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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48화 (148/1,277)

##  148화

오후 레슨까지 모두 마친 나는 아나톨리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반에서 조금 기다렸다.

그가 오면 함께 차량으로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스튜디오로 갈 예정이다.

“뭐 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자,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멘 아나스타샤가 내 옆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연습 끝났으면 집에 가야지. 안 가고 왜 멍하니 있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나랑 놀까?”

“…….”

난 이번에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그리하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아나스타샤.”

“응.”

“눈빛이 초롱초롱하시네요.”

“그래? 왜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가 물었다. 나와 놀 생각에 기분이 들뜬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요.”

“왜?”

“스튜디오에 가야 하거든요.”

“아…… 음반 작업 때문에?”

내가 음반을 내기로 했다는 것은 아나스타샤에게도 이야기했었고, 그녀는 무명으로 음반을 낸다는 것에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그렇게 알아서 납득하던 그녀가,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그건 네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 안 되는데.”

당연히 설명이 안 된다. 음반 작업으로 스튜디오에 가야 한다면 지금 교실에서 이렇게 미적거릴 게 아니라 바로 출발해야 했으니까.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모스크바 스튜디오는 학교에서 차량으로 가는 데에만 1시간 남짓 걸린다.

난 내가 기다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예. 오늘은 같이 가야 할 분이 계셔서.”

“……내가 가면 안 되고?”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그런 소릴 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오셔도 상관은 없는데…… 아나스타샤까지 오실 필요는 없을 듯해요.”

“왜?”

“아나톨리의 오디션 DVD를 촬영하는 데에 피아노과는 저 하나로 족하지 않을까요?”

“뭐?”

“?”

대화가 똑바로 맞물리지 않고 따로 노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러시아어 실력에 아직 빈틈이 있나?

아나스타샤가 재차 물어 왔다.

“아나톨리라면 너랑 내가 아는 그 아나톨리? 바이올린과 꼬마?”

“예. 맞아요.”

“그 애의 오디션 DVD를 찍어 준다고?”

“예.”

“하…….”

아나스타샤는 책상 뒤로 거의 넘어갈 것처럼 허리를 젖히며 한숨을 쏟아 냈다. 난 혹여나 그녀가 오해할까 싶어 급히 덧붙였다.

“스튜디오는 제가 제안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애의 지도 선생님이 네게 부탁한 거야?”

“아뇨. 아나톨리가 직접 부탁해 왔어요.”

날 보는 아나스타샤의 시선의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바이올린과에는 자체적으로 피아노 담당자가 붙어 있다. 때문에 피아노가 필요할 때마다 굳이 피아노과에 부탁할 일은 없었다.

그런 담당자를 제쳐 두고 피아노과 선배인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은, 일종의 지나친 어리광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보일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어리광이 맞다.

나도 안다. 알면서 받아 줬다.

정해진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DVD 정도는 그리 큰일도 아니다.

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나톨리에겐 첫 콩쿠르예요.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 착하다 착해.”

“놀리지 마시고요.”

“놀릴 기분도 아니야.”

포기했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아나톨리의 DVD만 찍고 끝?”

“아뇨, 스튜디오에 간 김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음반 작업도 조금씩 진행하려고요.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겠네요.”

2시간 정도 도와주고, 아나톨리는 차에 태워 집에 보낸 다음 난 내 음반 일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번에 미하일 선생님과 궁리해 본 프로그램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어떻게 생각할지 물어봐야 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주말엔 일 없는 거지?”

“……그렇죠? 보통 연습만 하니깐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주중에야말로 내가 바쁠 테니 음반 작업은 주말에 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지만, 난 음반사 사람들을 굳이 주말에 출근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주중에 학교를 마치고 작업하기로 했었다.

때문에 내 주말 일과는 오로지 거의 연습뿐이었다.

“그럼 주말엔 내가 네 시간 좀 뺏자.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낼래?”

“주말에요?”

“그래.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었잖아. 주말에 와. 같이 연습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자.”

난 반년이 넘게 그녀와 친구로 있으면서 집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마저 느끼고 있었으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곧장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아나스타샤.”

“꼭이다? 약속한 거야?”

“예.”

확실히 대답하자 그제서야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기본적으로 내 시간을 빼앗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땐 연락조차 자제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종종 그녀는 날 피아노 앞이 아닌 어딘가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내 밸런스를 억지로라도 잡아 주고 있는 것이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꽤 잘 맞는 편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나스타샤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교실 뒷문이 열리더니 작은 후배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타티아나 누나…… 아나스타샤 누나도 계셨네요.”

바이올린을 들고 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뛰어왔는지 조금 숨이 찬 모습이다.

우릴 보고 반 안으로 들어오는 아나톨리는 보며 아나스타샤가 그를 불렀다.

“아나톨리.”

“예?”

“타티아나와 오디션 DVD 만들러 간다고 했었지?”

“아…… 예.”

아나스타샤의 질문에 아나톨리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우린 같이 스터디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과를 불문하고 꽤 친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어린 아나톨리나 류보비를 잘 대해 주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나스타샤를 조금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시간이 지나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아나스타샤가 보이는 조금 매서운 태도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도 지금은 그녀가 조금 무서웠다.

아나스타샤는 아나톨리가 내게 어리광을 부린 것을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 아나톨리에게 뭐라고 한다면 난 상당히 난처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해. 타티아나라면 분명 잘 해 줄 테니까.”

“그,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아니지. 음, 필요하면 나도 같이 가 줄까?”

“예!? 아뇨,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나톨리는 깜짝 놀라며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내게 도와 달라고 했을 때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었는데, 아나스타샤도 따라온다면 정말 부담스러울 것이다.

기겁하는 아나톨리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도 아나톨리는 어쩐지 바짝 긴장한 표정을 했다.

아나스타샤가 아이들과도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그 점은 항상 조금 아쉽다.

***

아나톨리를 차에 태우고, 소로킨과 빅토르에게 설명을 했다.

빅토르는 정작 나는 연습실에서 캠코더로 대충 찍어서 내지 않았느냐며 어이없어했지만, 난 음악 감상이 아닌 오디션에 있어서 그건 그리 큰 차이가 아님을 설명해 주었다.

“아나톨리도 아셔야 해요. 일부러 나쁜 음질로 보내면 당연히 떨어뜨리겠지만,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의 영상이라면 1차 예선인 DVD 오디션의 통과 여부엔 큰 차이가 없어요.”

“선명하게 잘 들릴수록 틀린 것도 잘 들리겠죠?”

“예. 그래요.”

그리고 DVD 오디션은 연주자의 음악성을 심층적으로 보기보다는 기초적인 테크닉을 우선 중점적으로 본다.

음질에 차이가 있어도 테크닉을 보는 데엔 문제가 없다. 그 때문에 음원이 아닌 영상으로 찍어 보내야 하는 것이다.

“DVD에 담을 곡은 어떤 곡들이죠?”

“카이저 에튀드와 바흐 파르티타요.”

“파르티타 1번인가요? 2번?”

“1번이에요.”

“역시 기초를 보는군요.”

나 역시 DVD에 녹화한 곡들은 하농의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그리고 쇼팽의 에튀드였다.

일단 예선 무대에 올려도 좋을지 아닐지 판가름하기 위해 기본 테크닉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카이저 에튀드와 바흐의 바이올린 파르티타는 피아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나톨리는 한 곡을 더 말했다.

“그리고……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12번이요.”

바로 내가 부탁을 받게 된 이유였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곡 중 열두 번째 곡.

굉장히 유명한 그 부제는 바로…….

“라 폴리아네요.”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스페인어로 광기를 뜻하는 라 폴리아La Folia는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12번의 부제이지만 딱 그 곡에만 붙어진 제목은 아니었다.

17세기에 유행했던 하나의 화성 진행 양식에 붙은 이름이다.

코렐리뿐만이 아닌 비발디, 헨델, 바흐, 마레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라 폴리아라는 화성 진행을 인용하여 곡을 작곡했다.

난 특히나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코렐리 변주곡을 연주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변주곡 역시 라 폴리아 변주곡이라고 명명되었어야 하는 곡인데,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코렐리 변주곡이라고 이름 붙였다.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상관없고, 지금은 코렐리의 라 폴리아가 중요했다.

난 아나톨리에게 말했다.

“아나톨리. 악보를 보여 주시겠어요?”

“여기요.”

손을 내밀자 아나톨리가 자신의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주었다.

꽤나 손때가 탄 악보였다. 새로 샀다기보단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아르칸젤로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곡집.

바이올린을 배웠을 때 해 봤을 만도 한데,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이상하게도 연주해 본 기억이 없었다.

난 조금 생소한 기분으로 악보를 넘겼다.

바로 열두 번째 곡으로 넘어가지 않고 1번 곡부터 훑어보았다.

“…….”

피아노에게 저음 성부를 맡기는 고전 바이올린 협주 방식을 고안하고 정착시킨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답게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 물씬 나는 느낌이 들었다.

12번 곡을 펼쳤다. 조금 익숙하게까지 보이는 라 폴리아 선율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주어진 부분이 아니었다.

난 피아노 파트를 읽어 보았다.

이 정도면 초견으로도 바로 연주가 가능할 것 같다.

아나톨리를 다시 돌아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다시 악보를 돌려주곤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나톨리는 깜짝 놀라서 어깨를 틀었지만, 곧 얌전해졌다.

“괜찮아요.”

나와 아나톨리는 방학에 있었던 일들과, 근래 연습 중인 곡들, 그리고 콩쿠르에 대해 이야기하며 에우테르페 레코즈 모스크바 스튜디오로 향했다.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는 결코 짧지만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것도 짧게 느껴졌다.

“…….”

이윽고 소로킨이 운전하는 벤츠는 스튜디오에 다다랐고, 나와 아나톨리는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내가 말했다.

“전문 스튜디오라고 해서 긴장하실 것 없어요. 모두 좋은 분들이시니 아나톨리는 연습한 대로만 하시면 되어요. 아나스타샤도 말했었죠? 실전도 연습처럼.”

“연습한 대로…….”

“제가 도와 드릴게요.”

난 다시 한 번 아나톨리와 약속했다.

보통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피아노와의 협연에서,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바이올린이긴 하지만 피아노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저역대의 성부와 화성 구조, 프레이징의 구분 등 선율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머지 토대를 다 맡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음역대의 단선율 악기인 바이올린이 활개를 치고 노래하기 위해선 피아노가 탄탄하게 받쳐 주어야 했다.

이렇게 음악에 있어서 피아노의 역할처럼, 난 철저하게 아나톨리를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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