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49화 (149/1,277)

##  149화

스튜디오로 올라가자 베로니카가 우릴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와요,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베로니카는 언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외근이 잦은 편이라 스튜디오에 매일 있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있을 땐 언제나 밝게 인사해 준다.

그녀는 살풋 웃더니 내 옆에 있는 아나톨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쪽은 전화로 말씀하셨던 그 후배님?”

“예. 아나톨리 이고르비치 네스트로프예요.”

아나톨리가 자기소개를 하자 베로니카가 기분 좋게 말했다.

“굉장히 귀여운 후배님이네요? 반가워요.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베로니카예요.”

“반갑습니다.”

베로니카는 초콜릿도 하나씩 나눠 주셨는데 초콜릿에 든 카페인도 조심해야 하는 난 내 몫을 아나톨리에게 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마스터링 룸에서 한창 곡과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잠시 신경을 놓지 못할 일이 있어서 5분만 기다려 달라고 베로니카가 전해 왔다.

조금 기다리며 그녀와 이야기를 했다.

나이 차이도, 다루는 악기도 다른 내가 어떤 경로로 아나톨리를 만났고 친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로니카는 굉장히 흥미진진해했다.

“음악학교라…… 하하, 저도 사실 악기 전공을 하고 싶었긴 했는데 말이죠. 재능이 없어서 원.”

그녀는 손을 펼쳐 보이곤 손가락들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한 번쯤 연주자를 꿈꾼 적이 있었지만 재능의 부재를 깨닫고 포기한 것 같다.

이렇게 음악을 좋아한다 해서 누구나 전문 연주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한다 해서 누구나 전문 연주자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로니카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귀나마 좋아서 영국에서 뮤직 테크놀로지 학과를 졸업했어요. 음향기술을 배웠죠.”

“아…….”

“사실상 지금 하는 일은 영업에 가깝지만…… 프로듀서에게 또 많이 배우고 있죠. 제가 레코딩 엔지니어로서 타티아나를 프로듀싱할 일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두 눈에 체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꿈을 포기하고 타협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음악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그럴 거예요.”

“그땐 잘 부탁드릴게요. 아하하.”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몇 번이나 베로니카 과장을 믿는다는 표현을 했었다.

난 분명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베로니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짧은 대화가 흐르고, 복도 저편 마스터링 룸의 문이 열리더니 깡마른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사장이자 레코딩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카르카로프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날 보더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타티아나. 왔습니까?”

“마카로프 프로듀서. 안녕하세요.”

요 며칠 사이 몇 번 보면서 친해진지라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날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아나톨리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거기 있는 작은 친구 DVD 제작해 주고…… 그 후에 일 이야기를 하기로 했었죠?”

“예.”

“음…….”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소리를 내며 아나톨리를 바라보았다.

아나톨리는 그 시선에 약간 위축된 듯 보였으나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아나톨리 이고르비치 네스트로프예요.”

“좋습니다, 아나톨리. 좀 물어볼까요. 왜 타티아나에게 부탁했습니까?”

그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듣기에 따라 혼내려는 투로 들리기도 한다. 아나톨리가 작게 말했다.

“안 된다는 건 알아요. 그치만…….”

“아뇨, 안 된다는 말이 아니죠. 전 지금 아나톨리에게 설교 따윌 늘어놓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아나톨리의 말을 끊으며 손을 좌우로 저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음악에 있어선 목숨을 걸고 있고, 어리다고 하여 쉬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진중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아나톨리 역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뭘 묻는 것인지 깨달았는지, 천천히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누나의 피아노 소리가 좋아서요. 제가 알고 있는 한 타티아나 누나는 제가 부탁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자예요. 그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을 켜고 싶어서요.”

“그렇겠지요.”

조금 낯 뜨거운 이야기인데,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둘은 자연스레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맞장구를 쳤다.

“이해합니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연주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실제로 손을 뻗으면 닿으니까.”

그렇게 날 보며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군요.”

“……?”

아나톨리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고, 나 역시 그랬다.

무엇이 문제인진 몰라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나와 아나톨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아닐지도 모르니 그냥 한번 해 보는 게 낫겠군요. 빠르게 진행해 보죠. 모두 메인 부스로 따라오시길.”

그리곤 먼저 앞서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음악으로 증명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난 아나톨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가요. 아나톨리.”

“방금 프로듀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무릎을 조금 굽혀, 불안해하는 아나톨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흰 음악으로 보여 드릴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예.”

아나톨리 역시 어리지만 자존심은 강했다.

나에게 협연을 요청했던 것도 아나톨리가 부탁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부응해 주어야 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따라 메인 부스로 들어서자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협주를 위해 음향학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자 일단 리허설입니다. 피아노 위치는…… 그냥 앉으시고. 아나톨리는 바이올린 들고 이리 오시죠.”

“……아, 예.”

“메인 마이크는 이대로 놓고, 아나톨리는 이쪽에 있는 지향성 마이크는 절대 손대지 마세요. 거리가 좀 있어 보이지만 잘 녹음 되니 말이죠. 아시겠죠.”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말을 했지만, 막상 레코딩의 준비에 들어가자 철저하게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

우리의 위치와 마이크의 위치 등을 세팅하고, 방을 둘러보던 그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날 돌아보았다.

“악보 쓸 겁니까? 타티아나.”

“예. 암보하지 못해서요.”

난 코렐리의 라 폴리아 소나타를 악보를 두고 초견으로 연주할 자신은 있었지만, 차에서 한 번 본 것으로 모두 외우진 못했다.

이렇게 리허설을 몇 번 하고 나면 외우게 되겠지만, 일단 지금은 악보가 필요했다. 혼자 넘겨 가면서 하면 된다.

하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베로니카. 전자악보 좀 가져다주시죠.”

“예. 프로듀서.”

옆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돕던 베로니카 과장님은 부스 밖으로 나갔다가, 커다란 장비들을 들고 들어왔다.

노트북인 줄 알았던 넓적한 장비는 양옆으로 펼치자 양면에 액정이 달린 태블릿 컴퓨터였다.

“전자악보예요. 처음 보나요?”

“제 태블릿 컴퓨터를 가끔 이렇게 쓰긴 하는데요…….”

“그것도 괜찮지만, 사실 이게 훨씬 낫죠.”

베로니카 과장님은 그렇게 전자악보를 보면대 위에 올려놓고 전원을 올렸다.

그리고 코렐리의 라 폴리아 소나타 악보를 불러냈다.

난 보통 태블릿 컴퓨터로 악보를 보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지만, 가장 문제는 태블릿의 액정 크기였다.

일반 악보들보다 훨씬 크기가 작기 때문에 보고 있자면 눈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자악보는 액정 크기가 일반 악보와 똑같았다. 일부러 이 사이즈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보기에 정말 편했다.

“그리고 풋 스위치는 이쪽에 놓을게요. 이게 페이지 터너니 페이지를 넘길 때 밟으시면 돼요.”

“풋 스위치요?”

“예.”

허리를 빼고 발밑을 보니 피아노 페달 옆에 밟을 수 있는 또 다른 페달이 있었다.

난 정말 감탄했다.

“이런 것도 있었군요…….”

“예. 악보가 있으시니 제가 페이지 터너를 해 드려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악보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도 함께 녹음되잖아요?”

“……아.”

“프로듀서는 그것도 싫어하셔서요.”

종이를 넘기는 사락거리는 소리는 작지만, 분명히 들린다. 이런 전자 장비들은 그 작은 소리조차 없앨 수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

그렇게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평소에 하듯, 연주하시면 됩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럼 전 메인 컨트롤 룸에 가서 준비를 하도록 하죠.”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베로니카 과장은 메인 부스 옆의 컨트롤 룸으로 향했고, 난 아나톨리와 단둘이 되었다.

“타티아나 누나, 조율 좀 도와주시겠어요?”

“예.”

난 라 음을 쳤고, 아나톨리는 그것을 듣고 바이올린을 조율했다.

아나톨리의 조율을 도와주며 난 다시 천천히 전자악보를 살펴보고, 풋 스위치를 눌러 보며 작동법을 익혔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시작하시죠.”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준비 완료 신호가 떨어졌다.

난 아나톨리와 눈을 마주쳤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난 건반을 누르고 아나톨리는 활을 그었다.

느릿하고 애절한 음색으로 음악이 시작되었다.

난 악보를 보며 천천히 화성을 쌓아 올렸다. 초견이지만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곧장 따라갈 수 있었다.

라 폴리아는 단조의 음악이지만 슬프거나 우울하게 들려선 안 된다.

이 곡은 기본적으로 변주곡이자 무곡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난 그것을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변주곡을 연구하면서 공부한 적 있었다.

아나톨리 역시 정확하게 그 부분을 알고 있었다.

길게 우는 바이올린 소리가 굉장히 애상적이지만, 구슬프게 우는 소리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곧바로 선율을 이어 가면서 아나톨리는 자신만의 라 폴리아를 연주했다.

난 아나톨리가 원하는 대로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탄탄한 구조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나아진 것 같은 아나톨리의 실력에 감탄했다.

되도록 시간을 빼앗지 않고 녹음할 수 있도록 충분히 연습해서 다시 부탁하겠다고 했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듯하다.

비에냐프스키의 에튀드까지 연주해 내는 아나톨리에게 이 곡이 어렵진 않겠지만, 이 완성도를 만들어 내는 데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을 것 같았다.

조금 즐겁게 건반을 연주해 나갔다.

난 초견으로도 나쁘지 않게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었고, 아나톨리는 준비해 온 만큼 잘하고 있다.

대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조금 빨라져야 하는 구간이다.

내가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대번에 아나톨리의 바이올린 음색부터 변화했다.

혹여나 헷갈리지 않도록 정확한 박자로 악보대로 길을 깔아 주자, 아나톨리는 그 길을 따라 가면서 충분히 자신의 연주를 해 냈다.

그렇게 나와 아나톨리는 호흡마저 하나 된 기분으로 협연을 끝마쳤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난 도전적으로 컨트롤 룸 쪽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나톨리는 이렇게나 잘 해냈다. 난 바이올린 또한 배웠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뭐라고 한들, 난 아나톨리를 지켜 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두 분 다 컨트롤 룸으로 오시겠습니까.”

“…….”

아나톨리와 눈을 마주치고, 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어 보인 뒤에 일어나서 그와 함께 컨트롤 룸으로 향했다.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의자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예상대로군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들어 보시죠.”

그리고 마우스로 녹음된 것을 그대로 재생시켰다.

“…….”

나와 아나톨리가 연주한 코렐리 라 폴리아 소나타가 스피커로 재생되었다.

고급 음향기기들로 녹음된 음원은 가감 없이 꽤나 분명하게 연주를 재현하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가, 어우러져 갔다.

“…….”

조용히 그것을 듣던 나는 새파랗게 질려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말없이 턱을 괴고 있었다.

녹음된 음원을 끝까지 재생시킬 것도 없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중간에 그것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땐 이렇게 어릴 줄 몰랐습니다. 때문에 별문제 없으리라 생각했죠. 바이올린을 한다는 학생 역시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일 테니.”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6학년이나 7학년 정도 후배와 접점이 있으리라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아나톨리는 2학년이었다.

“하지만 이 차이는, 절대적이군요.”

할 말이 없었다.

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모든 것을 듣는다. 때문에 이 협연이 청중들에겐 어떻게 들릴지 알 수 없었다.

녹음을 해 보니 문제점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바이올린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곡이니, 피아노와 함께 실내악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바이올린이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연주는 주인공이 모호했다.

“아나톨리는 충분히 잘…….”

“그가 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역시나 중앙음악학교의 학생답게 원숙하고, 완성도 있는 연주였죠. 타티아나는 철저하게 그 연주를 받쳐 주는 데에만 집중했고요.”

절대 난 앞서 실력을 내세우려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아나톨리가 연주하기 쉽도록 밑그림만을 그렸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그 그림에 얹혀진 아나톨리의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나 빈약하게만 들렸다.

난 초견 연주였고, 아나톨리는 적어도 며칠간 연습한 연주였지만 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천천히 아나톨리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곧바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나톨리에게 말도 못 걸고 안절부절못했다.

나 대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낮게 말했다.

“억울해할 것 없습니다, 아나톨리. 1/2 사이즈의 바이올린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이건 아나톨리가 잘못한 게 아니죠.”

그리고 이어 말했다.

“물론 타티아나의 잘못도 아니고요. 최고의 연주자를 바란 건 아나톨리였으니까요.”

잘 모르겠고, 일단 아나톨리를 달래 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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