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43화 (143/1,277)

##  143화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는 조금 심기가 불편했다.

“여기 이 기기는 무슨 용도로 사용하시나요?”

“이전에 쓰던 이펙터죠. 사실 클래식 음반 녹음 땐 쓸 일도 없고 쓴다고 해도 컴퓨터로 합니다만.”

“쓰기도 하시나요?”

“이 스튜디오는 거의 클래식에 집중되어 있지만 퓨전 뉴에이지 음악 같은 것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전 곡을 쓰기도 하는데 미디음악에도 필요하고요.”

“아, 미디음악? 컴퓨터로 곡도 쓰세요?”

“광고 음악 정도지만요.”

“전 컴퓨터로 어떻게 음악을 만드는지 늘 궁금했어요. 큰 폐가 안 된다면 과정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생전 처음 보는 스튜디오가 신기한지 타티아나는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마카로프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꽤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한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슬란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카로프가 음반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어떤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카로프가 말하는 방법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긴 해도 참신하긴 했다.

하지만 그 뒤엔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현재 자신을 남겨 놓고 싶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화려한 음반엔 전혀 관심이 없다며 이상한 말을 했고, 그걸 듣고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영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노라 답했다.

솔직히 둘 다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마카로프는 그렇게 암호 같은 말들로 의사를 교환하곤, 서로의 입장도 나이 차도 잊고 완전히 의기투합한 듯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타티아나.”

“예?”

가만히 부르자 타티아나가 루슬란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해 있다. 평소 동생이 이렇게 웃는 법이 잘 없다는 것을 아는 루슬란은 할 말이 없어졌다.

타티아나가 물었다.

“부르셨나요?”

루슬란은 너무 들뜬 그녀의 기분을 조금 가라앉히려다가,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루슬란이 말했다.

“오늘 계약서 쓸까?”

“……아.”

타티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이 스튜디오에 온 목적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디까지나 음반 계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신나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카로프는 아무래도 괜찮다며 말했다.

“하하, 너무 급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제안하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받아들인 일이지만, 되도록 신중하고 차분하게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오늘은 견학을 위주로 하도록 하시죠.”

학생이라고 한다면 루슬란도 타티아나도 학생이었다. 마카로프는 비지니스 파트너가 아닌 학생으로서 스튜디오에 이 두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실제 녹음을 진행하는 메인 부스도 보시겠습니까?”

루슬란의 눈치를 보며 우물거리던 타티아나가 곧바로 반응했다.

“예! 보고 싶어요.”

“좋습니다. 따라오시죠.”

마카로프가 문을 열어 준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메인 부스라고 한 만큼, 실질적인 녹음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방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울퉁불퉁하게 각이 져 있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굉장히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카로프가 설명했다.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메인 부스지요. 저편에 있는 유리 너머의 방은 메인 컨트롤 룸이고요.”

“마이크가 많네요?”

타티아나의 질문처럼 방 안에는 대충 보이는 마이크만 다섯 개가 넘었다. 모두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굉장히 묵직해 보이는 크기를 가지고도 천장에 달려 있었고, 어떤 것은 스탠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중 천장에 달린 마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큰 마이크가 메인 마이크고, 나머지는 각 악기들에게 부여된 보조 마이크들입니다.”

“녹음은 모두 따로 하는 건가요?”

“엠비언스를 살려 총체적인 음향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메인 마이크 하나로는 제대로 된 녹음을 하기 힘듭니다.”

“……?”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카로프가 부연 설명을 이었다.

“음…… 혹시 느껴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좋은 헤드셋이나 스피커로 눈을 감고 음악을 들어 보시면 마치 눈앞에 오케스트라가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아, 예. 있어요. 악기들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씀이시죠?”

“예. 그걸 정위감이라고 합니다. 보통 리시버의 성능에 많은 영향을 받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위감을 살려 놓기 위해선 녹음 자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죠.”

마카로프는 손을 뻗어 스테이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저 마이크들이 다 대충 놓여 있지만, 악기들이 들어온다면 다시 새로이 세팅됩니다. 직접음과 반사음의 레벨을 고려해 세션의 위치를 정하곤, 악기의 종류에 따라 마이크의 종류도 바꾸고, 마이크의 위치와 각도도 조정해서 각 마이크에 소리가 닿는 시간 차도 고려해야 하지요. 그게 레코딩 엔지니어인 제 일이기도 하고요.”

듣기만 해도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이야기였다. 루슬란은 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마카로프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카로프가 타티아나를 향해 말했다.

“음악이 시간예술이라면 그 시간을 붙잡아 놓는 녹음 작업은 일종의 공간예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군요. 위상의 예술이죠. 이 스테이지의 그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부피를 가지고 세상에 존재한다. 그것을 붙잡아 기록하기 위한 인간의 기술은 눈으로 보기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세심했다. 그야말로 공간예술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새삼 주변을 둘러보며, 저 각진 벽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던 루슬란이 문득 중얼거렸다.

“어렵군.”

“너무 어려울 건 없어요.”

옆에 서 있던 베로니카가 대답했다. 루슬란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베로니카가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소리라는 것도 결국엔 물리학이니 다 수학의 하나일 뿐이죠.”

그게 어렵다는 건데.

루슬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베로니카가 이어 말했다.

“그래도 조금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저기 있는 메인 마이크 보이시죠?”

“보이는군요.”

“저게 150만 루블짜리 장비랍니다.”

“……어마어마하군요.”

“그것도 지금 사려고 하면 두 배는 줘야 할 거예요.”

루슬란은 음악도 과학도 잘 모르지만 150만 루블이라면 어지간한 자동차 한 대 값이었다.

베르체노프의 후계자로 교육받으면서 수천 수억의 단위에도 익숙한 루슬란도 저 마이크 하나가 백만 루블이 넘는다는 사실엔 조금 질렸다. 이곳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재벌 2세도 기겁하게 만든 이 부스를 보며, 타티아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더 대단한 것을 보여 드리죠.”

마카로프는 다시 복도로 나왔고, 그 옆의 방문을 열었다.

“이곳이 싱글 부스입니다.”

“…….”

루슬란은 할 말을 잊었다.

공간예술이라는 말은 바로 이 싱글 부스에 써야 할 말인 것 같았다.

거대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방은 한눈에 보더라도 오로지 피아노 한 대를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어떠한 음향적 효과를 위해 여러 방향으로 각이 져 있는 벽은 물론이고, 심지어 천장은 공사를 따로 했는지 위로 솟아 있고, 각 벽 모서리엔 기하학적인 구조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어떠한 마법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마법은 피아노에서 튀어나온 소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다닐지 나타내 주는 마법일 것이다.

그리고 소리들이 뛰노는 광경은 피아노의 현 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마이크 두 개와 천장에서 내려오는 마이크 두 개, 총 네 개의 마이크에 의해 기록된다.

“세상에…….”

타티아나는 감동한 눈빛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마카로프는 그런 타티아나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세계의 그 어떤 스튜디오와 비교해도 지지 않으리라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타티아나는 양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움찔거리며 마카로프를 돌아보았다.

“저기…… 마카로프 프로듀서. 부탁이 있어요.”

“뭔지 알 것 같군요.”

마카로프는 질문을 듣지도 않고 흔쾌히 말했다. 그리고 반걸음 비켜섰다.

“앉아 보시죠.”

“…….”

타티아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부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그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긴장을 표정에 나타냈다.

하지만 작게 심호흡을 한 타티아나는 루슬란과 마카로프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렇게 대단한 것을 보여 주셨으니…… 저도 무언가 보여 드려야 하는 게 맞겠죠?”

루슬란이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이 부스는 대단했다.

마카로프가 사장이자 프로듀서이자 레코딩 엔지니어로서 무엇을 갖추고 있는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이번엔 타티아나의 차례였다.

마카로프가 말했다.

“나갑시다.”

“예?”

“여기에 있으면 제대로 감상을 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마카로프는 곧장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루슬란과 빅토르는 멍하니 서 있다가 남아 있는 베로니카를 돌아보았다. 베로니카가 모자란 설명을 이었다.

“이 방은 오로지 레코딩만을 위해 준비된 부스예요. 옆에 앉아서 감상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죠.”

루슬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베로니카를 따라 일어섰다. 나가기 직전,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타티아나가 들어가 있는 싱글 부스 옆에 있는 메인 컨트롤 룸에 루슬란이 들어서자 무언가 장비들을 조작하고 있는 마카로프가 보였다.

꺼져 있던 전원을 켜고, 다이얼을 돌려 무언가를 조정하는 등 분주했다.

하지만 숙련된 레코딩 엔지니어인 마카로프는 그 작업을 금방 마무리 지었고, 곧 컨트롤 룸에 있는 마이크로 말했다.

“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보여 주시죠.”

잠시 침묵이 있고, 타티아나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네 개의 마이크로 녹음된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가 컨트롤 룸에 있는 모니터에 파형을 그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피아노 소리가 그대로 재생되었다.

실제로 듣는 피아노 소리와는 다르다. 스피커로 듣는 소리는 결국 한차례 변화된 소리고,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방식도 달랐다. 그것이 피아노 소리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리에 그렇게까지 민감하지 않은 루슬란은 금세 음악에 빠져들었다.

루슬란은 클래식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래도 지금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선율은 아주 익숙하게 들렸다. 현대에도 수많은 매체들에서 자주 들리는 음악이었다.

그 제목은 사랑의 기쁨.

오스트리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작품 중 하나였다.

타티아나는 그것의 피아노 편곡 버전을 연주하고 있었다.

“…….”

귓가에서 사랑스럽게 노래하는 듯한 선율이 반복되며 간질거렸다.

느릿하지도, 과격하지도 않게 찬란하게 반짝이는 음악이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그 상냥한 따뜻함은,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도 느긋한 웃음이 절로 입가에 떠오를 정도로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꾸밈음이 화려하게 겹쳐지면서 선율을 더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타티아나는 너무나 쉽게 건반을 어루만지며 노래해 나갔다.

그 어떤 우울과 분노도 이 음악 앞에선 힘을 잃고 스러질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연주는 마력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잠시 후, 연주가 마무리되고, 그제야 컨트롤 룸 안의 사람들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모니터에 기록되어 있는 타티아나의 음악의 형태를 지켜보던 마카로프가 중얼거렸다.

“마이크와 스피커로 저 연주를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입니까?”

루슬란이 물었다. 마카로프는 웃으며 말했다.

“열다섯…… 나이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저 음악을 온전히 담아낼 수만 있다면 절대로 음반이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그녀와의 음반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그 잘못은 온전히 저희에게 있겠군요.”

한술 더 뜨는 그 말에 루슬란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극찬도 이 정도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마카로프가 이어 말했다.

“음악을 담아내는 것에 평생을 걸었고, 기술과 장비에 아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결국 제가 하는 일은 얼마나 진짜와 비슷한 복제품을 만들어 내느냐에 관한 일이죠.”

피아노로 내는 소리와 스피커로 내는 소리가 같을 순 없다. 그건 물리적인 문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이 음반업자들이다.

마카로프가 킬킬거렸다.

“그리고 세상엔 복제하기 쉬운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시 타티아나가 있는 부스를 바라보는 그 눈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타고났군요. 음반보다 무대 위에서야말로 정말 빛이 날 연주자입니다. 기술의 한계를 느낍니다.”

150만 루블짜리 마이크를 쓰고, 그보다 훨씬 비쌀 장비들로 스튜디오를 꾸며 놓고도 마카로프는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체념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수십 년간 이 스튜디오에 목숨을 걸어 온 한 예술가가 힘 있는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지금 저 음악 그대로 영원토록,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루슬란은 진지하게 빛나는 마카로프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타티아나와 마카로프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진지함임을, 단 한 순간도 농담 같은 것은 없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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