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55화 (155/1,277)

##  155화

방음 처리가 된 연습실에 홀로 앉아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작게 울리는 목소리들과, 발소리. 넓고 잔잔하게 퍼지는 웃음소리.

고개를 들자, 해가 낮아졌는지 창밖에서 들이치는 햇살이 연습실 구석구석까지 깊게 스며든다.

여유로운 금요일 오후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교내에 맴돌고 있다.

“……후.”

난 이쯤에서 연습을 마치기로 하고 건반에서 손을 내렸다.

보면대 위에는 막심 선배에게서 받은 악보가 올라가 있었다.

이번 주 주말에 이어서 공부하고 다음 주 월요일엔 미하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천천히 악보를 읽으면서 마지막으로 곡을 체크했다.

“타티아나. 있니?”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연습실 문 밖에서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나스타샤가 들어왔다.

“아나스타샤.”

그녀도 이제 막 레슨을 마친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방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연습 중이야?”

“아뇨, 방금 마쳤어요.”

“그래? 무슨 곡인데?”

“피아노 트리오예요.”

“트리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난데없네. 미하일 선생님이 준비하래?”

“아뇨.”

며칠 전 막심 선배와 듀엣을 했을 때, 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에게 설명을 하려면 처음부터 해야 했다.

난 악보를 내려놓고 말했다.

“아나스타샤. 혹시 저번 학기말 파티에서 봤었던 선배들 기억하세요?”

“선배?”

아나스타샤는 그 기억을 곧바로 떠올리진 못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 하는 탄성을 내며 말했다.

“알지. 이름은 모르겠지만.”

“잊어버리셨나요…….”

“잘 모르겠는데.”

나도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아나스타샤는 정말 관심 없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파티장에서 동석했던 선배들인데 한 명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조금 심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뜬금없이 다른 부분에서 날 기습해 왔다.

“그것보다 타티아나. 넌 그날 나한테 배운 왈츠 동작들 기억해?”

“…….”

난 헛숨을 들이켰다. 왈츠?

그런 걸 배우기도 했었지.

“무, 물론이죠.”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날 전혀 신용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조금 슬프다.

핑계는 많았다. 그 후로 연습할 기회도 없었고.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몸치에 가까웠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반사 신경과 리듬감각을 필요로 하는 피아노 연주자를 업으로 하면서 몸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최악에 가까운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핑계들을 곱씹으며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조금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가르쳐 준 왈츠 동작들을 내가 잊어버렸다고 해서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잊어버린 건 다시 가르쳐 주면 되니까.”

“……예?”

“어쨌든 그 선배들이 왜?”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화제를 되돌렸고 난 대답했다.

“아…… 그날 바로 무대에 올라가려다가 다음으로 미뤘잖아요? 그걸 하자고 해서요…….”

“그 선배들도 웃긴다. 그걸 진짜 하재니?”

“……우스운가요?”

사실 나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진짜 하자고 한들 별로 잘못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난 받아들였고, 지금 와선 한 번이라도 많은 합주 경험이 필요하니 이익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타티아나…… 그렇게 막 합주 요청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사실 전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전 합주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기회가 있을 때 하고자 하는 건 알겠지만…… 합주 같은 건 되도록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뭉쳐서 하는 게 좋아.”

“……왜요?”

“그게 덜 귀찮으니까.”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 필요에 의해 합주를 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학생들끼리 합주를 하는 것 사이에 차이는 없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합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무언가 더 길게 설명하려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참는 듯했다.

“아나스타샤?”

“……이번에도 네가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되도록 조심해. 필요하다면 나도 부르고.”

아나스타샤는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잔소리꾼으로 여길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그것을 내 탓이라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각자의 자유로 밀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성격은 되지 못했다.

내 행동은 항상 그녀를 하여금 끼어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거기엔 내 잘못도 분명 있었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그 선배들은 좋은 사람 같아 보이니까요. 괜찮겠지요. 합주도 재미있을 거예요.”

“……너 그거 나 안심시키자고 하는 소리야?”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이미 하기로 한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순 없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사실 음악학교에서 각각 다른 악기들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합주를 하는 건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고…….

“잠깐만 타티아나…… 너 그러면 주말 내내 연습해야겠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렇겠지요?”

“우리 집에 오기로 했던 건?”

“?”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돌연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우울해진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힘없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다음에…….”

“갈 거예요.”

“뭐?”

낮게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체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나스타샤의 집에 가기로 해 놓고도 그걸 잊어버리고 주말 내내 연습해야 할 곡을 더 받아 왔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조금 섭섭한데.

“제가 안 간다고는 한 마디도 한 적 없잖아요? 왜 다음을 이야기하시나요.”

“그래도 너 그 트리오 연습…….”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구하려 했어요.”

애초에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곡을 연구할 생각이었다.

혼자서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기엔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

그렇다면 친구와 함께 연구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전 그러고 싶은데…… 싫으신가요?”

“싫다고? 누가 그래?”

아나스타샤가 빠르게 대답했다.

다행히 그 모습에선 방금 전처럼 기운 빠진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

토요일. 해가 뜨자마자 아나스타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라도 괜찮으니 집에 오면 된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

난 아나스타샤를 집 앞까지 몇 번 차로 데려다준 적이 있어서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안다.

그녀의 집은 모스크바에서도 부유한 동네인 프리스넨스키 지구의 주상복합아파트 꼭대기 층, 즉 펜트하우스였다.

평소에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는 것 같고, 그녀 역시 꽤 유복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난 점심 전에 가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빠르게 채비를 갖췄다. 나제즈다가 날 도와주었다.

“외출하신다고요? 아가씨.”

“예. 아나스타샤에게 초대를 받아서요.”

“아하, 그분?”

내 머리를 정돈해 주던 나제즈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착한 분이었죠. 아가씨가 감기에 걸렸을 땐 간호도 해 주셨고.”

“맞아요. 그런 적도 있었어요.”

저번 학기, 내가 감기로 앓아누웠을 때 병상에서 간호를 해 준 것은 나제즈다가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집에 가지도 않고 밤새 꼬박 내 수발을 들어 주었다.

나제즈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번 주말은 아가씨가 주무시고 오시는 것이로군요?”

“예?”

난 거기까진 생각도 안 했었다. 하지만 나제즈다는 당연한 일 아니냐는 듯 태연히 말했다.

“그런 약속 아니신가요?”

“전…… 오늘 올 생각이었는데요.”

“아나스타샤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전화를 해 보시는 게?”

“…….”

전화를 하면 아예 그렇게 확정되어 버릴 것 같아서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고 생각하니, 그냥 편하게 친구 집에 놀러가는 기분이었다가 갑자기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뭐라 깔끔하게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멍하니 있는데, 나제즈다는 결정을 재촉하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편한 옷과 파자마는 가지고 가시죠.”

“……그럴까요.”

괜히 나만 어렵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아나스타샤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이미 한 방에서 며칠 동안 함께 머문 적도 있었고. 이제 와서 긴장할 사이가 아니었다.

잘 모르겠다. 가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나제즈다가 챙겨 주는 대로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빅토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급하게 끄고는 다가왔다.

“지금 가십니까?”

“예. 빅토르. 그런데 담배 피우시는 건 다 피우셔도 되는데요…….”

“다 피웠습니다.”

“길던데요.”

“전 원래 한 모금이면 됩니다.”

빅토르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는 씩 웃더니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타시죠.”

뒷좌석에 올라 가방을 내려놓고 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자 빅토르가 운전석에 올랐다. 그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난 백미러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빅토르를 훔쳐보다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빅토르.”

“예.”

“오늘은 빅토르 혼자인가요?”

“그렇게 되겠습니다. 소로킨과 자하르는 다른 일을 조금 하는 중이라.”

빅토르는 그냥 다른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아버지가 시킨 임무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

생각해 보면 소로킨이나 자하르는 내 경호 업무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빅토르는 내가 저택 밖으로 나갈 때 내 옆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빅토르가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음, 친구분하고 재밌게 보내시고……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하실 땐 전화 주시면 됩니다.”

난 이제 그 대기라는 것이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는 식의 대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빅토르가 말하는 대기란 내가 있는 곳 주변에 있을 위험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을 뜻했다. 아마 어마어마하게 바쁠 것이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그 아파트는 경비시설도 잘 되어 있을 텐데. 빅토르도 쉬다 오셔도…….”

“하하, 그런 말씀 마시죠. 제가 아가씨를 두고 어디 맘 편히 쉬겠습니까?”

“…….”

달리 빅토르에겐 할 말이 없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빅토르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 후로도 나와 빅토르는 이러저런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빅토르는 유쾌했고 언제나 그렇듯 농담에 선이 없었다.

심지어 방학이 되면 날 집에 일주일간 묶어 놓고 휴가를 가겠다는 기막힌 여름휴가안을 밝히기까지 했다.

소로킨이 들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며 경을 쳤겠지만, 난 즐겁게 맞장구치며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내 연습실에서 꼼짝도 안 할 수 있으니 부디 그리해 달라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조금 심각하게 들릴 수 있는 이러한 농담들은 빅토르가 정말 날 지겨워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역시 날 믿기 때문에 이런 농담들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실없는 소리들을 하며 아나스타샤가 사는 주상복합아파트로 향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자 50층도 더 될 법한 거대한 아파트가 보였다.

난 뒤돌아 빅토르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다녀올게요.”

“저녁엔 전화 한 번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었고 난 그 옆의 단말기로 가장 위층의 호수를 입력했다.

잠시 후, 단말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타티아나니?

“아나스타샤.”

- 잠깐만, 내려갈게!

“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툭 끊어졌다. 난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냥 알아서 올라가도 되는데, 아나스타샤는 굳이 내려와서 날 데리고 가고 싶은 듯했다.

그대로 조금 기다리자, 유리문 너머에서 평상복 차림의 아나스타샤가 뛰어나왔다.

“타티아나!”

그녀는 달려 나와선 날 가볍게 포옹했다. 바로 어제도 봤었는데, 며칠은 못 본 사람 같다.

날 놓아준 아나스타샤가 살갑게 말했다.

“일찍 왔네? 점심은?”

“안 먹었어요.”

“잘됐다! 어서 들어와.”

아나스타샤는 내 팔을 당기며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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