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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56화 (156/1,277)

##  156화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난 숨을 들이켰다.

아파트인지 호텔인지 백화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로비가 날 맞이했다.

멋진 건물이라면 많이 봐 왔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난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쳤는데요, 아나스타샤.”

“아, 저건 우리 거 아니야.”

“……?”

우리는 눈앞에 뻔하게 있는 엘리베이터를 두 개나 그냥 지나쳐 갔다.

심지어 하나는 막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있어서 빠르게 잡아타면 될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장난스레 물었다.

“왜, 내가 걸어 올라가자고 할까 봐?”

“앰뷸런스는 불러 놓고 해요.”

농담이 아니었다. 꼭대기 층까지 걸어올라가면 난 지쳐 죽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었다.

“걱정 마. 우린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거니까.”

“방금 지나친 건요?”

“이 아파트에 펜트하우스는 딱 네 동이거든. 그리고 전용 엘리베이터로밖에 못 올라가.”

“전용 엘리베이터요?”

“응.”

전용 엘리베이터라는 말이 굉장히 생소하게 들린다.

아나스타샤는 날 놀래켰다는 것에 굉장히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는 늘 내게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걸 좋아했다.

“저거야. 우리 집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

“…….”

척 보기에도 보통 엘리베이터와 생긴 것이 달랐다.

입구에 무언가 고풍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었다. 어딘가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처럼 생겼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서자 아나스타샤가 버튼을 눌렀고, 곧바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내가 여태껏 본 엘리베이터 중 가장 특이한 구조였다.

바깥이 보이는 통유리 구조나 고급스러운 느낌 같은 건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신기했던 건 버튼이 단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버튼과 내려가는 버튼.

아나스타샤는 그중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고, 엇 하는 순간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치솟아 최상층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최상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난 커다란 유리문을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문 옆에 있는 단말기에 엄지손가락을 눌렀고,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들어서며 내게 말했다.

“들어와, 타티아나. 여기서부터 우리 집이야.”

“실례합니다.”

조금 쭈뼛거리며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난 이 정도 집이라면 전용 엘리베이터를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넓네요.”

“무슨 소리야? 타티아나. 네 저택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될 텐데.”

“…….”

어디까지나 아파트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 비하면 작겠지만, 일반적으로 복층 펜트하우스는 작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일단 그 가방은 내 방에 놓자. 이리 와.”

날 데리고 아나스타샤는 앞서 나가면서 주위를 설명했다.

“여기가 거실이야. 별거 없지? 저기 있는 열대어는 엄마 취미. 그리고 저 방은 오빠 방.”

“부모님이나 오빠는 지금 안 계신가요?”

“응. 부모님은 저녁쯤엔 돌아오실 거고 오빠는…… 아마 내일 오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 어린 목소리로 말하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날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너 오늘 급하게 돌아갈 거 아니지?”

“급하게요?”

“그래. 별일 없다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깜짝 놀라 쳐다보자 아나스타샤는 덩달아 당황했는지 조금 말을 더듬으며 이어 말했다.

“아니, 아니. 나도 알아. 넌 연습해야 할 곡도 많다는 거…… 내일은 일찍 돌아가도 돼. 그러니까 오늘은…… 안 돼?”

난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제즈다의 예상이 이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아나스타샤.”

“정말?”

“예.”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설령 아무 생각 없이 왔더라도 하루 묵고 가라는 말에 그럴 순 없다고 답할 생각은 없었다.

내 승낙에 아나스타샤가 횡설수설했다.

“그, 그래. 난 음…… 네가…… 아니다. 그럼 저녁엔 내려가서 편한 옷이라도 사야겠다. 그렇지?”

“아뇨, 그건 괜찮아요. 제가…….”

“응?”

사전에 이야기도 안 하고 이미 옷가지 등을 다 챙겨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조금 창피했다. 난 가방을 들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지고 왔어?”

“……예.”

작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무슨 가방을 싸 들고 왔나 했더니…… 너 이렇게 준비성 좋았어?”

“…….”

나제즈다가 챙겨 주었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 봐야 소용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렇게 놀란 만큼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층 활발하게 날 이끌었다.

엄청나게 넓은 집을 지나치며 여기저기 설명해 주던 아나스타샤가 한 방 앞에 멈췄다.

“자, 여기가 내 방이야.”

새삼 긴장이 되었다.

비단 아나스타샤뿐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친구의 집, 방에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나스타샤를 따라 들어가자 그녀의 취향대로 꾸민 방이 보였다.

특별하게 귀엽거나 아기자기한 느낌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기본적으로 그런 귀여운 취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 특유의 모던하고 화려한 취향은 책상 하나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원목 상판과 철제 다리를 지닌 책상은 꽤 특이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 특이한 소재로 보이는 베이지색 벽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창가의 침대와, 방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음반과 책장.

얼핏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을 보니 아나스타샤는 나처럼 항상 클래식만을 듣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팝 음악들도 꽤 많이 보였다.

그리고 거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야마하 그랜드피아노와 업라이트 피아노.

이건 조금 황당했다. 왜 방에 피아노가 두 대나 있지?

“피아노가 두 대나 있으시네요?”

“너네 집처럼 거실에 내놓거나 별관을 둘 순 없어서. 내 물건은 내 방에 욱여넣은 거지.”

욱여넣었다고 말 할 정도라면 업라이트 피아노는 정리해도 좋을 텐데.

의뭉스럽게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킥킥 웃었다.

“저쪽에 있는 업라이트는 사일런트 피아노로 개조해 놓은 거야. 밤에도 연습할 수 있게.”

“아…….”

아파트에서 그랜드피아노를 칠 수 있게 이 방은 기본적으로 방음 처리가 되어 있긴 하지만, 조용한 밤에는 아무리 방음 대책이 잘 되어 있어도 소리가 새어 나갈 것이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아날로그 피아노의 건반 느낌에 소리를 헤드폰으로도 들을 수 있는 사일런트 피아노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져 봐도 되나요?”

“그럼.”

난 그랜드피아노가 아닌 업라이트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서 건반 덮개를 열고 건반을 만져 보았다.

수백 년의 개발을 거쳐 현대에 있는 피아노는 크게 세 종류였다. 그랜드피아노, 업라이트 피아노, 디지털 피아노.

이 피아노들은 건반의 수도 88개로 같고 그 역할도 같아서 보통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 종류의 피아노는 그 내부적 구조가 현격하게 달라서 사실상 아예 다른 악기로 분류해야 했다.

나같이 건반에 예민한 사람은 단지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

살며시 건반을 눌러 본 나는 일반 업라이트 피아노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느꼈다. 건반을 통해 해머가 움직이고, 스프링으로 되돌아온다.

중력으로 건반을 되돌리는 그랜드 피아노와 달리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 특유의 시스템이 손끝을 통해 그대로 느껴진다.

클래식 음악들을 연습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난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좋은 피아노네요.”

“대체 그거 만져 보고 뭘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난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더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다.

“어쨌든 피아노는 조금 이따가 만지고, 나가자.”

그렇게 나가자고 말한 아나스타샤는 날 끌고 정말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옥상. 테라스도 있어.”

“와…….”

최상층의 펜트하우스는 옥상까지 포함이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따로 지붕과 벤치가 있었고 한쪽에는 파티장처럼 만들어 놓은 테라스도 있었다.

그리고 정원이 보였다. 여전히 추운 3월이라 정원에 꽃이 피어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공들여 꾸며 놓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름이 되면 볼만해질 것 같았다.

“정원이 정말 예쁠 것 같네요.”

“정원도 엄마 취미거든. 여름에 와서 봐.”

“꼭 그럴게요.”

비단 여름뿐이 아니라 그사이에도 몇 번이고 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나스타샤와 난 옥상에서 내려왔다.

이 정도면 얼추 살펴볼 만한 곳은 다 본 것 같다.

물론 안방이라든지, 아나스타샤의 오빠의 방이라든지 보지 못한 방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그런 부분은 내가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와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일단 점심부터 먹자.”

슬슬 배고플 시간이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날 식탁에 앉혀 놓고는 냉장고를 뒤적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냉장고와 오래 씨름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몇 초 만에 포기했다는 듯 돌아섰다.

“음…… 뭐라도 배달시킬까?”

“배달요?”

“그래. 피자 먹을래?”

그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색다른 것도 어떨까 싶다.

난 식탁에서 일어나 열려 있는 냉장고 안을 살폈다.

남의 집 냉장고를 멋대로 구경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뭐가 있는진 알아야 앞으로 뭐라도 할 수 있었다.

“…….”

냉장고 안을 보니 그래도 꽤 이것저것 많이 들어차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배달을 시키자고 했던 것은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안에 있는 것들로 뭘 해 먹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요리를 하는 건 어떤가요?”

“뭐? 요리? 난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

아나스타샤가 난색을 표했다.

난 저택의 쉐프인 드미트리에게 배웠던 것들을 써먹을 때가 드디어 왔음을 깨달았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

점심 메뉴는 정말 별거 없었다.

드미트리는 다양한 자격증을 지닌 쉐프였지만 내가 드미트리에게 배운 것은 복잡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식이 아닌 기본적인 러시아 가정식이었다.

당장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죽인 카샤나 샐러드인 비네그렛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피자를 주문해서 먹는 걸 원하지 않았을까 걱정도 들었지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나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꽤 즐거워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었는데도 맛있었어! 타티아나.”

“그렇죠? 아나스타샤도 혼자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솔직히 혼자는 귀찮아서 못 할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솔직히 말했고 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혼자서는 안 해요. 전 사실 그리 음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제 입에 넣을 음식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죠.”

나 혼자 먹고 치울 식사라면 굳이 나도 요리까지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사 먹든지 그것조차 안 된다면 그냥 굶고 말 것이다.

그 정도로 난 먹는 것에 그닥 관심이 없다.

“하지만 다른 분에게 드릴 음식이라면 손이 가더라고요.”

내 입에 넣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사람이 내가 만든 것을 먹어 주는 것은 꽤 보람찬 일이었다.

혼자 하고 혼자 즐기는 것으로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는 이 일련의 행동들은 사실 음악과도 조금 비슷했다.

아나스타샤는 식탁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멍하니 말하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깐만, 타티아나. 설거지까지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서서 막 상아색 고무장갑을 끼다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예. 마무리를 해야죠?”

“그래도 손님인데 그냥 내버려 둬.”

“싫어요.”

난 딱 잘라 말했다. 저녁이 되면 아나스타샤의 가족들도 돌아올 텐데 이대로 식기들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고집스럽게 마저 고무장갑을 다 끼자 아나스타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옆에 섰다.

“대체 집에 쉐프까지 두고 있으면서 설거지는 또 언제 해 본 거야?”

“아하하…….”

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설거지용 스펀지를 들었다.

그렇게 내가 식기를 씻고, 아나스타샤가 헹궈서 식기건조기에 넣는 것으로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후아.”

거실의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아나스타샤가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거의 한 뼘은 크다. 가끔은 같은 나이가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가가서 소파 옆에 앉으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식사도 다 했으니까…….”

“피아노 치실래요?”

“……응?”

난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방엔 마침 피아노가 두 대나 있었다.

레슨실이 아닌 일반 연습실에선 좀처럼 할 수 없는 연탄곡들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식사한 것을 소화시키는 데에도 좋을 것 같고…….

아나스타샤는 두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날 바라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타티아나지.”

“예?”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아나스타샤는 허리를 튕겨 소파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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