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상황 판단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흠…….”
그는 낮게 소리를 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이 이야기는 끝났다.
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내 표정을 살핀 그가 허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제가 했던 이야기들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추후에 생각이 바뀌면 연락 주시길.”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루슬란 오빠와 악수를 나누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카페에서 나갔다.
“…….”
난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약간 식은 찻잔을 기울였다. 절로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러시아를 주축으로 하는 음반사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대표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 상당히 야망 있고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루슬란 오빠는 약간 다른 평을 했다.
“결정적으로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군.”
“……예?”
“아버지가 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더란 말이지. 마지막까지도.”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간과한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는 날 그저 가문에 종속된 한 명으로서 아버지와 오빠의 명에 거역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오빠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명령할 리 없었다.
“사실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거든. 그러니 딸인 타티아나 너 역시도 일종의 도구로…… 준비했다고 믿을 만도 하지.”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지.”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난 잘 모른다. 아마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무서운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루슬란 오빠가 웃으며 그 이유를 말했다.
“넌 어디까지나 혼자서, 자기 위치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
“혼자라고 말씀하시지 말아 주세요.”
“그냥 말이 그렇단 거야.”
신경 끄라는 듯 툭 던지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중앙음악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마르포 마린스키 여학교에 갔다면 아버지는 지금처럼 날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믿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널 아버지가 근래, 아니……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자리에 내가 같이 나온 것만으로도 대충 눈치는 차렸어야지.”
“그런…… 건가요?”
“내가 멍청한 탓이겠지만.”
루슬란 오빠는 태연하게 말했다. 난 깜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 난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걸 하루에도 열 번씩은 깨닫곤 해.”
루슬란 오빠가 일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당장 지금도 그래. 난 네가 음반사와 손을 잡고 유명해지는 것을 바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네 의사를 존중하고 싶었기에 무작정 끼어들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어. 그리고 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얼마나 멍청해?”
그 목소리엔 후회가 가득하다.
“네가 그런 걸 바라지 않는 애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도.”
“…….”
“미안해,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가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 대신 보다 빨리 나서서 화를 내고,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무안을 주고 윽박지르지 않아서?
섭섭하게 느낄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점이 루슬란 오빠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그 부분은 꽤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충분해요. 고마워요.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직도 루슬란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굉장히 어색한 것처럼 보인다. 멀거니 날 보더니 허둥지둥 말을 돌린다.
“어, 그게 아니라. 뭐야, 그…… 아까 했던 말은 무슨 소리야?”
“했던 말이요?”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방식의 음반이 있는 것 같은데. 뭐야 그게?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연주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로지 음원만을 넣은 음반.
물론 나도 이해가 안 간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에우테르페 레코즈에서 나온 베로니카 과장이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오늘 본 표트르 발레예비치보다 그쪽이 더 수상하긴 하다.
적어도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정확한 사업계획을 제시하기라도 했지, 베로니카 과장은 그런 것도 없이 무작정 내 소리만을 팔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은, 내가 차마 말로 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방식에 근접한 것처럼 느껴진다.
루슬란 오빠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냥 해 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거절하기 위해 거짓 명분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맞아요. 없는 말은 아니에요. 전 실제로 그 제안을 받았어요.”
“뭐? 언제?”
“본선 제 차례가 끝난 직후에요. 아, 그 자리에선 보류했어요. 아직 전…….”
혹시 오빠가 없는 사이에 그런 제안을 받았다는 것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덧붙였다.
그런데 루슬란 오빠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냥 자랑해도 괜찮아.”
“…….”
“나 원…… 바로 어제 그렇게 상을 휩쓸고 음반사로부터 연락도 많이 받았다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자만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도 자만하기도 해요.”
어련하시겠어요, 하며 루슬란 오빠가 손짓했다.
“지금 전화해 볼래? 네게 그 제안을 했다는 다른 음반사에.”
“지금요?”
“그래. 내가 있을 때.”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난 분명 다른 음반사와 계약할 생각이라 밝히긴 했지만,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아 조금 홧김에 이야기한 것도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난 조금 음반에 대한 것은 조심스러운 심정이었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음반을 내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고, 내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되고 나서 준비하고 싶은…….
“타티아나. 시간은 계속 흘러.”
“……예?”
루슬란 오빠가 뜬금없이 그런 당연한 소릴 했다.
갑자기 무슨 시상이 떠오르신 건가요? 라고 물어볼 정도로 배려심이 없진 않았기에 설명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렸더니 오빠가 이어 말했다.
“난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열다섯 살 때 할 수 있는 음악과 예순 살이 되어서 할 수 있는 음악이 같진 않다는 건 알아.”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루슬란 오빠가 웃으며 말한다.
“물론 보다 원숙해진 연주가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 않겠어?”
“…….”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리고 미숙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남겨 놓을 가치가 있다.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이해 역시 가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고지식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절대적인 음악의 완성도라는 것 역시 분명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곧바로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자 루슬란 오빠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음반이 안 팔린다고 해서 우리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상황도 아니잖아? 하하하, 재고가 생기면 쌓아 놨다가 손님들에게 주지 뭐.”
“…….”
꼭 저 한마디가 얄밉다, 정말.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자 루슬란 오빠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해 봐.”
“…….”
“지금 널 그대로 남겨 봐. 내가 도와줄게.”
그 말에 적잖이 흔들렸다.
나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면 아마 음반에 대한 일은 한참이나 미뤄 뒀을 것이다.
난 지금 내 소리를 영구히 남기고 싶을 정도로 자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주자로서 한 번도 내지 못했던 음반을 내 보고 싶다는 마음과, 지금 내 상태 그대로를 블라인드 테스트 받아 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있었다.
특히 내 음반이라는 것에 대한 갈망은…… 상당히 강력하게 날 유혹했다.
외면하고 있지만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서늘한 현실에 대한 것이다.
“…….”
시간은 계속 흐르겠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리라 장담할 순 없었다.
다시 한 번 주어졌지만, 언제든지 도로 빼앗아 갈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은 약했고 연주자의 삶은 너무나 쉽게 망가져 버릴 수 있었다.
난 지금 상당한 과보호 속에 살고 있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잊어야만 하는 생각. 하지만 내 심중에 틀어박혀 있는 그것은 내가 느긋하지 못하고 약간 조급증을 가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건 내가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면서 연습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 주기도 했지만, 혹시 음반을 낸다면 조금 편안해질 수 있을까.
“오빠.”
“응.”
“해 볼게요.”
난 가방 안에서 저번에 받아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에우테르페 레코즈 과장이라는 직함 아래에 베로니카 이바노브나 사칼로바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잠시 그 명함을 내려다보다가, 결정을 했을 때 빨리 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곧장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
신호가 간다. 이젠 무를 수도 없었다.
긴장하며 기다리자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 누구시죠?
“그…….”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기적처럼 내 혀가 알아서 자기소개를 해 주리라 믿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명함을 받은 타티아나입니다. 베로니카 이바노브나이신가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베로니카가 말했다.
- 전화 잘 주셨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콩쿠르 우승 축하드립니다.
눈앞에 마치 정장 차림의 그녀가 서 있는 것 같다. 말끔한 목소리가 약간의 웃음기를 담는다.
- 설마 하루 만에 연락을 주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조금 시간을 두고 연락할 걸 그랬다. 안달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이미 전화를 걸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되었어요.”
- 그렇게 되었다, 라…….
목소리를 흐리던 베로니카는 용건을 묻지도, 새 제안을 하지도 않고, 돌연 질문을 해 왔다.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인가요?”
- 다른 음반사를 만나 본 소감은 어떤가요?
어떻게 내가 다른 음반사와 만났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모양이다.
난 솔직하게 말했다.
“흥미로웠지요. 동시에 조금 무섭기도 했고요.”
- 아하하, 혹시 어느 음반사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라예프스키 레코즈라는 이름이네요.”
- ……동종업계 종사자를 욕하긴 싫지만, 라예프스키와 계약하셨더라면 스트레스깨나 받으셨을 겁니다.
조금 질린다는 듯한 목소리가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평판을 짐작케 했다.
괜한 소릴 했다는 듯, 베로니카는 밝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 덕분에 저를 떠올려 주셨군요. 문의하실 것이 있으신가요?
“딱 한 가지예요. 어제 제게 했던 그 제안, 조건은 그대로인가요?”
- 앨범에 이니셜 하나 넣지 않고 음원만 넣어 판매하겠다는 제안 말씀이신가요?
“예.”
- 그대로입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 아무 조건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전 하고 싶어요.”
옆에 있는 오빠를 살피며, 내 의사를 전했다.
베로니카 과장은 잠시간 말이 없더니,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당신이 베르체노프의 딸이라는 건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달랑 명함 한 장 던지고 온 것에 대해 우리 마케팅 매니저는 절 거의 죽이려 했었죠.
그 마케팅 매니저라는 사람이 방금 본 표트르 발레예비치 같은 성향이라면…… 베로니카를 거의 죽이려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 회사의 모든 마케팅력을 끌어모아서 올인해 주겠다고 해도 모자를 상황인데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이죠.
“…….”
- 하지만 우리 마케팅 매니저는 당신을 못 봤죠. 무대도, 대기실에서의 모습도.
베로니카 과장은 본선에서 보인 내 무대를 보자마자 그대로 대기실로 직접 쳐들어온 사람이었다.
정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본선 무대만을 보고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엔 마케팅 매니저도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저희 팀만이 뭉칩니다. 그리고 저희 팀은 새로 찾아낸 신예가 어마어마한 부자 아버지를 두었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피아노 소리를 녹음해서 순수하게 세상에 전하는 것뿐이에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녀가 내게 물었다.
- 전화를 주신 건, 제가 그런 사람이길 바라셨기 때문이죠?
“……그러신가요?”
- 바로 그래요.
“제 피아노 소리가 녹음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물론이죠.
즉답하는 그 목소리에 의구심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난 그녀와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베로니카 과장이 이어서 말했다.
- 자세한 이야기는…… 이제 곧 학교는 2학기가 시작할 텐데 너무 급하게 진행하지 말고 차차 하도록 하죠.
“그래도 되나요?”
- 예. 급하게 할 수 있지도 않아요. 우리 엔지니어들은 꽤 엄하거든요.
대기실로 난데없이 쳐들어온 행동력에서 미루어 보아 음반 작업도 곧장 시작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여유를 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 주말 즈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모스크바 레코딩 스튜디오에 한 번 모셔서,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아…… 모스크바에서요.”
- 예.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불과 열흘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리운 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