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막심은 쓰게 웃었다. 피아노과 후배인 타티아나는 조금 토라진 것 같았다.
짧은 합주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음악적으로 깊게 교류할 수 있는 부분은 많았고, 타티아나는 그것들을 이해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
막심은 타티아나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며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막심은 속으로 웃었다.
그 역시 타티아나와의 짧은 합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들이 많았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그가 보기에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조금씩 비슷한 구석들이 있었다.
피아노는 대표적인 클래식 악기였지만, 세그먼트를 나누자면 완전히 다른 부류에 속했다.
모든 악기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오케스트라에 피아노가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다.
피아노는 그 어떤 악기와도 쉽고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악기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아니면 성에 차지 않아 한다.
어떠한 곡을 연주할 때 연주자의 성향이 악기에 그대로 투영되듯, 반대로 악기의 성향이 연주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피아노라는 악기의 차가움과 객관성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사람은 애초에 그러한 성향을 타고났다고도 할 수 있었다.
천부적인 교만함과 독자성, 자부심.
그러한 요소들은 사람들을 하여금 피아니스트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종종 형태를 가지고 두드러지기도 했다.
“…….”
타티아나는 태생이 피아니스트였다.
여태껏 어떤 연주자들과 함께 협연을 해 왔는진 모르겠지만, 도저히 자신의 피아노를 그저 반주라고 이름 붙이진 못하겠다고 고개를 젓는 그 자존심이나,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것으론 밀려나 버릴 것처럼 느껴지자 순간적으로 화려하게 편곡을 해서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려는 호승심.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꽤나 상대하기 힘든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협연자로 치자면 상당히 하자가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합주가 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목적을 잊지 않았고, 곧 실수를 자각하고 원 악보대로 돌아왔다.
그러곤 끝까지 엇나가는 일 없이 피아노의 역할에 충실했다.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 이상으로 구차하게 구는 일 없이 연주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주 자질이 결여된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막심은 큰 인심 쓴다 생각하며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아직도 친구들에게 존대해?”
“……? 그건 왜 물으시나요.”
“그냥 궁금해서.”
“……해요.”
타티아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막심은 에두르지 않고 다짜고짜 직구를 던졌다.
“사실 말을 곱게 써서 그렇지, 넌 그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지. 네 친구들은 알아?”
“말씀이 굉장히 심하신걸요?”
“아, 잘못 물었군. 네 친구들이 아니라 네 스스로는 알아?”
“…….”
타티아나는 살면서 이런 소리를 정면에서 듣는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막심을 노려보았다.
겉보기에 여리여리한 체격의 타티아나는 또래답지 않게 굉장히 차분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인다.
험한 말이라고는 일절 모르고, 다툼이라면 일단 피하고 볼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 타티아나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처음 본 타과 선배와 논쟁을 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악기를 가지고 겨루는 일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서슴지 않는 호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사람의 성격이 마냥 순진하기만 할 리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드러낸 상대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결국 샐쭉하니 대꾸했다.
“그래요. 전 성격 나빠요. 만족하셨나요?”
“응. 연주에서도 드러나던데.”
“…….”
대놓고 한 번 더 꼬집자 타티아나가 말문이 막혔는지 벙긋거렸다.
사실 그녀가 베르체노프 같은 거대한 재벌가의 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막심이 이렇게 막 대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막심은 일부러 신경을 끄고 악역을 자처했다. 타티아나가 원하는 것은 알랑거리는 바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전혀 감추려고 들지도 않더군?”
“……저도 알아요. 제가 독선적이고 최악의 협연자라는 건. 하지만 전 그렇게밖에 할 줄 몰라요. 앞으로 고쳐 나가야 할 일이지만…….”
“고쳐? 뭘 고쳐?”
자포자기하는 심정인지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심은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투로 딱 잘라 말했다.
“그냥 그렇게 살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항상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를 하라고.”
연주에 최선을 다하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해하기 힘든 듯했다.
막심은 그녀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을 다시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넌 옆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작정 최선의 반주만을 만들어 내지. 사실 바이올린 주자들은 그런 협연자를 굉장히 꺼려 해. 그냥 적당히 맞춰 줬으면 좋겠거든.”
“……그렇겠네요.”
“협연자로서 사랑받는 피아니스트는 혼자 잘나기만 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야. 성격도 연주도 유들유들한 부분이 있어야 같이 하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렇겠지요.”
조금 풀이 죽은 어투로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연에서 중요한 것은 밸런스와 탄탄함이었다.
그녀라고 모르지 않았다. 잘 알고 있지만, 도저히 맞출 수가 없는 것이다.
저 딱딱한 태도를 조금 무르게 만드는 것도 좋겠지만 막심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개중엔 나 같은 별종들도 있어서 말이지.”
“예?”
“피아노가 말랑말랑하지 않고 조금 진지하게 분발해 줘야 연주할 맛이 나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막심은 타티아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처럼 성격 안 좋은 피아니스트가 필요했단 말이지.”
“……!”
타티아나는 순간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뒤로 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가 부른답시고 쫄래쫄래 연습실로 따라온 주제에 참 빠른 반응이기도 하다.
막심은 그 부분에 대해선 정말 심각하게 이야기라도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자신이 경계당하는 건 피해야 했다.
“겁먹지 마. 난 그렇게 양아치는 아니라니까?”
“죄송하지만, 친구를 불러도 될까요.”
“너 진짜 재미있다.”
전 재미없어요, 제발 신경 꺼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게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막심은 더더욱 재미있어졌다.
막심은 타티아나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학기말 파티장에서 그랬듯 타티아나의 친구들은 그녀를 과보호하는 것 같았다.
만약 타티아나가 친구들을 불러내면 정말 재미없어질 것이다.
막심은 빠르게 말했다.
“그냥 가끔 합주하면 재미있겠다 생각했을 뿐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고.”
“반주자가 필요하시다면 저 말고 다른 분을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오전엔 안 그래도 협연자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타티아나는 이상하게 올곧은 데가 있어서 스스로 한 말을 뻔뻔하게 부정하는 것엔 영 재주가 없었다.
막심은 턱을 쓸며 말했다.
“흠,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반주자를 해 달라는 건 아닌데. 오해가 깊네.”
바이올린 소나타는 피아노가 반주한다.
하지만 피아노 소나타를 바이올린이 반주하진 않는다.
선율악기인 바이올린과 화성악기인 피아노의 태생적인 차이 때문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듀엣이라고 하면 거의 피아노가 반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막심은 딱히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훨씬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막심은 타티아나가 솔깃해할 만한 말을 꺼냈다.
“내가 트리오를 하자고 했던 것 기억 나?”
“예.”
“그건 네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어. 트리오는 상당히 재미있는 구조거든.”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농담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막심은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서 바이올린만으로도 타티아나의 피아노를 철저히 반주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에 첼로를 더해서 보다 확실하게 찍어 누르려 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트리오를 제안한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타티아나의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트리오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었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막심이 물었다.
“어떻게 할래.”
“……한 번이라면 좋아요.”
결국 하겠다고 할 줄 알았다.
막심은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좋아, 일단 그럼 재미있는 걸 시켜 줘야겠네.”
그리고 연습실 한쪽에 있는 악보의 바다에서 한참을 헤매던 막심이 이윽고 한 권의 악보를 찾아냈다.
먼지를 대충 툭툭 털어 낸 막심이 그걸 타티아나에게 내밀었다.
“자.”
“?”
바로 이렇게 곡을 줄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 놀라며 타티아나가 악보를 받았다. 제목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뜬다. 처음 본다는 반응이다.
막심이 여유롭게 물었다.
“이걸 해 보자. 얼마나 걸리겠어?”
“…….”
타티아나는 말없이 악보를 펼쳤다. 그리고 꽤 긴 악보를 처음부터 한 장씩 넘겼다.
악보는 수십 장이나 되었다. 타티아나는 자못 심각하게 악보를 살폈다.
그렇게 끝까지 다 훑어본 타티아나가 조금 난감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려운 곡이네요.”
그 말대로 이 곡은 결코 쉬운 곡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삐딱하게 막심을 올려다보았다.
“길이는 어지간한 협주곡이고…… 절 괴롭히시려는 건가요?”
“그 곡이 싫으면 다른 걸로 바꿔 줄까?”
“…….”
네가 정 못하겠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자존심을 살살 긁자 타티아나가 인상을 썼다.
“일주일만 주세요.”
“어렵다며?”
“할 수 있어요.”
상대적으로 음표를 훨씬 많이 다뤄야 하는 피아노과의 선수들이 얼마나 빠르게 곡을 익히는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많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만에 이 곡을 타티아나가 연주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 놀랄 것 같았다.
“너 다른 과제곡은 없어?”
“많아요.”
타티아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는소리를 할 수도, 아예 안 한다고 집어 던질 수도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트리오를 받아들였다.
막심은 그렇게 대답하는 타티아나를 살피며 혹여나 억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지 걱정했지만, 도전적인 표정 그 어디에도 그런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일주일 이따가 보자.”
“……예.”
타티아나는 말이 많지 않았다. 악보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작게 인사하고는 연습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굉장히 담백한 태도였지만 막심은 타티아나가 일주일 후,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확신했다.
막심은 닫힌 연습실 문을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니콜라이. 아직 학교야?”
- 응.
“와 봐.”
짧은 통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후 연습실 문이 열리고 니콜라이가 들어왔다. 큰 키에 안경을 쓴 모습이 천상 범생이 같지만 막심은 니콜라이가 만만찮은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았다.
막심이 말했다.
“타티아나가 왔다 갔어.”
니콜라이는 옆 의자에 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애를 정말 불렀구나. 차였어?”
“아니, 뭘 차여. 미쳤냐?”
“미친 짓 할 것 같아서.”
너무 자연스러운 어투라 욕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친구의 어법에 익숙한 막심은 고개를 탈탈 털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긴 해.”
이 연습실에서, 아니 학기말 파티장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은 정상적이라기엔 조금 문제가 있긴 했다.
“처음엔 그냥…… 베르체노프라고 하니 처음엔 인사나 좀 하면 좋겠다 싶었지.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싸우게 되고…….”
세상살이에 있어 계산이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하는 막심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할 수 있게 될지 몰랐다.
타티아나는 막심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완전히 반대였다. 막심이야말로 타티아나에게 완벽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막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있잖아, 그냥 적당히 져 주는 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거든? 그게 맞잖아? 후배고. 여자애고.”
“베르체노프고.”
“그래. 베르체노프고.”
평상시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거나 일부러 도발하고 악역을 자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좋게 좋게 이야기하고 잘 구슬려서 길게 연락하고 지낼 수 있도록 했겠지. 막심은 그런 방면에 있어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은연중에 보이는 태도는 막심을 하여금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게 아니라니?”
막심은 확신 어린 투로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 애는 날 상대조차 안 했을걸.”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 타티아나는 자신의 배경도 나이도 그 무엇도 무기로 내세우지 않았다.
철저히 음악 그 자체만으로 결투장에 서서, 깔끔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 성격 탓에 어쩔 수 없이 조금 화가 난 듯 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떼를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막심에게 그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다. 타티아나에겐 핑계조차 없었다.
“상당히 재밌는 애야.”
낮게 중얼거리던 막심이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렸다.
“야, 니콜라이. 트리오는 해야겠어.”
“…….”
“여전히 안 내켜?”
막심이 아는 니콜라이는 잘 모르는 사람과 즉흥적으로 합주를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무조건 끌어들여야 했다.
니콜라이는 막심을 힐끗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그렇진 않아. 약속한 내용이니까.”
학기말 파티장에서 곧장 무대에 오르려던 것을 타티아나의 친구들에게 저지당하고, 3월 초에 합주를 하기로 약속했던 것을 니콜라이는 잊지 않고 있었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던 니콜라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막심에게 물었다.
“친선이지?”
“그럼 너랑 내가 합심해서 건방진 피아노과 후배에게 진짜 매운 맛이라도 보여 주게? 그건 정말로 미친놈들이나 할 짓이잖아.”
“왜? 그것도 나쁘지 않…….”
“아, 빌어먹을. 내가 실수했네. 넌 정말로 미친놈이었지. 갑자기 트리오고 뭐고 취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위기감이 든다.”
막심은 어이가 없어서 욕설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