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52화 (152/1,277)

##  152화

코렐리의 라 폴리아 소나타의 녹화를 완료하고도 DVD에는 카이저 에튀드와 바흐의 파르티타의 영상을 더 넣어야 했다.

그 곡들엔 피아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얌전히 컨트롤 룸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 아나톨리의 연주를 모니터링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악기의 음량이라는 것이 악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연주자의 역량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게 해도 되는가…… 의문이 조금 있었어요.”

“타티아나의 생각도 틀리진 않지만, 조금 넓게 생각해 보시죠. 전체적인 음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예전부터 수많은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연주자가 약음을 낼 수도 있지만, 약음기를 쓰기도 했고 심지어 무대 뒤에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죠.”

“무대 뒤에서요?”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무대 뒤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한단 말인가? 대체 왜?

놀라서 되묻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발소리라든지, 천상에서부터의 웅장한 소리 등 어떠한 극적인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금관악기 등을 연주하는 경우는 꽤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말러의 탄식의 노래나 교향곡들, 그리고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같은 곡들 있지 않습니까?”

“……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순식간에 몇 가지 곡들의 이름을 꺼냈다.

내가 피아노에만 국한된 굉장히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교향곡과 오페라에도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눈앞의 깡마른 남자가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는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였다.

난 다른 그 어떤 외력 없이 오로지 연주자와 악기 단둘이서 내는 소리만이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편협한 시각에 불과했다.

당장 음향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설계된 홀만 하더라도 연주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말 연주자가 악기만을 가지고 순수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하고 싶다면 홀뿐이 아니라 귓바퀴도 잘라 내야 할 것이다.

사람의 귓바퀴 또한 소리에 변화를 주는 요소이니까.

“…….”

배워야 할 것도, 생각해야 할 것도, 타협해야 할 것도 많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온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렇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날 보더니 킬킬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나톨리는 제 믹싱을 거부했지요.”

“……죄송해요.”

“그게 아닙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예?”

“이 DVD는 음반이 아니라 콩쿠르 오디션에 낼 것이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 현재 자신을 받아들이겠단 뜻이겠지요. 상당히 놀라워요. 어린 친구가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유리 밖 메인 부스에서 연주 중인 아나톨리를 조금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예.”

내가 대답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조금 짓궂게 물었다.

“저 친구를 점찍어 둔 겁니까?”

“……?”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군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아나톨리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그의 재능을 높게 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엔 그리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이 차이가 여섯 살도 더…… 아니지, 아나톨리에게 마르파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괜한 오해에 더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황망해하고 있는 와중,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순수한 의도라는 걸 굳이 제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다시 아나톨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가 보더라도 아나톨리의 실력은 아홉 살짜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저 정도라면 중앙음악학교에서도 꽤 우수한 학생이겠죠.”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지만 천재의 소리는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몇 년만 지난다면 꽤 유명세를 날릴지도 모르겠군요.”

“…….”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언가 원하는 건 없으실 테죠.”

“예. 아무것도.”

“이보다 순수한 의도가 어디 있습니까?”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말대로 내가 아나톨리에게 어떠한 종류로든 간에 보답을 바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아나톨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다.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는 것. 그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그건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

하지만 그렇게 아나톨리를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다는 의도를 순수하다고 부르자니 조금 낯이 뜨거웠다. 그렇게까지 부를 건 아니다.

“그걸 순수하다고 불러야 할진 잘 모르겠어요.”

“크크…… 정말 순수하지 못한 건 저 같은 어른을 두고 해야 하는 말입니다, 타티아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눈 밑에 음영을 드리우며 낮게 말했다.

“전 아나톨리를 장차 어떻게 스카웃해 와야 할지 고민 중이니까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보기에도 아나톨리는 굉장히 탐나는 연주자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날 보면서 더더욱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아나톨리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길 바라겠지만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렇습니까?”

“음,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뇨, 하지 마시죠. 타티아나나 저나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 피차 알지 않습니까?”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간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일을 하면서 이 사람이 나와 상당 부분 닮은 부분이 많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버릴 줄은 몰랐다.

또한 이것은 일종의 신뢰였다. 우리는 특이한 음반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고도 재미없게 까칠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아나톨리도 특이한 사람일까요?”

“그건 그가 조금 더 커 봐야 알겠지만, 끼는 있어 보이는군요.”

우리는 악당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기분 좋게 말했다.

“아무튼 2년 후에 바로 음반 내자고 하진 않을 테니 때가 되면 자신 있게 다시 데리고 오시죠. 기대되는군요.”

“그렇게 할게요.”

난 바흐의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아나톨리를 보며 2년 후를 그렸다.

***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날아왔다.

발신자는 아나톨리였다.

녹화한 DVD를 지도 선생님에게 보여 드렸더니 오디션 합격은 손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귀여운 메시지였다.

지도 선생님으로부터 최종 컨펌까지 떨어진 것이니 이제 콩쿠르 진행위원회에 DVD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

난 아나톨리에게 오디션뿐이 아니라 콩쿠르에서도 수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하는 메시지로 답장했다.

“…….”

아나톨리는 잘할 테니 내 걱정을 할 차례였다.

음반은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프로그램도 다 결정되지 않았고, 결정된 곡들 역시 마음에 드는 음원이 안 나와서 시간을 조금 잡아먹고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절대 서두를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가 장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협연에 대한 것.

내가 가진 약점은 아나톨리와 합주를 할 때도 드러났다.

내가 조금 더 노련한 협연자였다면 아나톨리의 바이올린에 맞춰 조금 더 균형 있는 음악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 상태로 가능한 최선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바이올린과 싸우듯이, 아나톨리의 바이올린을 무리해서 따라오도록 만들었다.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중을 둔 무대에서 그런 연주를 했다간, 굉장한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무대에서 합주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은 연습이나 경쟁 등 자기만족이 아닌, 좋은 음악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배웠던 것들을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연주자 개인의 만족과 청중들에게 향해야 할 의무.

음악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추구하고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가. 그것들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가.

여태껏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청중들도 꽤나 만족해 주었고 그 사이에 괴리감이 없었으니 계속 하고 싶은 대로 해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른 연주자들이 더해지니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왜 협연을 할 때마다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애당초 난 그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야 마는 맹목적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잘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은 피아노 앞에서만 하고 싶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이라도 조금 쐬고 싶었다. 아직 날씨는 차가웠지만 오랫동안 밖에 서 있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안녕,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그렇게 교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조금 거닐고 있자니 조금 안면이 있는 학생들은 내게 인사를 해 오기도 했다.

약간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안녕, 타티아나. 찾고 있었는데.”

상당히 낯익은 남학생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난 순간적으로 경계했다가 그 얼굴을 보면서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서 멈춰 섰다.

남학생이 말했다.

“오랜만이지?”

“…….”

“흠, 혹시 잊혀졌다면 그냥 지나갈게.”

“아뇨, 아니에요.”

불현듯, 한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선배 맞으시죠? 바이올린과의.”

“하하하하, 다행이네.”

막심 선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짧은 머리의 선배는 바이올린과 10학년의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 선배였다.

저번 학기를 마치고 참가한 학기말 파티에서 만나 같은 테이블에서 꽤 오래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었다.

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파티 이후로는 처음이죠?”

“그래.”

“그땐 죄송했어요.”

“죄송? 아, 죄송할 것 없어.”

막심 선배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파티장에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다툰 적이 있었다.

난 그때 탄산음료를 마시고 살짝 흥분해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변명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었잖아요. 그건 제 잘못이에요.”

나는 심지어 막심 선배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는 무대 위로 올라가려고 하기까지 했었다.

그건 정말 엄청난 결례였다.

“음……?”

하지만 내 사과에도 불구하고 막심 선배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릴 뿐이었다.

“그게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겠지?”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선배가 말했다.

“난 네가 피아노 반주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는 걸 상당히 흥미롭게 들었었는데 말야. 그건 네 평소 의견이 아니었던 거야?”

나와 막심 선배가 했던 논쟁 내용이었다.

그리고 난 있지도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시비를 거는 재주는 없었다.

“평소 제 지론이 맞아요.”

“그렇지?”

막심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다음 이야기도 기억하나?”

“…….”

그다음 이야기는 무대 위로 올라가서 각자 악기를 들고 승부를 벌이려다가, 개입한 에르네스트와 리처드의 손에 의해 그만두게 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난 막심 선배와 함께 다니는 니콜라이 선배와 약속을 했었다. 학기가 다시 시작되고 나면 세 명이서 트리오로 연주를 해 보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하하, 괜찮아. 나도 잊고 있었으니까.”

막심 선배는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일부러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재차 사과하자, 선배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합주야 언제라도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런데 말이지…….”

연신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사그라들더니, 본론이 튀어나왔다.

“내가 오늘 지도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아나톨리라는 후배 녀석이 콩쿠르에 보낼 DVD를 보고 계시더라고. 그리고 나한테도 한 번 보아 달라 하셨는데.”

막심 선배가 이어 말했다.

“네가 나오더라?”

날 찾고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간 날 잊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아나톨리와 합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네 피아노를 보다 보니…… 네가 무슨 생각으로 반주를 거부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서 말야.”

막심 선배가 낮게 말했다.

“그런데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 곡은 그렇게 연주하면 안 되는 거였을걸?”

난 아나톨리의 연주에 맞추기보단, 내 피아노에 그가 맞추길 바랐다.

아나톨리는 마지막까지 한계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내 피아노의 존재감에 정면으로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나톨리가 있는 그대로 녹화해 주길 요청했으므로, 영상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막심 선배는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 낸 것이다.

“……맞아요.”

“알면서도 그런 거지?”

“…….”

막심 선배의 질문에 난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아나톨리가 절대 봐주지 말라고 했다고 답한들, 그건 핑계로조차 삼을 수 없는 멍청한 대답이었다.

난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그렇게 했다.

조금 반항적으로 올려다본 막심 선배의 얼굴은 묘한 의욕으로 충만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 붙잡고 연습실로 끌고 가고 싶은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막심 선배는 마지막까지 꾹 참으며 말했다.

“너랑 나, 그리고 니콜라이까지 우리 트리오 협연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안 그래?”

이미 결정 난 일이라는 듯한 어투였다.

나 역시 호기롭게 대답했다.

“마침 저도 협연자가 필요했었는데, 잘되었네요.”

“그래?”

“그래요.”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연달아 찾아오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