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40화 (140/1,277)

##  140화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받았다.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 두 선생님의 지도 방법은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산길을 가겠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단지 앞에 놓인 돌부리 등 장애물에 대해서 지도해 주셨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잘 닦인 도로가 있다면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지도하시는 편이었다.

두 분의 관점 모두 내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밖에 해 볼 만한 활동이라면…… 자선 연주회 같은 것도 괜찮겠구나. 넌 관심 있어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타티아나.”

“자선…… 연주회요?”

“그래. 뜻 있는 학생들을 모아서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물론 학생들이 티켓 파워가 있을 리 만무하니 학교의 이름을 빌려야겠지만, 네가 하겠다면 그쪽은 내가 손써 줄 수 있다.”

“…….”

미하일 선생님에겐 산길을 가더라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바닥만을 내려다보며 걷는다면 삶이 짜증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설령 스스로 택한 길이라도 그건 굉장히 피로한 일이다.

하지만 잠시라도 고개를 들어 본다면 그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가득 있음을, 내가 아는 세상과 방식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함을 종종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선 연주회 같은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듣자마자 하고 싶어졌다.

“관심…… 있어요. 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할 것 같더구나.”

“그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죠?”

“좋은 일이지.”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내뿜으시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경력도 나쁘지 않지. 네 말마따나 좋은 일이고. 하지만 되도록 네 시간은 유용하게 써라. 이왕 한다면 협주를 자주 하는 게 나을 게다.”

“협주 말씀이신가요?”

“그래. 타티아나 넌 독주곡 레퍼토리는 기가 막힐 정도로 넓지만 협주곡은 그리 넓지 않지?”

“……예. 그래요.”

“그건 별로 좋은 게 아니다.”

클래식은 유럽에서 넘어온 것이지만, 나라별로 문화 차이가 조금 있었다.

그리고 내가 피아노의 기틀을 닦은 한국의 클래식 문화는 협주보단 독주에 능한 연주자를 키우는 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협주를 중시하는 유럽의 문화에선 정말 치명적인 약점이다.

구세프 선생님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네가 2년 후에 콩쿠르에 나가게 된다면,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큰 콩쿠르의 본선 파이널은 거의 협주곡이다. 지금까지 넌 그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만, 멀리 보고 네가 좋은 결과를 내자고 한다면 협주곡도 많이 공부하고, 잦은 연습을 가지는 게 좋을 거다.”

“……아.”

정확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부족한 부분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꿰뚫어 보시고 있었다.

3대 콩쿠르인 쇼팽 콩쿠르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도 모두 본선 무대는 협주곡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난 상대적으로 협주곡이 약하다.

어차피 2년간 콩쿠르에 안 나가면서 다른 활동을 할 것이라면 협주곡 연습에 신경을 더 쓰라는 것은 정말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언이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지?”

“예, 구세프 선생님.”

“그래. 특히 이건 혼자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으론 한계가 있으니, 아예 시간을 만들기로 했을 때, 자주 협연 기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타티아나. 이에 대해 계획 같은 건 있나?”

“그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난 지금까지 나 하나도 건사하기 버거워했으며, 오로지 피아노 실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일대일로 피아노를 마주 보고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낼 수 있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협연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때였다.

내 실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부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 늦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협연 기회가 있긴 해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콰르텟이나 퀸텟 같은 실내악 말고 피아노 협주곡 말이다, 타티아나.”

“작은 것부터 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큰 오케스트라와 협연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적응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었다.

협주에도 높은 비중을 두고 제대로 경험을 쌓아 나가려면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작은 것부터?”

“예. 우선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기회를 얻었으니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처럼 경험이 일천한 학생과 협연을 하고 싶어 할 오케스트라는 없지 않을까요?”

“왜 없나?”

구세프 선생님은 날 보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키셨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하시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처럼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오케스트라와 협연 경력이 있는 재능 있는 연주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는 규모가 크고 움직이기가 상당히 어렵다.

규모가 큰 에이전시에 내가 속해 있다면 오케스트라를 구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소속된 에이전시가 없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자 쪽에서 구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간단하게, 돈을 주고 오케스트라를 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금액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런 방법으로 협연을 자주 하긴 힘들다.

“…….”

그렇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은 일반적인 연주자들과 조금 다르다.

막말로, 정말 필요하다면 전속 오케스트라를 상주시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지 비용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겠지만, 아버지는 가볍게 베르체노프 오케스트라? 그것 참 괜찮군? 하고 허락해 버리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굳이 그 이야기를 안 한 것은 그간 지내면서 내 성격에 대해 얼마간은 파악하셨기 때문이리라.

사실 아버지가 오케스트라를 하나 인수해 버리시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난 거기에 대해선 반대하고 싶었다.

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에서조차 엄청난 수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만이 아니라 단순히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붙어 다니는 경호 인력에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립하겠다고 집을 나와 버릴 수도 없었다.

난 이 따뜻함을 다시 걷어차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느끼는 부담은 감사로 응해야 할 부분이었지, 거부해야 할 부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도 보답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난 정도를 지나쳐 아버지의 금권을 내 것처럼 휘두르는 것에 있어선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이중적이고, 언젠가 물러져 버릴 거부감일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그렇게까지 해서 지원을 받는 것은 죄스러운 심정이 앞섰다.

난 편한 마음으로 당연하다는 듯 모든 것을 내 것이라 여길 수 없는 것이다.

“…….”

여하튼, 솔리스트로 교육받은 내가 독주에 비해 협주에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2년간 골방에서 피아노만 붙잡고 씨름하는 것 말고 보다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협연 기회를 많이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우승이라는 경력은 나쁘지 않은 경력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할 만한 연주자라는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실내악도 성공적으로 하게 된다면 이후에 기회를 더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날 잠자코 지켜보시던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타티아나. 하나만 묻자. 정말 협주곡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있어요.”

“많이는 아니지만 더 어려서 한 적은 있나 보군.”

구세프 선생님은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셨고 미하일 선생님은 날 말없이 바라보셨다.

내 과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두 선생님은 깊게 묻지 않는다.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아는 미하일 선생님은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아니 묻지 않고, 구세프 선생님은 과거 일이 어떻든, 사사했던 선생이 누구든 간에 지금 앞에 있는 나만을 보려는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언가 확인하시더니 말했다.

“……어쨌든, 협주곡 공부도 열심히 해 놔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

“오케스트라라면 몇 군데 부탁해 볼 만한 곳이 있으니, 준비가 된다면 차차 협연 경험도 만들어 나가도록 하자.”

너무 놀라서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에르네스트 녀석에게 해라. 내가 재차 부탁이라도 할 수 있는 건 그 녀석이 이전에 잘했었기 때문이니까.”

이전에도 구세프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협연 기회를 안겨 주기 위해 오케스트라에 부탁을 한 적이 있으신 듯하다.

“그렇게 보지 마라. 별것 아니니까.”

“…….”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그래도 정식으로 담당도 아닌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 감동스럽다.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타티아나. 바빠지겠구나.”

“선생님들 덕분이에요.”

“바빠지겠다는데 너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어이가 없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하지만 나와 미하일 선생님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 피식 웃고 마셨다.

난 이 두 분이 내 곁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감사를 느꼈다.

***

8학년 2학기 첫 주, 금요일 일과가 끝났다.

혼자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다가, 귀가하기 위해 나오던 와중 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스마트폰 액정화면엔 베로니카 이바노브나라는 발신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주말쯤 모스크바에서 음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었는데, 그것에 관한 전화인 것 같다.

“타티아나입니다.”

-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베로니카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통화 가능한가요?

“예. 괜찮아요.”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대답하자 베로니카가 물었다.

- 개학은 하셨나요?

“예. 지금도 학교예요.”

- 이야, 그렇군요.

근황을 조금 묻고는, 본론을 이야기해 온다.

- 다름이 아니라, 혹시,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주말에 한 번 뵐 수 있을까 싶어 전화드렸습니다.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음? 바로 승낙하시네요?

“예?”

그럼 튕기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인가?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무슨 소린지 몰라 되묻자 베로니카가 넌지시 말했다.

- 구세프 바실리예비치에게 사사하고 계시죠?

“예, 그래요.”

공식적으로는 미하일 선생님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베로니카 과장님은 설명을 이었다.

- 이틀 전,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그러곤 저희 프로젝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죠. 하지만 전화로는 한계가 있고…… 솔직히 말해 주말에 선생님도 함께 모시는 게 낫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진짜 전화를 하신 모양이다.

어제 뵈었을 때 음반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함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하셨던 것은 전화로 물어볼 만큼 물어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난 웃음을 머금었다. 그 와중에도 전화를 했다는 것은 내게 전혀 말하지 않으셨다는 게 구세프 선생님답다.

“허락은 받았어요. 전화를 하신 줄은 몰랐지만요.”

- 아, 그런가요? 함께 오시진 않으시나요?

동행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셨다면 아마 구세프 선생님 본인이, 아니라면 미하일 선생님이라도 함께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냥 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굳이 선생님들이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판단을 하신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했다.

지금 구세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본들 퉁명스레 맘대로 하라고 하실 것이 분명하다. 난 웃으며 말했다.

“아마 거절하실 거예요.”

- ……왜죠? 비록 전화상으로밖에 말씀을 못 나누었지만,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선생님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것 같았는데요. 직접 스튜디오를 봐야 안심하실 것 같더군요.

“아하하하, 정말요? 그러셨어요?”

- 제가 우스운 이야기를 했나요?

베로니카는 약간 당황스러워했다. 난 갑자기 웃음이 터진 이유를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히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에겐 나중에 제가 전화를 드려 봐야겠네요.”

- 혼자 오시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아마 보호자로 오빠가 함께 가 줄 거예요.”

- 그러시군요.

사실 혼자 가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지만,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은 단지 내 느낌일 뿐이지, 루슬란 오빠가 보기엔 수상쩍기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오빠가 오든 선생님이 오든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 어쨌든, 마음 편히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일시는 내일 오후 2시쯤이 어떨까요?

“괜찮아요. 아, 그런데 휴일 아니신가요?”

토요일 출근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 놓을 테니 찾아오시면 됩니다.”

“예.”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그렇게 전화를 끊고, 곧장 루슬란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음반사에 함께 가 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당연하지. 반드시 같이 갈 테니 그렇게 알아.

“고마워요.”

- 나야말로.

“……오빠가 왜요?”

귀찮을 텐데도 같이 가 준다면 내가 고맙지 왜 오빠가 고마운지 잘 모르겠다.

루슬란 오빠는 잠시간 말이 없더니, 머쓱하게 말했다.

- 저번에 호텔에서 음반사 사장을 만날 땐 날 먼저 부르지 않았잖아.

“아…….”

- 이번에도 안 불렀으면 진짜 화냈을 거야.

내가 루슬란 오빠를 보호자로 여기는 것에 대해, 오빠는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