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53화 (153/1,277)

##  153화

나와 막심 선배는 음악적 견해 차이로 논쟁을 벌였고, 각자 악기를 들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큰 막심 선배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 끌 것 없이 당장 오늘 어때?”

“……오늘요?”

“그래.”

난 흠칫했지만 막심 선배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몸이 달은 태도로 재차 물었다.

“할 수 있는 곡이 몇 개나 되지?”

“…….”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가능한 레퍼토리들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수백 가지가 넘는 곡들 중에서 난 어느 곡도 집어낼 수 없었다.

약점을 제대로 찔린 나는 바보처럼 되풀이해 말했다.

“트리오 말씀이시죠……?”

“응.”

“……없어요.”

“응…… 뭐?”

막심 선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내 말에 그야말로 벙쪘다.

어이가 없다는 듯 선배가 말했다.

“없다고?”

“예.”

오로지 피아노 독주곡에만 몰두해 온 나는 협연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협연을 할 때에도 협연자들과 많이도 싸웠고, 독선적이고 건방지다는 말도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안 좋게 끝나게 되면 더더욱 협연을 기피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땐 또 같은 문제가 반복되곤 했다.

때문에 할 줄 아는 곡이라고는 필요에 의해서 익힐 수밖에 없었던 몇 곡 안 되는 피아노 협주곡뿐이었고, 실내악은 사실상 거의 전멸 수준이었다.

자신만만하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연주자들과의 협연에 약하다는 것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굉장히 심각한 약점이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해도 우물거리던 난 약간 반항했다.

“그런데 왜 트리오인 거죠? 저와 막심 선배 둘 사이의 일이니 듀엣으로 하면 되지 않나요?”

그땐 너무 자연스럽게 상황이 트리오로 진행되어서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많이 이상했다.

굳이 거기서 니콜라이 선배까지 끼어서 트리오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선배는 내 질문에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게 공정하니까.”

“……예?”

“응?”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서 되묻자 막심 선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당하다는 어투로 선배가 말했다.

“왜 못 알아듣는 것 같지?”

“뭘 알아들어야 하나요?”

본래 일대일 대결의 구도였어야 할 듀엣에 첼로까지 끼워 세 명의 구도로 유도하고는 그게 공정하다니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막심 선배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넌 실내악에 대해 정말 무지한 것 같네, 타티아나.”

“…….”

“내가 혼자 널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니콜라이까지 끼워 둘이서 맞서려는 것 같아 보여?”

하마터면 예, 라고 대답할 뻔했다.

실내악에 무지하다는 선배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실내악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바이올린에 첼로가 더해지면 단순히 현악기가 한 대에서 두 대로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 내서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모종의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막심 선배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너무하네, 타티아나. 날 너무 양아치로 보고 있는 것 아니야?”

“……전 사실 트리오라도 상관없어요.”

“자신만만하네? 그럼 이참에 피아노 협주곡으로 할까?”

난 늘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와 맞세워도 밀리지 않는 악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막심 선배는 마치 그 생각마저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막심 선배가 조금 놀리듯 말했다.

“그건 자신 없어?”

“지금 그렇게 절 도발하신들 소용없어요.”

살짝 짜증이 오른 나는 나도 모르게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선배야말로 자신 없으신 게 아니신지?”

“호오.”

막심 선배는 흥미롭다는 듯 묘한 소리를 내더니 가볍게 웃었다.

“양아치 선배라는 오명부터 벗어야겠군.”

장난스럽게 킬킬거리더니 돌연 눈빛을 바꾸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실내악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도 고쳐 줘야겠어.”

“…….”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날 뜯어고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울 텐데.

막심 선배는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물었다.

“좋아. 그럼 듀엣부터 하도록 하자. 언제가 좋아?”

“오늘이요.”

“화끈해서 좋군.”

손가락을 튕기더니, 막심 선배는 오후 수업 후에 어디로 가지 말고 4층의 연습실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전적으로 날 내려다보는 선배를 보면서 겁이 나거나 후회가 들긴커녕 조금 흥분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조금 문제가 있는 사람이긴 했다.

***

오후 레슨을 마친 뒤 아나스타샤를 먼저 보내고, 가방을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사실 거의 현악기 교실들이라서 올라갈 일이 없었다.

약간 생소함을 느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막심 선배가 가르쳐 준 연습실을 찾아냈다.

누군가 연습 중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작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대답이 있었다.

“들어와.”

누군지 묻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막심 선배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어, 타티아나.”

“죄송해요.”

문을 닫으며 사과했다. 레슨이 조금 길어져서 10분 정도 늦었기 때문이다.

막심 선배는 내 사과를 받고는 씩 웃었다.

“괜찮아. 난 네가 도망갈 거라 생각하진 않았거든.”

악의 없는 농담에 발끈해서 ‘저도 선배가 도망치시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대꾸하면 정말 싸움을 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막심 선배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이런 건 참 오랜만인데…… 그래도 내가 주도하는 게 맞겠지. 너도 마음에 안 들면 이야기 해.”

“예.”

이 연습실에서 나와 막심 선배가 팔씨름 따위를 공평하게 겨룰 수 있진 않을 것이다.

결국 각자 악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의견들을 관철시켜야 하는데, 거기엔 이러저러한 공시적, 묵시적 합의들이 필요했다.

막심 선배가 말했다.

“지금 나랑 네가 이 연습실에 있는 건 각자 의견 차 때문이고, 쌍방간 그 어떤 사감도 없어. 맞지?”

“예. 그래요.”

“고맙군. 그리고 오늘 하루로 무언가 결정 내리려는 것도 아니야.”

“……?”

이건 조금 의외였다. 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막심 선배가 부연 설명을 이었다.

“굳이 승패를 가리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럼 대체 왜 하는 거죠?”

“와, 나도 싸움이라면 밥 먹다가 숟가락 놓고 뛰쳐나오는 성격인데, 넌 한술 더 뜨는구나.”

할 말이 없었다.

내겐 음악가들 간에 생기는 모든 갈등은 결국 음악으로 승부를 낼 수 있고, 응당 상대도 그럴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막심 선배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선배가 양팔을 올리며 말했다.

“입장 차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루 잠깐 만나서 해결 볼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잖아?”

당연히 그렇다는 투였다.

“우린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니고.”

막심 선배의 말엔 상대의 근본 자체를 존중하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각자 신념을 위해 싸워야 할 일엔 싸우되, 그 결과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약간 납득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결국 스스로 판단해서 승복해야 할 일이란 점은 똑같았으니까.

막심 선배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이해해?”

“이해해요.”

“좋아.”

막심 선배는 만족했다는 듯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일단 곡은 네가 한 곡, 내가 한 곡 고르기로 하자. 그게 공평할 테니.”

“예.”

“그래서, 넌 무슨 곡?”

오늘 내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사실 아는 곡도 별로 없었고 최근 들어 연주 해 본 곡이라곤 한 곡뿐이었다.

“코렐리의 라 폴리아 소나타를 해도 될까요.”

“또 그 곡?”

“예.”

“불리할 텐데.”

“……?”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자, 준비해.”

그리고 막심 선배는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그리고 활을 들고 바이올린을 켜 보면서 음정을 확인했다.

난 가방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가볍게 건반을 연달아 오르내리며 처음 보는 피아노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았다. 조율은 잘 되어 있었고, 기계적인 결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작할까?”

“…….”

난 대답하는 대신 막심 선배를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치고 잠시 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따로 연구를 깊게 하진 않았지만, 아나톨리와 함께 몇 번의 합주 경험이 있던 곡이었기 때문에 난 주저 없이 화성을 전개해 나가려 했다.

내가 그리는 이 음악의 그림을 피아노로 견고하게 쌓아 나가기 위해 묵직하게 양손으로 화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

곧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갑자기 성큼, 내 소리에 파고들었다.

난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막심 선배는 태평한 표정으로 활을 움직였다. 다시 바이올린의 소리가 끼어들며 전체적인 소리를 뒤섞는다.

박자나 음정이 잘못되지도 않았고, 괜히 높게 치솟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소리의 부피와 고풍스러움 그 자체만으로 막심 선배는 바이올린으로 앞서 나갔다.

난 피아노 소리가 너무 지워져 버리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

무척이나 놀랐다.

그간 많은 바이올린 주자들을 봐 왔다. 그중엔 정말 대단한 연주자들도 많았다.

구아르바트 거리에서 마지막으로 봤었던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세상엔 정말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다.

하지만 함께 합주를 해 본 바이올리니스트 중엔 막심 선배가 가장 뛰어난 것 같았다.

보다 빠른 구간으로 넘어가자 막심 선배가 한층 날카롭고 섬세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빠르다 하더라도 딱히 비르투오시티를 뽐낼 만한 구간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거대한 칼날 같은 음색이 바이올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압도당하는 기분이 섬뜩했다.

난 피아노로 저 바이올린 소리와 실내악을 해야 했으므로 그에 걸맞은 부피와 두터움을 지닌 소리를 꺼내야 했다.

이미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라 기본적인 음량을 제대로 내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신경 써서 바이올린 소리가 어디론가 새어 나가도록 두지 않고 맞물릴 수 있는 소리를 궁리했다.

음표가 모자랐다. 난 그 어떤 곡을 대할 때도 음표가 많든 적든 불만을 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불만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것 가지고 무엇을 하라는 건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난 나도 모르게 몇 가지 화음을 보다 화려하게 편곡을 해서 치고 말았다.

하지만 악보에 있는 음표 이상의 음표들을 사용해선 안 된다.

그건 정말 실내악이라는 기준조차 벗어나 싸움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바보 같은 행위였다.

난 다시 순간적인 충동을 참고 악보 그대로 연주에 임했다.

제공된 음만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려니 금방 한계가 보였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그 위로 치솟았다.

작곡가가 제시한 피아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난 막심 선배가 말하는 반주가 무엇인지, 문득 깨달았다.

소리는, 음악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

연주가 끝나고, 난 양손을 늘어뜨리고 건반을 바라보았다.

연주 내내 나는 피아노로 화성과 박자만을 지켰다.

물론 그것이 이 듀엣에서 내 역할이었고, 아나톨리와 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아나톨리는 내 피아노 소리에 맞춰 잘 따라오며 서서히 발을 맞춘 느낌이라면, 막심 선배는 그야말로 날 철저하게 반주자로 사용했다.

잠시간, 머리가 멍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막심 선배가 막 바이올린을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자 선배가 말했다.

“뭐야, 그 눈은?”

“…….”

별로 실례될 눈초리를 하고 있진 않았다. 난 순수하게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날 보더니 막심 선배가 킥 하고 웃었다.

“하, 네 문제를 알겠다. 타티아나.”

대뜸 자신만만한 소리다.

“문제요……?”

“그래. 왜 네가 피아노에 반주의 역할을 맡긴다는 말 자체를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거부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막심 선배가 활을 들어 날 겨냥하며 말했다.

“제대로 된 바이올리니스트와 합주를 해 본 적이 없구나?”

난 입을 열어 반박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심 선배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반주라는 걸 도저히 해 본 적이 없는데 자꾸 반주라고 하니까 짜증이 났겠지.”

“…….”

분명 바이올린 곡에 피아노가 필요하다고 해서 함께 연주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주인공이 누군지는 뻔하고, 난 작곡가를 무시하거나 음악을 망칠 생각이 없으므로 주어진 음표만으로 충실하게 연주에 임한다.

하지만 그냥 피아노 파트만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바이올린 소리는 항상 너무 쉽게 파묻혀 버렸다.

그러면 바이올리니스트는 내게 말한다.

반주를 뭐 그따위로 하느냐고.

“…….”

자꾸 안 좋았던 생각들이 떠오르다가, 방금 합주한 코렐리의 라 폴리아 소나타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막심 선배는 내게 왜 연주를 그렇게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피아노가 반주 역할을 맡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그저 철저히 실력으로 보여 줬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반주라는 역할에 심취해 본 기분이 어때?”

이번엔 도저히 대들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대범하지 못하게 꼭 잘난 체를 하는 선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난 약간 골이 난 투로 대꾸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결정 내리기 없다고 하셨잖아요?”

“하하, 정말 자존심 세네.”

“…….”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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