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카르카로프는 조금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흥미롭게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
2학년밖에 안 되지만, 그럼에도 연주자로서의 자존심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아나톨리는 부끄러움과 자책 등으로 거의 눈물을 흘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나톨리는 현실적으로 부탁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자인 타티아나의 반주를 원했지만, 그 수준은 너무나 뛰어났다.
“…….”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깔아 준 길은 레드카펫이나 다름없었다.
레드카펫은 그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주목받고, 빛나게 해 주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카펫을 걷기 위해선 충분한 자격과 실력을 필요로 했다.
거기에 미달한다면 거꾸로 레드카펫이라는 화려함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타티아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후배와의 차이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무대 밖에서 들으면 그 격차가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까진 몰랐겠지만,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
마카로프는 조용히 작은 음악가 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음향전문가이니만큼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은 어설픈 아이들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재능과 마인드를 지닌 천재들이었다.
이 천재들이 누군가의 개입이나 도움 없이 당장 닥친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궁금해졌다.
타티아나는 가만히 아나톨리의 손을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아나톨리.”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나톨리를 진정시켰다.
아나톨리는 녹음 결과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만,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사과였다.
“제가 욕심이 너무 많았었나 봐요.”
“아니에요, 아나톨리. 지금까지 우리는 합주를 많이 해 왔었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녹음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죠. 그뿐이에요.”
“지금까지 모든 것이…….”
타티아나의 말에 아나톨리는 멍하니 읊조리더니, 허탈하게 말했다.
“전…… 타티아나 누나와 합주를 하면 너무 편안했어요. 그 견고하고…… 또렷한 소리를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었죠.”
합주 그 자체를 즐기는 데에 모든 신경을 쏟느라 객관적으로 녹음된 음악에서 이렇게 격차가 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여지껏 함께 합주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타티아나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호의에 승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면 그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가 남지 않을 수 없다.
아나톨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죠.”
“…….”
“누나.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저 그냥 다른 분에게 부탁을…….”
“아나톨리.”
그때 가만히 아나톨리가 하는 말을 듣던 타티아나가 말을 잘랐다.
마카로프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타티아나가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로 적당히 맞춰 주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단호한 어투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도망치지 말아요.”
“……!”
후배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할 정도로 매사 상냥한 타티아나가 본색을 드러냈다.
마카로프는 음반과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타티아나의 음악가로서의 기질이 바로 본성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지금의 변화를 또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듯한 아나톨리는 고개를 들었다.
“도망이 아니에요. 누나, 왜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도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뉘앙스와 도발이 아나톨리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후벼 놓았다.
타티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현실적인 한계를 맞이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한 번 리허설을 해 봤을 뿐이에요.”
타티아나는 양손을 들어 아나톨리의 오른손을 꼭 쥐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알 수 없어요. 우리 조금 더 같이 해 봐요.”
“전…… 전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어요!”
아나톨리는 도리질을 쳤다.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한 곡은 타티아나가 외우지도 못하고 악보를 보면서 한 연주에 짓밟혔다.
여기에서 더 열심히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도망갈 것 같은 아나톨리를 계속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나톨리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연주자가 바로 저였죠. 맞나요?”
“……맞아요.”
“그 최고의 연주자가 간단할 줄 아셨나요?”
“……!”
아나톨리가 말문이 막혔는지 눈을 크게 떴다. 타티아나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 그렇게 쉽지 않아요.”
늘 귀여워하는 줄만 알았는데, 타티아나의 태도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아나톨리는 너무 충격이 컸는지 멀거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누나…….”
“그리고 말이죠.”
그리고 타티아나는 망연한 아나톨리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전 아무나 협연자로 고르지도 않아요.”
“…….”
타티아나가 말하고 싶은 본론은 이쪽이었다.
타티아나가 여섯 살 차이나 나는 후배와 함께 합주를 하는 이유는 그저 도와주고 싶거나 마냥 귀엽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의 기준으로 아나톨리와의 합주를 허락했다.
아나톨리 역시 그 말을 이해했지만, 이해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이렇게 큰 격차가 나는데 어떻게 타티아나가 가지고 있는 음악가로서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이도 실력도 그 무엇도 기준 미달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티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아나톨리.”
다시 후배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엔 쌀쌀맞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따뜻함만이 묻어 나왔다.
“현실적인 한계라는 것이 얼마나 참담하게 느껴지는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아나톨리는 아직…… 괜찮아요. 앞으로도 괜찮을 테고요. 아나톨리는 천재이니까.”
“……제가요.”
“예.”
타티아나의 입에서 나오는 천재라는 단어는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결코 장난을 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서 하지 않았다. 특히 음악에 대해선.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아나톨리를 보며 타티아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따라오실 수 있죠? 전 아나톨리가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아나톨리는 여전히 타티아나가 왜 자신을 그렇게까지 믿어 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마카로프 역시 의아해했다.
둘의 나이 차이와 실력 차이는 절대적이다.
아나톨리는 그 나이 대에선 최상위급의 실력을 지녔지만, 타티아나에겐 미치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최소한 몸이 다 성장해서 신체적 조건이 동등해지는 나이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단호하게 지금, 도망치지 말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도망칠 수 있는 연주자는 없다.
아나톨리의 눈빛이 일변했다. 사그라들었던 열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타티아나 누나. 그럼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들어 보도록 할게요.”
“절대 봐주지 마세요.”
일부러 한 번 더 합주를 요청하고, 밋밋하게 맞춰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티아나는 충분히 그렇게 연주를 조절할 기량이 있었고, 그건 무례라 할 수 없었다.
상대에게 맞춰 주는 일종의 배려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톨리는 그런 배려를 일체 거부했다.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전 봐주면서 할 줄 몰라요.”
그렇게 둘은 다시 메인 부스로 들어갔다.
마카로프는 레코딩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타티아나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일단 두 번째 녹음을 시작한 다음, 아나톨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이올린 소리를 조금 더 앞세우는 방법도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시간은 아나톨리의 콩쿠르용 DVD 영상을 녹화하는 시간이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타티아나가 조금 무릎을 굽혀 주는 것이 합리적이긴 했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피아노에 앉고, 아나톨리가 바이올린을 들었다.
마카로프 역시 준비를 마쳤고, 메인 부스로 향하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시작하시죠.”
그리고 동시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합주가 시작되었다.
“…….”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바이올린 소리가 높게 치솟았다.
아나톨리는 연습한 대로 평범하게 연주하면 녹음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들었기 때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전신을 써서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 변주에서 피아노의 색깔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타티아나는 바이올린 소리가 치닫는 대로 얌전히 음악의 길만을 제시하다가 다음 변주로 넘어가자 레드카펫을 다시 꺼내 들었다.
소리가 커지거나, 편곡으로 연주가 화려해진 것도 아니었다.
수천 단계로 섬세하게 음을 나누어서 음색과 음의 부피 그 자체를 다룰 줄 아는 타티아나는 그런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어 낼 줄 알았다.
“…….”
마카로프는 살짝 입을 벌렸다. 타티아나는 정말로 안 봐주고 있었다.
처음 연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고 완벽한 반주로, 마치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가겠다는 듯 연주해 나가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부스 안을 지배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바이올린 소리는 그 피아노 소리에 파묻혔다.
이전 같았으면 아나톨리는 이것을 편안하게 느끼고, 그냥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다.
분명 파묻혀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너무 편안하기에 빠져나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음색은 확연히 달라졌다.
아나톨리는 더욱 강렬하게 활을 움직였다.
풀 사이즈 바이올린보다 10cm 남짓 작은 1/2 사이즈 바이올린은 낼 수 있는 음량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듯 격렬하게 울었다.
“와우…….”
마카로프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아나톨리는 분명 또래 중에선 굉장히 높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 정도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아나톨리는 그 수준을 더욱 뛰어넘었다.
타티아나가 마련해 주는 반주에 걸맞은 연주를 보이기 위해, 거기에 의존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력은 실시간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 순간 아나톨리가 몇 단계나 뛰어넘었을지 마카로프는 알지 못했지만, 들리는 소리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
그렇게 두 번째 합주를 끝내고, 아나톨리는 활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타티아나를 보며 말했다.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좋아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던 마카로프 역시 재빨리 두 번째 녹음파일을 저장하고 세 번째를 준비했다.
다시 이어진 세 번째 합주는 더욱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아나톨리는 바이올린의 지판을 짚고, 활을 한 번 켤 때마다 그 울림에는 깊이를, 음에는 묵직함을 쌓아 나갔다.
매 초마다 발전하는 것이 귀에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악보를 넘기지도 않았다. 두 번 만에 암보해 버린 듯하다.
7분짜리 곡을 이렇게 빠르게 암보해 버리는 타티아나를 보며 마카로프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 천재가 아니었다.
피아노 역시 완성도를 한층 더 높였다. 바이올린이 따라오기 무섭게 더욱 높고, 장대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바이올린도 그러한 피아노에 맞춰 더욱 변화했다.
모니터로 보이는 아나톨리의 얼굴엔 땀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고 신경을 흐트러뜨리면 피아노에 잡아먹히고 만다. 아나톨리는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했다.
“…….”
마카로프는 상식적으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나톨리는 너무 어렸고, 타티아나의 반주를 받기엔 미숙했다. 그 예상은 첫 녹음에서 정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한 가지 모르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아나톨리의 잠재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합주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소리의 수준엔 격차가 존재했지만, 처음보단 훨씬 나아졌다. 이젠 하나의 제대로 된 음악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차이는 극명했지만, 잘 어울렸다.
타티아나는 아나톨리에게서 이러한 잠재력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천재라고 딱 잘라 단언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저 작은 아이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개화시키고, 돕고 싶어 했다.
“…….”
단순히 후배에게 지극정성인 것으로 본다면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타티아나를 음악가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재능이 보인다면, 더더욱 키워 주고 싶은 것이다.
물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아나톨리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었으니 당연히 최고의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타티아나는 선생이 아닌 선배, 그것도 다른 악기를 다루는 선배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선생은 절대 불가능한 방법으로 타티아나는 아나톨리의 선생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예상치도 못한 광경을 보며 숨을 죽였다.
지금 저 부스에서 벌어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들이 성장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녹음하고 있다는 것에, 마카로프는 전율했다.
완벽한 음원을 남기는 것이 그의 업이었지만,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또 다른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세 번째 합주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섬뜩한 소음이 연주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아나톨리!”
마카로프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연주를 중단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아나톨리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