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할 일이 있어 며칠 남기로 했고 나는 2학기 개학을 앞두고 먼저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 나와, 날 위해 모여 주신 분들을 위해 아버지는 내게 전용기를 내어 주셨다.
솔직히 나 혼자라면 굳이 전용기까지 필요하진 않았지만, 다른 분들도 편히 모실 수 있다면 쓸 수 있는 것도 안 쓸 생각은 없었다.
“…….”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안. 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함께 타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 타티아나.”
“아뇨, 그냥…… 정말 멋진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공부도 많이 한 기분이다.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콩쿠르도 잘 치렀지만, 요 일주일간 꽤 많은 것을 얻은 모양이구나, 타티아나.”
“예, 미하일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였어요.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죠.”
“다행이구나.”
콩쿠르에 앞서 일찍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 보길 제안했던 미하일 선생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푸쉬킨스키구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 앞엔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에르네스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리무진 옆으로 다가온 에르네스트가 대뜸 사과부터 했다.
“정말 미안해. 잠시만 기다려 줄래? 출발할 채비가 아직 좀 덜 돼서.”
“괜찮아요. 천천히 하셔도 되어요. 출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제가 도와 드릴 것이라도?”
“아니, 괜찮아.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다시 아파트로 뛰어 올라갔다.
나도 밀어닥치는 온갖 일정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때문에 에르네스트에게 전용기로 함께 모스크바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본 것이 바로 2시간 전이었다.
빠르게 준비하더라도 조금 촉박할 수 있는 시간이다.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빅토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아가씨.”
“예, 빅토르.”
“제가 올라가서 짐 옮기는 걸 도와주어도 되겠습니까?”
“아! 괜찮으시겠어요?”
빅토르는 내 경호원이고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도와주지만 내가 분별없이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부탁은 그가 먼저 말을 꺼냈을 때, 간신히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정말 내 마음을 잘 읽는 편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예. 가족 단위니 짐이 꽤 많을 겁니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빅토르. 고마워요.”
“기다리고 계십시오.”
바로 리무진에서 내려선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빅토르는 잠시 후 캐리어를 한 번에 두 개나 들고 내려왔다.
그 뒤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에르네스트, 사샤가 따라 내려온다.
리무진의 트렁크를 열고 빅토르가 캐리어를 집어넣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감사를 전했다.
빅토르는 쿨하게 인사를 받곤 리무진 문을 열어 주었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날 보시곤 환하게 웃으셨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늦어서 미안하구나.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제가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뒤이어 에르네스트와 사샤도 리무진에 올랐다.
커다란 리무진이 신기한지 사샤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사샤.”
“아, 타티아나 누나.”
안에 있는 날 발견한 사샤가 천사처럼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기쁘게 사샤를 반겨 주었다.
잠시간 인사와 환담이 오가고, 모두를 태운 리무진은 전용기가 준비되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공항으로 향했다.
검문소같이 생긴 곳을 통과해서 들어가자, 여객기들이 늘어서 있는 활주로와는 분리되어 있는 또 다른 활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무진에서 내려 고개를 들자 항공사의 큰 여객기보단 작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큰 비행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크기에 위압되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빅토르가 손짓하며 말했다.
“이 전용기입니다, 아가씨.”
“…….”
그렇겠죠.
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 너는 비행기라는 걸 아예 처음 타 보지?”
“응.”
사샤는 신나 하며 대답했다. 비행기에 처음 탄다면 조금 무서워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마냥 신나 있었다.
사샤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비행기에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티아나 누나.”
“별말씀을요.”
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게 내 전용기는 아니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상관없었다.
***
전용기 내부는 일반 여객기처럼 분리되어 있는 좌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륙할 땐 안전 문제 때문에 안전벨트가 달린 좌석에 앉아야 했지만, 일단 이륙을 하고 나선 굳이 좌석에 앉아 있을 필요 없이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룸에 모일 수 있었다.
냉장고에 소파와 테이블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이 룸은 족히 스무 명은 한 번에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가구들과 조명이 이곳이 정말 비행기 내부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승무원이 몇 가지 기내식과 음료를 내왔다. 음료 중엔 와인도 준비되어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과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와인을 한 잔씩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기분 좋게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건배를 하는 건 어떠니?”
갑자기 건배라니 조금 뜬금없었지만,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섯 명은 테이블을 놓고 둘러앉았고, 처음 건배를 제안하신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건배사를 맡아 주셨다.
그리 복잡한 말은 필요 없었다.
“하늘에서 건배를 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를 만들어 준 타티아나에게 감사를, 그리고 새 학기에도 모두가 건강히, 잘 지낼 수 있도록.”
짧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였다.
주스와 와인 잔이 함께 부딪쳤다.
그리고 작은 파티가 시작되었다.
와인으로 살짝 목을 축인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부럽다는 듯 말씀하셨다.
“개학을 하게 되면 날 뺀 이 자리의 모두가 한 학교에 다닌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지는구나, 타티아나.”
“아…… 그렇지요.”
“학교 다닐 때 생각난다……. 참 좋았는데 말이지. 지금 또다시 다닐 순 없으려나?”
“피아노 배워서 입학시험 치세요, 어머니.”
에르네스트가 태연하게 그런 소릴 했다.
“추천서는 제가 써 드리죠.”
미하일 선생님은 한술 더 떴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를 어떻게 하면 중앙음악학교에 학생으로 입학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장난과 농담이 오갔다.
그냥 좌석에 앉아서 조금 편하게 올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모스크바행은 전용기 내부에 있는 룸 덕분에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전용기는 굉장히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날고 있어서, 열 수 없도록 단단하게 만들어진 창문 밖으로 막 뉘엿거리며 저녁놀을 흩뿌리는 해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정말 비행기 안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와아…….”
사샤가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흘렸다. 나 역시 이렇게 맑은 저녁놀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예술이 달리 예술이냐며, 이런 자연예술은 무조건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모두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소파에 앉아서 주스를 홀짝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그건 무슨 주스야? 희한한 색이네.”
“파인애플 맛이네요.”
“파인애플? 보라색인데?”
“예. 드셔 보시겠어요?”
솔직히 파인애플인지 포도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마시던 걸 그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같은 색의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하나 찾아서 가져다주려고 일어설 때였다.
“읏.”
순간 휘청하며 비행기가 흔들렸다.
크게 요동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잠깐 흔들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난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몸이 기운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니 자동적으로 손이 나갔다. 눈앞엔 테이블이 있었다.
하지만 난 순간적으로 앞으로 나가던 손을 끌어당겨 거두었다.
난 내 운동신경을 그리 믿지 않았고, 잘못 짚었다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타티아나!”
하지만 내가 머리부터 테이블에 부딪히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양옆에서 날 붙잡아 준 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야, 괜찮아?”
“괜찮아, 타티아나?”
두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내가 쓰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고, 에르네스트 역시 반쯤 튀어나와 팔로 날 가로막았다.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 건지 대단하다. 난 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데.
주춤거리며 다시 중심을 잡았다.
“괜찮아요. 다른 분들은……?”
“너만 큰일 날 뻔했어.”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도, 미하일 선생님도, 사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하아……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아나스타샤는 날 놓을 생각을 않고 그대로 앉히려다가 반대편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안전바처럼 내 배 부근에 닿아 있던 손을 그제서야 자각한 듯했다. 그가 깜짝 놀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어…… 고의는 아니었어.”
“알아요.”
“이건 그…… 뭐라고 하지…… 반사적으로…….”
“알아요, 에르네스트. 고마워요.”
날 도와준 에르네스트가 무언가 변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할 이유는 없었다.
담백하게 말을 맺자 그가 이제야 한 숨 돌리겠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보다, 너야말로 반사적으로 팔을 접던데…… 그러다가 크게 다쳐. 그러지 마.”
“……버릇이에요.”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걱정스레 날 바라보는 모두를 진정시키며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하고 있는데, 기내 스피커를 통해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훅, 기장입니다. 안내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 국지적인 난기류를 잠시 지나갈 것 같습니다. 혹여나 기체가 흔들릴 수도 있으니 되도록 앉아 주시길 바라며…….
“안내가 많이 늦는데?”
아나스타샤는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잡아 주신 덕에 안 다쳤잖아요?”
“……그래.”
잠시 소동이 있긴 했지만, 누가 다친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난 조금 경직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 애썼고, 내게 호응해 주는 사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본래 분위기로 되돌릴 수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은 겨우 1시간 30분밖에 안 된다. 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전용기는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러시아의 전통에 따라 무사 착륙을 축하하며 기장에게 박수를 보낸 뒤, 우리는 전용기 밖으로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마중을 나와 준 리무진 운전기사에게 허락을 구하고 모두를 각자 자택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만류당해서, 결국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벨로루스카야역까지 데려다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역에 도착한 뒤에는 정말 헤어져야 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럼 학교에서 보자꾸나, 타티아나.”
“예, 선생님.”
난 학교에 있는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갈게, 타티아나. 가서 개학할 때까지 꼼짝도 말고 쉬어. 피곤할 텐데.”
“그렇게 할게요.”
개학할 때까지라고 해도 당장 모레였다. 그동안 푹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사샤는 내게 달려와선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춘 나와 포옹하고는, 놓아주며 환히 웃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타티아나 누나.”
“즐거워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샤.”
“다음에 저희 집에 또 초대할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초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일어섰다.
아나스타샤가 손을 들어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서 얼굴 옆에 가져다 대었다.
“도착하면 전화해.”
“알았어요.”
무사히 집에 도착했는지에 대한 걱정은 내가 아니라 지하철로 돌아가는 아나스타샤가 받아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뻔했다.
그렇게 모두와 인사가 끝나고, 에르네스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학교에서 보자.”
“예.”
지하철 역 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두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도 다시 차에 올랐다.
뒤따라 탄 빅토르가 차가 출발하자 말했다.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러게요…….”
적적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 허전한 기분은 들었다.
“그래도 빅토르가 있잖아요.”
“그런 말씀까지 해 주시다니, 이거 충성할 맛 납니다, 아가씨.”
빅토르가 낄낄거렸다. 그는 과하게 내가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필요로 하는 상황에선 자신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내곤 했다.
빅토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저택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조명으로 밝혀진 거대한 저택은 겨우 열흘 안 봤을 뿐인데도 어딘가 어색했다.
조금 멍하니 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날 기다리고 있는 예고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예고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내신 일에 대해선 들었습니다. 전 아가씨가 자랑스럽군요.”
“고마워요…….”
안경을 쓰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예고르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단 예고르뿐이 아니었다.
“왕.”
“벨카!”
본관 문간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내가 그 힘을 못 이겨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앞발을 들어 올렸다. 난 벨카를 안아 주었다.
“잘 있었나요?”
“왕.”
벨카는 작게 짖으며 목 언저리를 내게 치댔다. 그 부드러운 감촉이 꿈결 같다. 난 양팔로 양껏 벨카를 쓸어 주었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예고르는 추운데 들어가자고 말하지 않고 잠시간 기다려 주었다.
난 깨달았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집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돌로 지어진 웅장한 저택이 아니라, 이 따뜻함들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