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44화 (144/1,277)

##  144화

차에 오르는 내 손엔 종이백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 안엔 에우테르페 레코즈에서 받아 온 선물이 들어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타티아나.”

“그렇게 보이시나요?”

“그래.”

난 오늘 얻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이백에서 음반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즉석에서 제작해서 선물한 오늘의 음반이었다.

연주를 녹음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고, 최근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DVD 오디션에 보낼 DVD를 녹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연습실에서 미하일 선생님과 함께 캠코더로 찍은 것에 불과했다.

기묘하게 생긴 벽의 모양 하나까지도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전문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을 해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오늘 계약을 해 버려도 괜찮았을 텐데.”

싱글벙글 좋아하는 날 보며 루슬란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루슬란 오빠는 처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더니,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그 후엔 내 의사를 완전히 존중해 주고 있었다.

난 루슬란 오빠가 날 위해 음반사를 인수해 버릴 수도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스튜디오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인수하고 싶다고 했다면, 루슬란 오빠는 그대로 들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나대로 생각이 조금 있었다.

“일단 선생님들께 이걸 들려 드리고, 다시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해요.”

내 말에 루슬란 오빠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예.”

원래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음반을 진행하든 아니면 거절하든 결정을 내리려 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어 보니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것은 수십 년간 음반계에 업을 두고 살아온 한 프로듀서의 고집 어린 도전장이었다.

이 중대한 프로젝트에 열다섯밖에 안 된 날 동행시켰다는 건 조금 의문스럽지만 나 역시 평소 음반업계와 연주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많았고, 더더욱 모험에 동참해 보고 싶었다.

이미 마음은 진행하는 쪽으로 거의 기울어 있었다. 꼭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도 있었다.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검증 정도는 받아 보고 진행을 하고 싶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사장으로서 상당히 도전적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프로젝트잖아요? 제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믿는 선생님들이 듣고도 세상에 내놓아도 괜찮겠다고 말씀해 주신다면, 주저 없이 계획을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내 말을 듣더니 유심히 날 바라보았다.

“그렇게 신중한 건 좋은 태도이지만…….”

조용히 말하던 루슬란 오빠는 말을 맺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의아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자 루슬란 오빠가 말을 돌렸다.

“어쨌든 타티아나. 오늘 이 이후로 계획 없지?”

“계획이요?”

굳이 계획이 있다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난 일단 집에 돌아가면 바로 별관의 연습실에 가서, 방금 녹음 부스에서 피아노를 치고 모니터링하면서 느꼈던 부분들을 다시 세심하게 연구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곧장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루슬란 오빠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그렇게 말해선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없어요.”

“그럼 잠깐 나랑 어울려 줄래.”

어렴풋이 루슬란 오빠가 이런 말을 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조금 놀라웠다.

루슬란 오빠 역시 스스로가 조금 어색한지 내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혼자 가기는 싫고…… 때마침 너랑 밖에 나왔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

“그리고 개학도 했잖아? 새 옷도 좀 사려는데 봐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옷이요?”

난 조금 난색을 표했다.

영화뿐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하지만 옷을 봐 달라는 건 굉장히 곤란한 이야기였다.

난 루슬란 오빠가 원한다면 뭐든 해 줄 의향이 있었지만, 옷에 관한 것은 좋고 싫고를 떠나서 내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루슬란 오빠를 패션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얼굴을 달리 읽었는지, 루슬란 오빠가 힘없이 말했다.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그건 아닌데.

“아뇨, 좋아요.”

“응?”

“같이 가요.”

여행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루슬란 오빠와 일주일 내내 붙어 다녔지만, 이곳 모스크바에서 함께 시내로 나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 같이 나와서 영화 보는 건 처음이죠?”

“그……렇지.”

“괜찮겠네요.”

루슬란 오빠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나 역시 웃어 보였다.

갑자기 영화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루슬란 오빠와의 외출을 조금 더 이어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

루슬란 오빠를 너무 과대평가 한 것 같다.

“…….”

“자, 타티아나.”

나와 루슬란 오빠는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선 영화관 밖의 카페에 나와 있었다.

오빠가 건네는 주스를 보면서도 난 손을 뻗지 않고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 좋은 분위기에 공포 영화를 예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루슬란 오빠와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난 오빠가 보고 싶었다는 영화가 뭔진 모르겠지만 나랑 같이 보아도 상관없을 영화라 생각했다. 그래서 믿고 맡겼다.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오빠는 난데없이 공포 영화를 예매했다. 난 공포 영화 같은 것을 돈을 주고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가 어르고 달래고 심지어 반 협박까지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었지?”

“…….”

애가 따로 없다.

정말 한 대만 때려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최악이었어요.”

난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영화는 정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냥 으스스하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갑자기 그로테스크한 유령 같은 게 툭 튀어나와서 사람 놀라게 하는 공포영화였다.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러시아 영화관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더빙판이었는데, 성우의 목소리가 너무 위기감이 없이 동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긴장감도 없이 평이한 연극 투로 대사를 이어 나가다가 말고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와서 놀래켜 버리니 보는 내내 짜증만 났다.

이런 걸 상영해도 되는 건가? 불법 아닌가?

루슬란 오빠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엄청 즐기는 것 같던데.”

“뭘 즐기나요?”

“엄청 놀라지 않았어?”

“별로요.”

“창피해할 것 없어. 원래 공포영화는 그렇게 놀라는 재미로 보는 거니까.”

“…….”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처음 같이 영화를 보자고 권유해 올 땐 그렇게나 조심스러워했으면서, 내가 정말로 토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거 마시고…… 옆에 있는 백화점에도 좀 들르자. 옷 좀 사게.”

“옷……이요?”

난 이번에야 말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루슬란 오빠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 나도 필요하고, 너 역시 사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냐?”

“……교복이 있어서 괜찮아요.”

“너희 학교 교복이 예쁘긴 하지, 하지만 오늘같이 휴일에 외출할 때라도 입을 게 필요하잖아.”

“이미 충분히 많아요…….”

“나제즈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

아무래도 나제즈다가 루슬란 오빠에게 무슨 말을 한 것 같다. 난 이해가 안 갔다. 내 옷장만 두 개인데 입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제즈다는?

하지만 나보단 나제즈다의 판단이 믿을 만했다. 여전히 난 패션 감각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끝장나 버린 감각을 되살리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오빠는 옷 잘 입으시나요?”

“글쎄, 네가 보기엔 어떤데?”

루슬란 오빠는 약간 기대 어린 눈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니,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혹시 제 옷을 골라 주실…….”

말을 하다가 말고, 난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내가 스스로의 감식안에 믿음이 없어도 그렇지, 적어도 다섯 살이나 많은 오빠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돌연 눈을 빛냈다. 갑자기 목소리 톤 자체가 돌변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못 골라 줄 것도 없지.”

“저기…….”

“당분간 주말 외출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해 줄게. 옷장도 더 사자, 아예.”

“……아뇨, 전 그냥 나중에 아나스타샤와 함께…….”

“아나스타샤? 지금 부르지 그래?”

“……?”

“걱정 마. 오늘 블랙카드 가지고 왔으니까.”

뭘 도대체 얼마나 사려는 거야?

아예 아나스타샤의 옷까지 다 사 주려는 듯한 말이었다. 난 그건 결사반대하고 싶었다.

“오늘은 아나스타샤도 일이 있어서 안 돼요.”

“그럼 네 것만 사지 뭐.”

“제 것만요? 원래 목적은 오빠 옷 아니었어요?”

“내 건 대충 사면 돼. 중요한 건 네 것이지.”

갑자기 왜 이렇게 나한테 옷을 못 사 줘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오빠, 잠시만요. 진정하시고…….”

“진정이라니? 난 진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차분하게 말했다.

“루슬란 오빠. 전 옷장을 몇 개나 채울 만한 옷이라든가……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전…….”

“그럼 어떻게 해?”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지금 루슬란 오빠는 꼭 내게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루슬란 오빠를 올려다보자, 오빠는 주춤하며 말실수했다는 듯한 얼굴을 짓더니, 곧 조용히 말했다.

“미안, 따지려는 건 아냐.”

“……알아요.”

“있잖아,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가 조금 서글프게 말했다.

“난 오늘 네가 하는 말을 반도 못 알아들었어. 웃기지?”

“…….”

“네가 관심 있어 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만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할 거야. 하지만 그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고작이잖아?”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음악에 대해 루슬란 오빠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난 오빠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었다.

오빠는 조금 다른 듯했다. 마치 의무적으로 무언가 해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작이라뇨 무슨 말씀을…….”

“그 고작 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줘.”

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값진지 알고 있다고 재차 말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오빠를 보며, 난 짓궂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공포 영화는 실수였어요. 그건 정말 최악이에요.”

“그건 솔직히 내 욕심이었어.”

“전 그리 놀릴 재미가 있는 사람은 아닐 텐데요.”

“아니,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네 반응이 얼마나 재미있…….”

“…….”

눈을 흘기며 노려보자 오빠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재미있어 해 주셔서 고마워요.”

“다신 안 그럴게.”

사과하는 루슬란 오빠를 보며 난 어쩔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고, 그 거리는 모스크바에 왔다고 해서 다시 멀어질 거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온 뒤로 루슬란 오빠는 다시금 위기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오늘 스튜디오에선 소외감마저 조금 느꼈는지, 다른 방면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낸 듯했다.

난 그렇게 노력하는 루슬란 오빠가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루슬란 오빠.”

“그래.”

“오빠와 함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무언가 잘못되진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루슬란 오빠는 깊은 내심을 들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쓰게 웃었다.

루슬란 오빠와는 이미 한 번 잘못되어 본 적이 있는 사이였다. 기억이 없는 나는 비교적 편하게 루슬란 오빠를 대할 수 있었지만,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다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루슬란 오빠는 아직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무감을 지닌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못났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책임. 심지어 내가 해야 할 몫은 두 배이기까지 했다.

힘겹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에 있어선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제가 못 미덥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약속드릴게요. 괜찮을 거라고.”

“……그래도 클래식은 조금 들어 보려고.”

“환영할 일이네요.”

루슬란 오빠에게 추천해 줄 만한 음반을 몇 개 골라 놔야 할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