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널 프란츠 리스트 같은 톱스타로 만들어 주겠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는 이렇게 아침부터 공격적으로 호텔에 직접 찾아와선, 고루한 내 머리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공격적인 마케팅 방법을 몇 개씩이나 쏟아 내었다.
그것들은 바보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들이었다.
당장 나라도 크리스티안 짐머만 같은 분의 상품들을 판매한다면 반드시 구매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클래식처럼 조금 폐쇄적이고 대중적이지 못한 장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목말라 있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약간은 비뚤어진 이 욕구.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정확하게 그 욕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난 할 말이 없었다.
난 비위가 안 좋을지언정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베르체노프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아버지를 따라 사업에 대해 공부도 여럿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대학생.
“…….”
언뜻 바라본 루슬란 오빠의 눈은 상당히 어둡다.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이야기한, 내 마케팅과 연계하여 진행할 수 있는 메세나로서의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기업 이미지 상승.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사실 내가 음반 판매로 벌어들일 푼돈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그리고 장차 그 모든 것을 이어받아야 할 루슬란 오빠가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 관심이 생길 정도인데 오빠는 오죽하겠는가?
처음 이 자리에 나올 때 생각했던, 일단 거절하려던 마음은 상당히 옅어져 있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방법은 많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많아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스스로 명성을 전 세계에 날리면서 그와 동시에 베르체노프 콘체른 전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아버지를 도와…….”
“그간 침묵하고 계시다가 돌연 콩쿠르에 나오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내 특이한 이력에 주목하는 듯했다.
난 그냥 주어진 상황에 흘러가며 살았을 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또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른다.
“…….”
잠자코 있자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의자 뒤로 기대었다.
그는 내가 한 개인 연주자가 아닌, 베르체노프라는 기업을 등에 업은 것으로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부분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게 도움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면, 거부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겠지.
내가 피아노에 관련된 일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신경을 끄겠다고 딱 잘라 선언한다면 아마 아버지도 그리 강하게 하진 못하실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가…….
“타티아나.”
계속해서 잠자코 표트르 발레예비치를 노려보고만 있던 루슬란 오빠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오빠…….”
평소처럼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어투.
“맹세하는데, 아버지도 나도 널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
그렇게, 라는 말로 루슬란 오빠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어 봤다고 말하고 있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루슬란 오빠가 이번엔 표트르 발레예비치 쪽으로 포문을 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경고하죠. 타티아나를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몰아세우지 않았습니다만?”
“타티아나의 사명감, 의무감 등을 자극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러지 마시란 말입니다.”
“…….”
표트르 발레예비치의 눈빛이 일변했다.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앉아 있던 자세가 약간 앞으로 움직인다.
정중한 어투로 사과해 온다.
“실례했군요. 고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드리죠, 루슬란 유리예비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전 괜찮아요…….”
벌컥 짜증을 내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냥 외면해야 할 문제가 아닌, 나 스스로도 조금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했고.
내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루슬란 오빠가 커피로 입을 축이곤 이야기했다.
“……그럼 사업 이야기를 해 볼까요.”
루슬란 오빠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크게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전혀 흥분하지 않은 어조로 차분하게, 루슬란 오빠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적극적인 사업수완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당신에겐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나온 것이 타티아나와 제가 아닌 아버지였다면 또 다른 안이 있으셨겠죠?”
“장소부터 바꿔야죠. 카페에서 유리 알렉세예비치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전 꽤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덕분에 어젯밤은 잠을 못 잤죠.”
“하하하, 전 당신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업 파트너로 보입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에 대한 인식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간다.
그는 뼛속까지 사업가였다.
음반사의 대표로서 일찍 사업거리를 알아보고, 재벌 총수인 아버지가 직접 나오더라도 그를 상대로 당당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도록 밤새 준비를 한,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루슬란 오빠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로 입장이 어떻든, 자신의 두 배 이상을 산 사람에겐 배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웃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루슬란 오빠가 돌연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하지만 잘못 생각하신 부분이 있군요. 표트르 발레예비치.”
“가르쳐 주시죠.”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는 표트르 발레예비치를 향해 루슬란 오빠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말했다.
“타티아나를 베르체노프에서 준비시킨 일종의 도구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순간, 등줄기에 그 차가운 말이 내달린다.
이 노골적인 질문엔 베테랑임이 분명한 표트르 발레예비치조차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그랬죠. 불쾌했다고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그리 생각하시진 않나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혹, 베르체노프가 타티아나를 사업용으로 키웠다고 판단하시진 않으셨는지.”
지난 15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느닷없이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한 지 한 학기 만에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하여 모든 상을 거머쥔 신예.
그 이력은 수상하기 이를 데 없어 베르체노프에서 암암리에 키운 비밀병기가 아니냐는 소리도 간간이 들리곤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 위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이제 세상에 내보였는가.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여기서 새 사업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날 베르체노프가에서 충분히 교육받은 도구로 여겼고, 그래서 사업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어필했다. 내가 잘 알아들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감정의 고저가 없는 듯한 차가운 어조를 물고 입을 열었다.
스무 살에 불과한 오빠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표트르 발레예비치를 위압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베르체노프 콘체른은 다방면에 사업을 확장할 생각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클래식 업계에 뛰어들 수도 있겠죠. 메세나로서의 역할로 시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까지 갈 것도 없었다. 이 정도는 루슬란 오빠 선에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지금 그것을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곤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하니, 부디 신뢰해 달라는 듯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연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시장에 뛰어들든 간에, 제 동생을 그 선봉에 세울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착각 마시죠.”
“…….”
루슬란 오빠를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고 했던 루슬란 오빠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단호한 입장을 밝혔고, 그건 반쯤 체념하고 있던 내가 되레 못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약간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시겠다고요?”
“내버려 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어떠한 기업 단위의 푸쉬 없이 그녀를 혼자 두겠단 말로 들립니다만?”
루슬란 오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동생이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와 아버지는 이러한 건을 상당히 깊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타티아나에게 클래식과 관련된 사업체를 쥐여 주는 방식으로 말이죠. 음반회사든 에이전시든 콘서트홀이든.”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난 아버지가 내게 무언가 사업권을 넘겨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고, 원한 바도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가 있지도 않은 일을 말할 리 없었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내리꽂힌다.
“그 말인즉슨, 표트르 발레예비치. 당신을 사 버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는 러시아에 넓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사장.
루슬란 오빠는 그 사업을 통째로 인수해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베르체노프가 클래식 시장에 발을 딛는 첫 디딤돌로.
화를 낼 만도 한 상황. 하지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큰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루슬란 유리예비치.”
“…….”
베르체노프를 도와 음반 사업을 진행해도 그만, 돈을 받고 지분을 팔아도 손해 날 건 없다는 투였다.
라예프스키 레코즈에 애정이 없진 않겠지만, 사업가로선 당연한 태도였다.
루슬란 오빠는 괜한 협박조를 섞어 봐야 비웃음만 살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약간 태도를 바꾸었다.
“저 역시 제 생각일 뿐입니다. 러시아 클래식 업계의 한 주축인 회사를 어떻게 쉽게 보겠습니까?”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맙군요.”
“다만 저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상당히 많으니, 선택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따름입니다.”
“모르지 않습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모든 선택권이 옆에 있는 루슬란 오빠나 아버지가 아닌, 내게 있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한 듯 보였다.
아직 그가 내민 손은 거두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라예프스키 레코즈와 함께 음반을 내고, 베르체노프의 지원을 받으며 내 이름을 띄우는 데에 주력하는 것.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질 것이다.
사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대답하기 너무 어려웠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난 조용히 그를 불렀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조금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하나 여쭈어 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음반에 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넣지 않고 오로지 음원만 넣어서 제작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신가요?”
“……?”
하지만 내가 그에게 던진 것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더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실없이 웃었다.
“이름도, 재킷도, 아무것도 없이 곡 제목만 넣겠단 말씀이신지요?”
“예.”
“푸하하하하.”
실실거리던 웃음의 볼륨이 느닷없이 몇 배는 커졌다.
한참을 배꼽을 잡고 웃던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단정 짓듯 말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99%는 재고로 남게 될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팔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음반을 사 보셨을 것 아닙니까? 뭘 보고 사십니까?”
난 수많은 음반을 샀었고,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는 명확했다.
“연주자와…… 곡이죠.”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따지는 분들은 음반사, 음반사가 갖춘 녹음기기에 따른 음질 상태, 구성품, 소장 가치 등등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따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연주자와 곡. 그런데 연주자를 빼놓고 판매하겠다고요?”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누가 사겠습니까, 그걸?”
역시 음반업계에서 노련한 사업가로 보이는 표트르 발레예비치도 이런 의견이다.
난 무심히 대꾸했다.
“그렇죠?”
“연주의 품질이라는 것도 일단 사서 들어야 저울에 올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집지 않아요, 그런 음반은.”
그렇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말입니까?”
살짝, 표트르 발레예비치의 표정이 굳는다.
그는 연주자에 대한 아무 정보도 넣지 않고 음반을 낸다는 것이 내가 궁색하게 생각해 낸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받은 또 하나의 제안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든 지지해 줄 것처럼 날 가만히 지켜보는 루슬란 오빠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차분하게, 혹시라도 비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중하게 톤을 유지하며 말했다.
“가능성이 확실해 보이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겠지요.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했으니까…….”
어쨌든 결론은 내 마음대로였다.
“그렇게 해 보려고요.”
“……음반을 내긴 내겠단 말씀이십니까?”
“예. 유감이지만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상당히 실망이라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스스로 유치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저열한 승리감이 마음 한쪽에서 음울하게 꿈틀거린다.
솔직히 말해 저 표정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거절한 것도 십분 있었다.
난 그리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