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차량으로 40분가량,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스튜디오는 모스크바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나와 루슬란 오빠는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스튜디오가 위치한 건물은 지어진 지가 꽤 되었는지 세월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허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당시 꽤 신경 써서 지은 건물인 느낌을 준다.
“들어가자.”
루슬란 오빠, 빅토르와 함께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자 에우테르페 레코즈라는 간판이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심플한 간판이지만 어쩐지 잘 어울렸다.
난 처음으로 이런 곳에 와 보는 것이었다. 조금 긴장된다.
살짝 숨을 고르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복도에 내 발소리가 울렸고, 복도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분이 날 보더니 만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또 뵙게 되어 기쁘군요.”
“안녕하세요. 베로니카 이바노브나.”
일전에 만났던 베로니카 과장이었다.
훤칠한 키의 베로니카는 내 뒤에 서 있는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를 차례로 보더니 물었다.
“두 분은?”
“타티아나의 보호자인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입니다.”
내가 소개하기 전에 루슬란 오빠가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경호원입니다.”
그리고 빅토르는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짧게 말했다.
평상시 같은 장난기 많은 모습이 아닌 딱딱한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내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닐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약간 놀란 투로 말했다.
“아…… 오빠가 두 분이신가 했는데 한 분은 경호원이시군요?”
“예.”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난데없이 빅토르를 오빠라고 불러 버리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아마 거의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상 내게 있어선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니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빅토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한번 해 봐야겠다.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베로니카가 안쪽으로 손짓했다.
“우선 들어오시죠. 프로듀서님은 마스터링 룸 안에 계시니…… 스튜디오엔 처음이신 거죠?”
“예.”
“마침 잘되었군요. 장비도 구경하시고, 일단 한번 보시죠.”
베로니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마스터링 룸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스튜디오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분명히 있었다.
특히나 음악에 관련된 장비들은 비싸기로도 유명하다. 당장 내 연습실에 있는 홈시어터 시스템만 하더라도 수백만 루블을 호가한다.
난 조금 기대하며 마스터링 룸으로 들어섰다.
“…….”
제대로 된 마스터링 룸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내 키보다 더 길어 보이는 책상 위로 가운데에는 모니터가 두 개 놓여 있었고, 그 밑으로 조작판이 네 개나 깔려 있었다.
저기에 붙어 있는 버튼이나 레버, 노브들만 천 개는 될 것 같다. 거의 무슨 우주선도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걸 다 외우고 쓰는 건지 모르겠다.
뒤편엔 알 수 없는 장비들이 몇십 개나 포개어져 있었고, 그 옆으론 전선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보였다.
스피커는 벽에 붙어 있는 것과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만 여섯 개였다.
그리고 그 스피커에선 한창 앙상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거의 어지간한 피아노곡들은 듣자마자 제목을 알아맞히곤 하지만, 이러한 앙상블은 잘 모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뇌는 자동적으로 지금 들리는 곡을 분석하고 있었다. 얼핏 듣기엔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이루어진 콰르텟인 것 같다. 그리고 이 화성 진행 방식은…… 브람스의 음악처럼 느껴진다.
브람스의 콰르텟인 걸까?
“어떻게 들립니까?”
“……?”
거대한 우주선 조종석처럼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음악을 멈췄다.
남자는 의자를 빙글 돌려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이고 굉장히 깡마른 남자였다.
날카로운 턱선과 움푹 들어간 눈이 얼핏 신경질적인 성격일 것으로 보이지만, 그 목소리는 꽤나 품위 있고 묵직했다. 상당히 신기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남자가 재차 루슬란 오빠에게 물었다.
“거기 가장 앞에 있는 청년, 방금 그 음악 어떻게 들리죠? 무언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나요?”
“……죄송합니다만.”
질문을 받은 루슬란 오빠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 음악에 문외한인 평범한 사람이라 잘 모릅니다. 전문가께서 아시는 것 이상을 제가 들었을 것 같진 않군요.”
“꼭 그렇지도 않죠.”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가 자가 제작 등으로 낸 음원을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죠. 보통은 잘 팔리는 추천 음원을 들을 테니까.”
낮게 웃더니, 남자가 이어 설명을 맺었다.
“그렇게 검증된 음원만을 듣고 소비하는 일반인들이야말로 자연스럽게 더 까다로워지기 마련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통 소비자들은 최고의 연주자 혹은 가수가 최고의 프로듀서와 함께 녹음한 음원을 듣는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에서 선택된 최고의 음악만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최고의 음반들을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 설령 클래식 애호가라 한들 뭐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단순한 실력 문제가 아닌 기술적인 문제라면 더더욱.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하시죠, 아가씨.”
내가 입을 열자 남자가 느긋하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나설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멈출 순 없었다.
“방금 건 원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이죠?”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50대의 아저씨가 보이기엔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난 꿋꿋이 말했다.
“제가 듣기엔 바이올린 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어요.”
“음?”
“바이올린의 본래 소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그저 잔향이 길게 이어진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제 귀엔 그게 길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이중으로 겹쳐서 늘어지는 것같이 들려요.”
“오호라.”
“왜 그렇게 들리는진 잘 모르겠지만요.”
난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었고, 현으로부터 생겨나는 음의 본질이라는 것을 상당 기간 파고든 적이 있었다. 때문에 현악기의 소리엔 상당히 민감한 편이었다.
그런 내가 듣기에, 방금 앙상블에서 들린 바이올린의 소리는 자연적으로 악기에서 발생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악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진 알 수 없어서 들리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남자는 상당히 놀라워하며 미소 지었다.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마이크 간의 거리가 틀어지면서 위상 변화가 생겨 변위가 흔들린 겁니다.”
“……?”
“보시죠, 녹음기술에 대해 잘 몰라도 다 캐치해 내셨지 않습니까?”
일반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녹음기술에 관련해서 보면 난 일반인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음악이라는 것을 파고드는 연주자로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나마도 내가 바이올린에 익숙한 덕이긴 했지만.
내가 남자의 다음 말을 받아 주지 않고 입을 다물자, 남자는 조금 머쓱한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건…… 녹음을 하고 간 연주자들이 지향성 마이크에 손을 댄 모양이군요. 마스터링 과정에서 조절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니, 다시 불러야겠군요. 재녹음입니다.”
중얼거리던 남자가 돌연 내 쪽을 다시 올려다보며 이제야 정식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반갑군요.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사장이자 프로듀서이자 레코딩 엔지니어인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카르카로프입니다. 시험 같은 걸 한 건 아니니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그냥 마카로프라고 불러 주시죠.”
“마카로프 사장님.”
“하하, 프로듀서가 낫겠군요. 아가씨 이름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입으로 그것을 듣자,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푹 들어간 눈이 이채를 띠었다.
“우리의 그 까다로운 조건을 뚫고 온 구세주 되시겠군요.”
“…….”
비행기 태우는 게 너무 심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약간 질린다는 눈을 한 것이 분명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하하, 농담이니 너무 그렇게 보시지 마시죠.”
물론 농담이겠지. 절대 저런 걸 진담으로 듣진 않는다.
하지만 농담 이전에, 까다로운 조건이라는 것은 조금 흥미가 있었다.
“제가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건가요?”
“허어, 설명하지 않았나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베로니카 과장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베로니카 과장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내가 뭘 통과한 거지?
한 것이라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음반 제의를 받은 것은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가 아니라, 본선 연주를 마치자마자였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손가락을 세 개 들며 말했다.
“되도록 신인일 것, 오로지 음원만을 싣는 데에 동의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남은 손가락을 서서히 접으며,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착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에 통할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
“…….”
마지막 조건에 대해선 상당히 할 말이 많았지만, 음반을 제작하겠답시고 제 발로 여기까지 와서 애먼 소리를 한들 의미 없을 것이다. 난 실없이 말했다.
“첫 번째 조건과 마지막 조건이 공존할 수 있는 건가요?”
“눈앞에 있잖아요?”
“…….”
이 아저씨 정말 말문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쿡 하고 웃었다. 그가 양팔을 넓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세계에 통한다는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이긴 하지만,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라면 충분히 세계에 통하리라 봅니다.”
그리곤 옆에 서 있던 베로니카 과장님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보다 귀가 밝은 우리 베로니카 과장이 현장에서 곧장 당신에게 접촉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본선 무대를 마치자마자 나를 찾아온 그 귀를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이야기하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뒤편으로 손짓했다. 그곳엔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모두가 앉을 순 없었고 나와 루슬란 오빠만이 앉았다. 그렇게 앉아 빅토르를 올려다보니 빅토르는 서 있는 것으로도 괜찮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조금 편한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가장 어려운건 두 번째 조건, 즉 음원만을 싣는 것에 대한 설득이었습니다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저희와 생각이 일치한다고 했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있어선 정말 서로 원하는 부분이 일치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음반 컨셉에 대해 이야기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저희가 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
지금 가장 궁금한 이야기이긴 했다.
솔직히 말해, 난 순진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지 않다. 그건 그야말로 바보나 할 기대였다.
그저 내 피아노 소리만을 음반으로 내 주겠다고 했지만, 음반사는 음반사 나름대로의 의도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단지 연주자에 대한 정보를 싣지 않겠다는 것이 내가 흥미를 가지고 협조할 만한 조건이었을 뿐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모니터 쪽으로 돌아섰다.
“일단 이 음악을 들어 보시죠.”
그러곤 마우스를 움직여 무언가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 마우스 클릭만으로 피아노 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난 알 수 있었다. 베토벤 소나타 14번. 부제는 ‘월광’.
밤의 풍경과 달빛을 묘사하는 듯한 1악장의 유려한 선율이 이 마스터링 룸에 있는 여섯 개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음향은 현과 음향판 아닌 진동판을 울려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통한 것이었지만, 상당히 현실감 있고 거대하게 다가왔다. 난 마치 피아노 연주자가 코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연주자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심심하고 재미없게 듣기 딱 좋은 월광 소나타의 1악장을 이 이름 모를 연주자는 굉장히 애틋하고 아련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연주 실력이었다.
전문 연주자들이 왜 베토벤을 어려워하는가? 피아노로 이정도 호소력 있는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자, 1악장이 끝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음악을 정지시켰다.
그러곤 내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대단……하네요.”
“대단한가요?”
“예. 이 리듬과 해석은 정말 예리하네요.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돼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망했습니다.”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몇 장이 팔리긴 했지만, 그 누구도 이런 음반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진 불과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
잔인한 목소리가 참담하게 들렸다.
난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