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39화 (139/1,277)

##  139화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 콩쿠르 세계 연맹WFIMC이 공인하는 국제 콩쿠르는 125개나 된다.

이렇게 많은 국제 콩쿠르는 정말 제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콩쿠르도 있고, 혹은 2년에 한 번, 길게는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콩쿠르도 있다.

규모에 따라 진행되는 기간도 모두 다르다. 단 하루 만에 끝나는 콩쿠르도 있고 예선부터 본선까지 한 달도 넘게 진행되는 콩쿠르도 있다.

이렇게 각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든 음악 콩쿠르에 거의 비슷하게 적용되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나는 세계 각지에서 몇 명이 모이든 간에 우승자는 단 한 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7세 미만의 청소년 콩쿠르와 17세 이상의 성인 콩쿠르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콩쿠르에 따라 세부적으로는 종종 공동우승을 인정하기도 하고, 유소년부와 청소년부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저 두 가지는 국가와 규모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난 17세 미만만 참가 가능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음악 콩쿠르에서 단 한 자리뿐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 자체는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내가 그간 노력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기뻐해 주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여기서 흡족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근 1년간 한 번도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알겠냐마는,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청소년 콩쿠르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요.”

구세프 선생님은 흡사 외계인을 보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말을 무작정 멍청한 소리로 치부하진 않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안주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왜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꿰뚫어 보시려는 듯하다.

하지만 천하의 구세프 선생님도 내 생각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결국 그렇게 물어 오셨다.

간접적으로나마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봐야 선생님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난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단 그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설픈 변명이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2년간 아무 활동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에요. 학교에 다니는 건 물론이고…… 연주회도 할 생각이고요. 이번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 기회가 생겼으니 그것도 하려고 해요.”

“…….”

“그리고 음반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음반도 내고요.”

“음반?”

가만히 듣고 계시던 구세프 선생님이 음반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역시나.

일견 황당하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음반사에서 연락이 왔었느냐? 타티아나.”

“예.”

“…….”

고개를 끄덕이자,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보통 음악을 배우는 제자가 음반을 낸다고 한다면 축하를 해 주어야 할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겨우 열다섯 살에 불과하단 점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신중하게 말했다.

“흥 깨는 소리는 하기 싫다만, 그래도 하는 게 내 일이겠지. 타티아나. 음반은 되도록 미뤘으면 한다만.”

내가 혹여나 기분 나빠 할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세프 선생님은 진지하게 말했다.

“발이 상당히 빠른 녀석들이 있나 본데…… 음반사는 네 생각처럼 네 음악을 곱게 포장해서 세상에 선보이는 그런 자선단체가 절대 아니다. 잘 생각해야 한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구세프 선생님은 나도 몇 번이고 걱정했던 부분을 똑같이 걱정해 주시고 계셨다.

난 작게 감사를 표하곤,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 음반사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뭐가.”

“음반에 오로지 음악만을 담아 주겠다고 하더군요. 제 이름도 사진도 그 무엇도 넣지 않고.”

“……뭐?”

음반을 열다섯 장이나 낸 구세프 선생님도 생전에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단지 저와 음반을 계약하게 된다면 그렇게 제작할 것이라고 들었을 뿐이에요.”

“…….”

구세프 선생님의 눈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음반을 내면서, 내 선생님들에게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했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음반사 이름이 뭐지?”

“에우테르페 레코즈라고 들었어요.”

“에우테르페…….”

구세프 선생님은 더더욱 살기등등한 눈으로 음산하게 말했다.

“일단 알겠다.”

도저히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어서 하긴 했는데 어쩐지 조금 무섭다.

난 내게 명함을 건넸던 베로니카를 믿고 있지만…… 구세프 선생님이 보기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다.

험악한 눈을 하고 있는 구세프 선생님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것도 안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콩쿠르만……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미루고 싶어요.”

“이해가 안 가는군. 다른 활동은 하고 싶다는 걸 보면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오로지 내실만을 다지고 싶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굳이 콩쿠르만 피할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네 실력이면 2년간 잘하면 서너 군데 정도는 더 준비해서 석권할 수 있을 텐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예.”

난 다시 그렇게 대답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썼다.

방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청소년 콩쿠르에 나갈 수 있는 2년간은 내 적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고, 그건 구세프 선생님처럼 음악에 대해 빈말을 안 하시는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정말 중요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고, 구세프 선생님은 슬슬 짜증이 나시는 듯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공정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나가지 않겠다니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다. 선생님들은 어이없어하실 것이다.

구세프 선생님이라면 대단한 스포츠맨십 나셨다고 박수라도 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

“…….”

그렇게 나와 구세프 선생님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속뜻을 밝히길 바라시는 것 같았고, 난 그냥 이유를 묻지 않고 넘어가 주셨으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 바람을 알아봐 주신 것은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하렴.”

“미하일 선생님.”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시던 미하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무언가 휙휙 넘겨 보셨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계획대로는 네가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세 곳의 청소년 콩쿠르에 내보낼 생각이었단다. 꽤 굵직한 것들로만 골라 놓았지.”

“…….”

미하일 선생님은 이전부터 음악가는 커리어를 쌓아 올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때문에 내 콩쿠르엔 상당히 관심을 두고 계셨다.

그런데 그 계획을 열심히 따라 줘야 할 내가 막상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아마 이 자리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미하일 선생님일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조용히 말씀하실 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우승을 해 보고도, 그 단맛을 맛보고 나서도 그런 판단을 했다면…… 그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겠지.”

미하일 선생님은 내려다보던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다시 날 올려다보시더니 옅게 웃었다.

“그러기가 쉽지가 않은데. 잘 생각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내 태도에서 무언가 읽어 내신 듯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아실 수는 없었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셨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앞으로의 콩쿠르 계획까지 구상하신 선생님이 내게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런 담백한 태도는 놀라웠다.

이 태도에 구세프 선생님은 버럭 화를 냈다.

“미하일. 또 그렇게 오냐오냐하면 어떻게 하나? 물론 저 녀석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자네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순 없어.”

구세프 선생님은 학생이 헤매지 않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선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문득 내가 성악을 배우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구세프 선생님은 상당히 무른 경향이 있는 미하일 선생님의 태도를 놓고 고함을 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미하일 선생님도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나도 생각 없이 말하고 있는 건 아닐세. 솔직히 말해 볼까.”

미하일 선생님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타티아나. 만약 내가 널 콩쿠르에 내보내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니.”

“…….”

난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몇 번쯤 반항할 것이다.

난 더 이상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선 안 된다는 결정을 아무렇게나 충동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선생님이 계속해서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 장차 내 커리어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선생님에겐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 될지에 대해 현실적인 설득을 이어 나가신다면 결국 그걸 이기진 못할 것이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구세프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저것 보게.”

“…….”

“난 그렇게 말 못 하네.”

“미하일, 자네 정말…….”

“책임 이야기는 하지 말게. 난 언제든지 내 학생인 타티아나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구세프 선생님의 말을 딱 자르며, 미하일 선생님이 말을 맺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지 말야.”

두 선생님이 각각 말씀하시는 책임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크게 엇나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뭐가 그리 엇나갔나?”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이미 정리가 끝나신 모습이었다.

“피아노를 놓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콩쿠르에 안 나간다고 해서 실력이 닳는 것도 아닐세. 경쟁에 익숙해지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너무 그럴 필요도 없네.”

“웃기는군. 그러는 자네도 연달아 콩쿠르에 내보내려고 했지 않았나?”

“어릴 때 나가는 콩쿠르는 분명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도 얼마든지 있지.”

미하일 선생님이 콩쿠르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으시기 때문에 계획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으신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내 커리어를 빠른 시간 내에 끌어 올리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고, 미하일 선생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음악가였다.

콩쿠르에서 상을 받고 유명해지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많았다.

떠올려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조금 일찍 가 보라고 조언해 주셨던 것도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콩쿠르를 앞두고 관광이라니 잘 이해가 안 가는 조언이었지만, 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다니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고 운 좋게 에르네스트를 만나선 현지 코치까지 얻을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도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결과적으론 내가 구사 가능한 음악의 한계가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실력으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면 안 되는 것이다.

난 그렇게 미하일 선생님의 말씀을 곧장 알아들었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틀린 것은 없고 모두 다를 뿐이라고 했을 때,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철학이 있으신 것이다.

구세프 선생님이 우중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쉽게 말하는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 같나?”

“간단하지 않을 건 또 무어란 말인가?”

미하일 선생님은 태평해 보일 정도로 싱겁게 대꾸했다.

“영영 경쟁을 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나이가 찬 뒤에 더 큰 콩쿠르에 가서 우승하면 되지 않나.”

“……하.”

사실 자잘한 콩쿠르 수십 가지에서 수상하는 것보단 굵직한 하나가 훨씬 중요하기도 했다.

125개나 되는 크고 작은 국제 콩쿠르들 중에서도 소위 3대 콩쿠르라고 불리는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같은 것들 말이다.

올림픽보다 더 긴 주기로 열리는 그런 콩쿠르엔 정말 괴물들만 모인다.

일생에 몇 번 주어지지 않은 기회를 붙잡기 위해 17세 이상 30세 미만의 수많은 천재 연주자들이 모여든다.

그곳에 나간다 한들, 고배를 마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내가 해야 할 말은 명확했다.

“간단하진 않지만,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하하하. 좋다.”

“……말은 잘하는군.”

구세프 선생님은 투덜거리며 말씀하셨지만, 내가 2년 후에는 콩쿠르에 나가겠다는 말에 조금 편해지신 듯했다.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해라. 네가 콩쿠르 상금에 목매야 하는 처지도 아니고…… 배가 불렀다고 하자니 참…….”

“꼭 그래서인 건 아니에요.”

“타티아나. 이건 딱히 훈계하려는 게 아니니 그냥 알아만 둬라. 세상엔 상금을 받아 학비와 월세를 내기 위해 콩쿠르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돈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난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도 있어요. 구세프 선생님.”

“……?”

죄송한 일이지만 난 구세프 선생님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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