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별관의 연습실에서 의자에 편안히 앉은 채 홈시어터로 음악을 들었다.
벨카는 구석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다. 늦은 저녁, 음악 감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풍경이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은 느긋함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손에 들린 악보를 해석하느라 내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로는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악보를 보면서 선율의 진행과 전체적인 흐름, 세부적으로는 내성부의 구조와 지시표 등 모든 것을 읽어 내야 했다.
“…….”
지금 틀어 놓은 곡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858년에 스물여섯 살의 젊은 브람스가 처음으로 관현악을 도입하여 쓴 곡이었다.
난 음악을 들으며 동시에 악보를 읽어 나갔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피아노 파트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현악 파트들도 유심히 보았다.
잠시간 그렇게 악보를 읽다가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정지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스피커가 멈추자 곧 적막이 찾아왔다.
난 피아노 앞에 앉아 보면대 위에 악보를 올려놓았다. 숨을 고르며 방금 들었던 음악을 떠올렸다.
작곡은 기본적으로 수학이었고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은 일련의 규칙성과 원리를 기반에 두고 만들어지고 있다.
퍼즐을 맞추는 요령과 비슷했다.
조각이 몇 개든, 모양이 어떻든 상관없이 퍼즐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틀린 부분 없이 완벽하게 맞추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퍼즐을 앞에 둔 사람은 바로 그것을 믿고 퍼즐 맞추기에 임하는 것이다.
한 곡을 익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부분을 다 맞추면 하나의 음악이 완성된다.
음악 이론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전제로 두고 익힌다면 보다 쉽게 머릿속에 음표의 나열이 아닌 하나의 음악을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협주곡은 조금 달랐다.
본래 오케스트라와 함께해야 하는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의 도움 없이 피아노 한 대만을 놓고 피아노 파트만을 연습하는 것은, 거대한 완성된 그림을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퍼즐만을 끼워 맞추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연속되지 못하는 피아노 파트의 프레이즈에만 집중해서 부분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기존 내 방식과 비교하면 조금 단순암기에 가까운, 괴로운 일이었다.
“…….”
그래서 난 다른 방법을 찾아내었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장을 펴니 피아노 파트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오케스트라로 시작되는 곡이다.
눈앞에 오케스트라를 떠올렸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플룻, 클라리넷, 오보에, 호른, 트럼펫, 바순, 팀파니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다.
서른 명이 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이 협주곡의 시작을 연다.
“라, 아아. 아아.”
입을 열어 오케스트라를 따라 허밍했다. 호른이나 첼로 소리를 인간이 똑같이 낼 수는 없기에 그저 선율에 맞춰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케스트라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이 피아노 협주곡을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음악으로서 만들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음대에서 협주곡을 시험 볼 때는 마이너스 오케스트라로 피아노를 두 대 놓고 한 대가 오케스트라를 담당하기도 한다.
난 목소리로 그 도움을 대신하고 있었다.
1악장의 악장지시는 마에스토소 장엄하게.
내 목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장엄하게 듣기 힘들다. 목소리를 아무리 깔아도 소용없었기에 선율만을 흥얼거렸다.
이 협주곡은 브람스의 지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으로 자살기도를 한 후에, 브람스가 작곡한 곡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세심하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혼연일체가 되는 듯한 느낌은 아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은 마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먹을 주고받는 듯한 협주곡이었다.
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입으로는 허밍하면서 그 구조를 그려 나갔다.
물론 이런 연습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파트에도 신경을 쏟다 보니 가끔은 헷갈려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다른 악기의 파트로 손이 올라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악기 부분을 자꾸 피아노로 치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와 대등하게 싸워도 될 정도로 거대한 악기였다.
사실 하고자 한다면 아예 이 협주곡 자체를 피아노 솔로 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할 수도 있었다.
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피아노 솔로로 편곡해서 연주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말마따나 대형 국제 콩쿠르들의 결승전은 모두 피아노 협주곡이다.
독주곡으로 최종 우승자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난 솔리스트로서의 역량을 더욱 끌어 올리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할 수 있는 협연자로서의 역량을 쌓아 올리는 것 역시 중요하게 여겨야 했다.
“라, 라아.”
난 잠시 악보를 다시 읽느라 멈췄던 연주를 재개했다. 자연스레 허밍이 동행했다.
***
2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추웠지만 미처 추위를 신경 쓸 틈도 없을 정도로 8학년 2학기는 바쁘게 흘러갔다.
학교에서 주어지는 과제 곡들을 매일같이 연습해야 했고, 내 개인 레퍼토리들도 다듬어야 했으며 그와 동시에 협주곡의 공부도 병행해 나갔다.
음반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내 하루 연습 시간은 이전보다 더 늘어났다.
거기에다가 한 단계 더 수준이 올라간 일반교과 공부에도 충실해야 했다.
“…….”
어제 한 숙제가 어디 있지?
난 수학 수업을 앞두고 교과서를 꺼내다가, 숙제를 한 노트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고 다시 가방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무고한 내 가방이 노트를 뱉어 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으.”
한숨이 절로 나온다.
혹여나 칠칠맞단 평을 들을까 싶어 지금껏 학교를 다니면서도 늘 꼼꼼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이런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간 해 온 행실이 있으니 솔직하게 집에 두고 왔다고 한다면 크게 혼이 나진 않겠지만…….
아, 모르겠다. 수학 선생님이 날 죽이겠다 하시면 그냥 죽어 드릴 생각이다.
“으으으…….”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책상 앞으로 늘어지니 온몸에 피로가 엄습해 온다. 나도 모르게 볼품없이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늘어져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날 불렀다.
“저기…….”
“?”
고개를 들자 밤색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보였다. 같은 반 친구인 라리사였다.
난 급히 자세를 바로하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라리사.”
라리사는 방금 본 내 추태를 못 본 걸로 해 주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반 밖에 널 불러 달라는 애가 있어서…… 아나톨리라는 이름이라던데, 아는 애니……?”
“아나톨리요?”
당연히 안다. 난 목을 빼고 교실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뒷문 쪽엔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귀여워라…… 우리 친구는 몇 학년?”
“타티아나 동생이니?”
“이 숨 막히는 반에 갑자기 활력이 도네.”
“나도 저땐 참 좋았는데…….”
음…… 뭔가 열다섯 살들에게서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빨리 구해 줘야겠다.
“전해 주셔서 고마워요, 라리사.”
“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수줍음이 많은 라리사는 그렇게 고개를 저었고, 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문 쪽으로 향하며 아나톨리의 이름을 불렀다.
“아나톨리.”
“타티아나 누나!”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던 아나톨리가 날 보더니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친구들 역시 흥미진진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동생이니? 타티아나.”
“바이올린과 후배예요.”
“바이올린과?”
가감 없이 대답하자 의외라는 듯 말한다.
“타과에 그것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과 어떻게 접점이 있을 수가 있지……? 난 아직도 전혀…….”
“이전에 알던 사이라든지?”
무슨 상상의 나래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닌 듯했다.
난 아나톨리에게 말했다.
“잠시 나갈까요? 아나톨리.”
“예.”
말은 나간다고 하지만 정말 나갈 순 없었다. 나와 아나톨리가 향한 곳은 복도 끝의 휴게실이었다.
그래도 바람이나 좀 쐴까 싶어서 창문을 열었다가, 칼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도로 닫았다.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에서 주스를 두 개 뽑아 아나톨리에게 하나 건넸다.
아나톨리는 거의 황송해하며 그것을 받았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후.”
난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주스 캔을 땄다.
맨손으로 따려다가 고역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난 아예 이렇게 동전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수학 숙제를 집에 놓고 와서 짜증이 조금 나 있었지만, 아나톨리와 나란히 앉아 주스를 꼴깍이고 있자니 기분이 나아졌다.
한결 좋아진 느낌으로 아나톨리에게 물었다.
“아나톨리.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 저기…….”
아나톨리는 용감하게 상급생의 반에 찾아온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콩쿠르용 DVD에 실을 곡…… 연습 다 했거든요. 그래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음…… 제 번호 아시지 않나요? 그 일이라면 전화나 메시지로 말씀해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재차 부탁을 드리는데 전화로 하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아나톨리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상당히 기특했다. 이제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본데 있기도 하지.
아나톨리가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많이 바쁘지 않으신가요?”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심히 귀엽다. 이렇게 물어 오면 없던 시간도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바빠요.”
“…….”
“하지만 아나톨리를 도와 드릴 시간은 언제나 있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흔쾌히 승낙하는 것을 보고도 아나톨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꼭 무리하실 필요는…….”
“해 드리기로 했던 것이니깐요.”
정말 무리라 생각했다면 진즉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 정도 해 줄 여력은 남아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나톨리를 도와주는 것 정도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곡을 연주할진 모르겠지만, 바이올린과 2학년이 할 만한 곡이라면 그 리스트가 뻔했다.
일단 무슨 곡인지 들어 보고, 내가 악보를 보고 초견해서 괜찮게 연주하는 데에 대략 2시간 정도 예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나톨리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난 협연 연습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과의 실내악은 오케스트라를 대동해서 하는 협주곡과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협연이었다.
어제만 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 입으로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로 합을 맞추지 않았는가?
지금 내게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춰 보는 일은 언제라도 환영이었다.
난 먼저 말했다.
“시간은 언제가 좋겠어요?”
“DVD 제출 기한이 주말까지라서…… 되도록 빠르면 좋겠어요.”
“그런가요?”
이번 주 스케줄을 떠올려 보았다. 거의 연습과 레슨,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두세 시간 정도 빼려면 언제가 좋을지 고민했다.
“……아.”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아나톨리. 녹화는 어디서 할 생각이신가요?”
“……? 연습실이죠.”
DVD 오디션은 자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엔 녹음 및 녹화 장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다.
“아나톨리. 혹시 스튜디오에 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스튜디오요? 녹음실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전문 장비들을 갖춰 놓은 녹음실요.”
“없어요.”
당연히 없을 것이다. 나도 저번 주에 처음 가 본 것이니까.
난 아나톨리에게 물었다.
“그러시다면 스튜디오에서 DVD 만들지 않으시겠어요?”
놀란 눈을 뜨는 아나톨리에게 이어 말했다.
“견학도 하실 겸.”
은근한 내 권유에 아나톨리는 대답도 똑바로 못 했다.
부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더욱 제대로 하길 권하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난 주저하는 아나톨리에게 한 번 더 제안했다.
“제가 근래 음반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라서 잠시 빌리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그런가요……?”
물론 내가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음반 작업 중이라고 해서 스튜디오를 마음대로 후배와 빌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스튜디오를 빌리는 데엔 2시간에 1만 루블 정도가 필요하다.
당연히 마땅한 요금은 지불할 생각이었다. 아나톨리에겐 말하지 않고.
“…….”
이렇게까지 말하자 아나톨리는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전문 스튜디오에서 장비를 빌리고, 프로 레코딩 엔지니어가 DVD를 만들면 학교에서 캠코더로 찍는 것과는 화질도 음질도 상대가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음질이 좋다고 해서 실력이 더 좋은 것처럼 보정되거나 하진 않는다, 되레 더 정확하게 안 좋은 부분이 들릴 수도 있으니 불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환경에서 오디션 DVD를 만드는 건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결국 아나톨리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와 버렸다. 난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