노프라는 전체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내 생각만 하겠는가? 애초에 난 메이저 레이블에서 음반을 팔아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그 부분을 굉장히 직접적이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가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데뷔 음반은 물론이고 DVD도 낼 겁니다. 저희 스튜디오엔 피아노를 빙 둘러 가면서 촬영할 수 있는 짐벌 카메라가 두 대나 있죠. 최신기술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재능을 세상에 선보일 겁니다.”
DVD를 내는 연주자들도 많지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울렁거렸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음반 발매와 동시에 대규모의 마케팅도 진행됩니다. 베르체노프에서 주도하에 연주회를 연다면 상당히 괜찮을 겁니다. 다른 음악가들도 초대하면서 말이죠.”
내가 어떻게 생각한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이미 날 완벽하게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 세계를 돌며 순회 연주회와 동시에 그에 대한 음반도 제작하고, 앞으로 있을 수많은 콩쿠르들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만 내 준다면…… 그야말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거의, 약간 광기 어리기까지 한 그 모습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팬덤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추종자가 되어 주겠죠. 마치 수많은 귀부인들과 마차를 끌고 다녔던 프란츠 리스트처럼!”
그 어투엔 반드시 그렇게 되리란 확신이 가득했다. 이 사업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게 그가 내밀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러면 조금 상품을 바꿉니다. 그 팬덤이란 소장가치가 있는 물건엔 사족을 못 쓰기 마련이니까요. 친필 사인? 약합니다, 약해요. 프란츠 리스트 말씀드렸죠? 당시 그가 피우다 만 담배꽁초 따위도 엄청난 가격에 경매에 부쳐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현대에도 통용되고 있죠!”
나 역시 수많은 음악가들의 팬이고 그들의 팬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편이지만…….
“뭐든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손을 본뜬 기념품이라든지…… 소장가치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할 말이 없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광적으로 떠든 방법들은 내가 느끼기에 상당히 역하다.
난 비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고, 쉽게 나쁜 쪽으로 생각이 기울곤 한다.
하지만 이건…… 날 상품으로 한 사업이라는 부분으로 본다면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