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난 팔을 들어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왼팔로 오른팔을 죽 당기다가,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쳐서 웃어 버렸다. 어쩐지 학교의 연습실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누가 먼저 할까요?”
아나스타샤와 함께 피아노 연습을 할 땐 각각의 곡을 가지고, 순서를 정해 번갈아 가며 조언을 구하거나 연구를 하곤 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타티아나. 네 곡 먼저 하자. 피아노 트리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난 어쩐지 그녀가 내 연습만 도와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아나스타샤 요즘 쇼팽 발라드 1번 하고 계신다고 하셨죠? 아직도 하고 계신가요?”
“응? 어…… 응.”
“그 곡 먼저 해요. 한 번도 못 봤어요.”
“굳이? 그건 나 혼자 해도 되니까 트리오 연습 하는 게 어때?”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난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는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내 개인 연습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야말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음악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난 아나스타샤의 팔을 질질 끌고 와서 피아노 앞에 강제로 앉혔다. 물론 내가 그녀를 강제할 수 있을 힘이 되진 않지만 그녀는 내게 끌려와 주었다.
난 고압적으로 말했다.
“시작해 주세요.”
“얘가 왜 이래. 아니, 잠깐만…….”
“어서요.”
무작정 보채자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악보를 보면대 위에 올렸다. 아직 악보를 다 외우진 못한 모양이다.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려다가, 악보를 넘겨 주기로 했다. 옆자리에 서자 아나스타샤가 날 올려다보았다.
“페이지 터너 해 주려고?”
“예.”
“……고마워.”
항상 있는 일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할 생각임을 느꼈는지, 아나스타샤 역시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아나스타샤는 첫 장을 잠시간 노려보더니 곧 양손을 들어 첫 음을 짚었다.
“…….”
쇼팽의 발라드 네 곡 중 첫 번째 곡.
워낙에 유명하고 너무 자주 연주되는 명곡 중의 명곡이었다. 많은 연주자들이 이 곡을 거쳐 가고 또한 즐겨 연주한다.
하지만 그 난이도는 결코 쉽지 않다.
최적화된 화음으로 모든 표현을 이끌어 내야 하기에 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곡이다.
난 악보를 넘겨 주면서 일단 연주를 감상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직 악보를 다 외우지 못한 그녀가 보이는, 자신감이 부족한 음색과 미숙한 테크닉들이 자꾸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전체적인 큰 음악을 아나스타샤가 파악하고 있는지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익숙하지 않은 패시지를 처리하려다가 손이 꼬인다.
살짝 박자를 절다가, 그것을 메우겠다는 듯 이번엔 조금 빠르다. 동시에 음량은 불필요하게 커졌다가, 다시 흔들렸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는 음악은 다시 균형을 찾았고 유려하게 이어져 나갔다.
“…….”
연습량이 부족하다면 제대로 된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마지막 코다 부분을 깔끔하게 연주해 내며, 아나스타샤는 연주를 마무리 지었다.
손을 놓고 그녀가 날 올려다보았다.
“타티아나.”
“예.”
“너 영화 피아니스트 봤어?”
“……?”
“봤겠지?”
“봤지요.”
뜬금없이 웬 영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영화 보면 2차 세계대전 배경으로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인 주인공이 나치 장교 앞에서 이 곡을 쳐서 살아남잖아?”
“……예?”
“그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아나스타샤. 제가 뭘 했다고요?”
“네가 뭘 하진 않았고, 그냥 기분이 그랬다고, 기분이.”
그만큼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긴장이 되었다는 말이겠지만, 비유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난 짐짓 냉엄하게 말했다.
“그 말씀만 안 하셨으면 살려 드리려 했는데, 안 되겠는데요.”
“뭐? 안 살려 줄 거야?”
“일단 두 번째 페이지, 발전부부터 같이 볼까요??”
“어, 어? 거기부터?”
당황해하는 아나스타샤의 옆에 다짜고짜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기겁하며 허리를 뒤로 뺐지만 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 기다란 프레이즈 말이죠, 조금 더 길게 노래하듯 뻗어 나가야 하는 부분이지 않나요? 왜 도중에 끊는 거예요? 전 아나스타샤의 해석이 듣고 싶어요.”
진짜 악독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단 심정으로 마구 찔러 대니 아나스타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부분 말이지…… 그냥 어…… 폴리니 음반 들어 보니까 그렇게 하던데?”
“그냥이라는 게 어디 있나요? 짐머만의 음반은 들어 보셨어요?”
“들어는 봤는데…….”
“그렇다면 아시겠네요. 그리고 이 분산화음 루바토가 너무 늘어져요.”
“여기?”
아나스타샤는 내가 말한 부분을 다시 연주했고, 똑같이 늘어지는 경향이 드러났다.
“예. 그 부분요. 조금 더 담백하게 해야 하지 않나요?”
“싫어.”
“예?”
마구 밀어붙이다가 갑자기 철벽에 머리를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띵하다.
옆을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내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난 거기 그냥 그렇게 치고 싶은데…….”
“…….”
딱히 나에게 저항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순수해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그 눈을 보며 난 웃어 버릴 뻔했다.
역시 아나스타샤는 내가 뭐라 떠든들 쉽게 말려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추구하는 피아니즘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난 어깨로 아나스타샤를 조금 밀어낸 뒤 같은 부분을 다르게 연주했다.
완숙도만 놓고 보자면 내 쪽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내 해석을 아나스타샤에게 강요하진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내미는 것은 항상 강요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제시였다.
아나스타샤는 내 연주를 보고 자신의 연주를 다시 해 보고, 빠르게 피드백을 한다.
아나스타샤 역시 굉장히 많은 재능을 타고난 천재이니만큼 순식간에 연주의 수준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 역시 아나스타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배운다.
우리의 연구 시간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
피아노과 학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하는 연구는 산만하고 복잡하기도 했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가 함께 앉아서 악보를 가운데에 놓고 있었다.
그 옆엔 참고 서적들, 빌린 악보에 필기를 할 수 없어서 펼쳐 놓은 공책과 낱장의 종이들, 시디플레이어와 헤드폰,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등 온갖 것들이 널려 있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활용해 한 곡을 연구 중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아까 입이 심심하다며 가져온 과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분명 바이올린이 이끌어야 할 부분 같은데 업라이트로는 이 소리를 낼 수가 없잖아. 타티아나. 너 이거 알아듣겠어?”
“알아듣긴 해요.”
“그럼 뭐 해? 그냥 이상한 듀엣곡처럼 되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섬세한 음악적 표현과 완성도 등을 따라가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연습하는 데에 있어선, 솔직히 말해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도와줄 피아노가 없을 땐 홀로 노래를 부르면서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연습을 도와줄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했다.
“상관없어요, 아나스타샤.”
“상관이 없긴 왜 없어? 아, 이거 그리고 너무 어려운데.”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며 악보를 툭툭 치듯이 뒤로 넘겼다. 그렇게 악보를 훑어보던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선배들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45분짜리 곡을 주고 일주일 내로 만들어서 같이 합주를 하자고 한다고? 장난해, 지금?”
“…….”
내가 하겠다고 한 것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참고 있던 짜증이 폭발한 것 같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너한테 장난을 친 거야.”
“아, 아뇨. 아나스타샤. 아니에요.”
막심 선배가 날 가지고 놀아 보겠다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전 이제 조금만…… 음, 가다듬는 것을 도와주시면 금방 합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도 참…… 벌써 다 외웠다니 기가 막히지만…….”
수십 페이지가 넘는 악보를 훑다가 탁 덮어 버리며 아나스타샤가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날 부른다. 한 번 더 듀엣을 부탁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바이올린을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예?”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반문하자 아나스타샤는 작게 실소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
“아, 피아노가 싫다는 건 아니야. 난 피아노가 제일 잘 맞으니까. 그런데 너랑 있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피아노 듀엣보다는…….”
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면 딱히 반대하진 않았다.
“배워 보시는 건 어때요?”
“뭐?”
“바이올린요.”
이전에 지나가듯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말하긴 했는데 다시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저도 어렸을 때…… 배웠는데 나쁘지 않아요. 음색을 가지런하게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요.”
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피아노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잘 칠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교수님의 추천으로 배우게 된 것이었고, 어느 정도 배우고 나선 다시 피아노에만 몰입했지만 잠깐이나마 배웠던 바이올린은 확실히 도움이 되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천재이니 아마 바이올린을 배운다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고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툭 말했다.
“생각해 볼게.”
그렇게 짧게 이야기를 정리한 아나스타샤는 한결 상쾌해진 얼굴로 기지개를 쭉 펴며 시계를 보았다.
“몇 시지?”
나도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6시였다.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시작한 연습은 벌써 6시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난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말이 6시간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연습하는 쇼팽 발라드 1번의 연주 시간은 약 10분이었고 한 번 연주하고 이러저러한 의견 교류를 하면 30분이 지나간다.
그렇게 서너 번만 돌면 2시간인 것이다.
내가 연구해야 하는 트리오는 더 심했다. 전체 연주 시간이 45분이었다.
헤드폰으로 한 번 듣고, 이야기를 좀 하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한 번 연주해 보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2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 혼자 했으면 아마 더 걸렸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도와주어서 얼마나 시간이 절약되었는지 모른다.
“슬슬 쉴까?”
“좋아요.”
아나스타샤는 목을 까딱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도 올 시간이고…… 그런데 괜찮지? 타티아나.”
“괜찮냐니요?”
“우리 부모님 보는 거.”
내가 그녀의 부모님이 없을 때 슬쩍 와서 놀다가, 부모님들이 돌아오시면 허겁지겁 도망치기라도 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난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엇이 걱정되는지, 아나스타샤는 약간 불안한 눈길로 날 돌아보았다.
난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나스타샤의 부모님들이라면 분명 좋은 분들이시겠지요. 괜찮아요. 인사드리고…… 아, 가방에 선물도 있어요. 꺼내 놔야겠네요.”
가방에 가서 준비한 것들을 보려는데, 아나스타샤가 날 유심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엄마는 아마 널 반기실 거야. 사실 우리 엄마는 늘 내가 어떤 친구들이랑 어울리는지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
“음…… 그 말씀은 뭔가요? 절 이용하시겠다는 말?”
“이용 좀 하지 뭐.”
“아나스타샤!”
내가 황당해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소리치자 아나스타샤 역시 킥킥 웃으며 설명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네 이야기만 하면 어찌나 성화이신지…… 나중엔 거짓말인 줄만 아시더라니까? 그런데 이렇게 실물을 보여 주면 믿으실 것 아냐?”
아나스타샤의 항변을 들으면서 난 새삼 그녀를 보다가, 날 내려다보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친구라기에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도 드물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훤칠한 키에 화려한 스타일로 멋스럽게 꾸미고 다니는 애였고, 난 피아노밖에 모르고 세상 재미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난 옅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나만큼만 하라지.”
아나스타샤는 툴툴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한들 신경 쓰지 않겠단 태도였다.
하지만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녀가 돌연 인상을 팍 썼다.
“이게 다 오빠 탓이야.”
“갑자기요?”
“그래. 그 화상이 맨날 모든 걸…….”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갑자기 삐빅 하는 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리더니, 덜커덕 덜컥 하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 왔나 봐.”
묘하게 긴장되는 얼굴로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별일 없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라면 예전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었다.
나만 아나스타샤에게 창피하지 않도록 잘 행동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조금 긴장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앞서 나간 아나스타샤를 따라 나가면서 깔끔하게 인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뭐야?”
어딘가 성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 쪽을 보니 한 남자가 막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는 너무 어두워서 자연적인 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염색한 것 같았다. 귀에는 피어싱을 몇 개나 했다.
난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워낙 교칙이 엄한 중앙음악학교에 다니다가 저렇게 자유분방한 액세서리들을 보니 조금 신기했다.
조금은 어두워 보이는 남자가 아나스타샤에게 맞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의외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뭐긴 뭐야, 여기 너 혼자 사냐? 아나스타샤?”
“왜 벌써 왔냐는 거야. 일리야.”
“흐음…….”
일리야라고 불린 남자는 삐딱하게 고개를 틀더니, 아나스타샤의 뒤편에 서 있는 날 발견했다.
잠시간 눈이 마주치고, 일리야가 싱긋 웃었다.
“너무하네?”
뭐가 너무한지 난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