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난 눈앞에 있는 남자를 파악했다. 아나스타샤가 대하는 태도로 보아선 그녀의 오빠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의 오빠라면 언제든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일부러 오빠를 밖으로 내보냈던 것 같다.
왜 그녀의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 역시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아나스타샤의 심정이 십분 이해 가는 면도 있었다.
어쨌든, 정면에서 마주쳤으니 이젠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너무하잖아, 아나스타샤. 친구 소개도 안 시켜 주고.”
“됐으니까 그냥 나가 주면 안 될까? 나랑 했던 약속은 기억도 안 나는 거야?”
“돈 주면 오늘내일 나가 있어 주겠다고 했던 거?”
난 당혹스러움에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굳은 얼굴로 일리야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오빠인 일리야에게 그냥 나가라고 한 게 아니라 나가는 대신 어딘가 가서 놀 수 있도록 돈까지 쥐여 준 것 같았다.
돈을 준 여동생이 문제인 건지, 열다섯 살짜리 여동생이 준 돈을 받아 나가는 오빠가 문제인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해하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돈까지 받은 철없는 오빠는 당당하게 목을 폈다.
“그깟 푼돈으로 뭘 하라고? 오전에 벌써 다 썼어. 너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내가 이번 달 내 용돈을 몽땅 쓰는 데에 딱 나흘 걸렸다는 걸 알긴 해?”
“그럼 노숙이라도 하든가.”
“네가 날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진 알겠다. 지금 3월이야. 아나스타샤.”
“내가 알 바야?”
아나스타샤는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고 일리야는 얄밉게 이죽거렸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눈싸움을 하던 일리야는 곧 재미없다는 듯 머리를 살짝 비틀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나저나…… 날 그렇게 쫓아내려 하길래 어디 굴러먹던 놈을 데려오려나 했는데 말이지…….”
일리야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예상 밖이네.”
“뭔 놈? 무슨 소리야?”
“난 네가 백 퍼센트 남자 놈을 데려올 거라 생각했거든.”
“미쳤어?”
“기를 쓰고 날 내보내려는 이유로 그것밖에 더 짐작할 수 있겠어?”
솔직히 말해, 내가 일리야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일리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망이다, 아나스타샤. 차라리 그러지 그랬어. 그랬으면 그놈에게 네 모든 치부를…….”
“집어치워.”
난 일리야가 아나스타샤와의 약속을 깨고 6시라는 애매한 시점에 집에 들이닥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진저리를 치며 욕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
꽤 재미있는 사람 같은데.
나 역시 그에게 흥미가 생겨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일리야가 먼저 내 눈길을 눈치채고는 방긋 웃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이름이?”
난 차분히 인사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 타티아나.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 학교 친구라 그랬지?”
“예.”
잠시 말이 끊어졌다. 분명 생각하고 있었던 멘트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물거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불렀다.
“저기…… 일리야 세르게예비치.”
“일리야면 돼.”
난 내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일리야, 머리는 염색하신 건가요?”
일리야는 이 타이밍에 그런 걸 물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그가 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리야는 낮게 대답했다.
“아니. 엄마도 아빠도 아나스타샤도 금발인데 나만 흑발이야. 난 주워 온 자식이거든.”
“……앗, 죄송해요. 본의는 아니었어요.”
난 깜짝 놀라서 사과했다. 각자 가정이란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 사정을 무심결에라도 들쑤신 건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일리야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염색이라고! 와, 이 아가씨 봐라, 깜짝 놀랐다. 나도 순간 내가 진짜 입양된 자식인 줄 믿을 뻔했잖아?”
“타티아나에게 헛소리하지 마, 일리야.”
“아나스타샤 네 친구가 이렇게 받아칠 줄은 생각도 못 했지.”
한 성격 하는 아나스타샤의 친구라면 뭔가 강하게 받아치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그 부분에서 허를 찔린 것 같았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난 듯 끅끅거리던 일리야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어쨌든…… 난 충격이다, 아나스타샤. 학교 친구 정도는 소개시켜 줘도 되지 않아?”
“…….”
일관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아나스타샤도 그 말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신용받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정말 나가서 노숙하다가 얼어 죽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종이랑 펜이 있으면 가져다줄래? 유서를 써야…….”
“제발 좀 닥쳐 봐, 일리야.”
하지만 일리야가 계속해서 엄살을 피우며 떠들자 참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윽박질렀다. 오빠 동생이 아닌 거의 친구같이 보인다.
일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읍읍, 읍읍읍.”
“머리 아파…….”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머리가 아픈 듯했다. 내보낸 오빠가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은 모양이었다.
동생이 머리가 아프든 말든 일리야는 즐겁게 말했다.
“머리 아프지 말고 우리 즐겁게 놀면 안 될까? 돈이 없어서 슬프게 집에서 토요일을 보내야 하는 오빠는 매우 심심하단다.”
“제발 나가. 아니다, 그냥 우리가 나갈게.”
아나스타샤가 정말 진절머리 난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냥 나가자, 타티아나. 나중에 다시…….”
“아나스타샤.”
난 막 돌아선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일리야를 경계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리야는 겉보기에 그리 착하기만 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다.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직감이, 일리야를 위험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소개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끝끝내 날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하아…….”
아나스타샤 역시 내가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민되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잠깐 있어.”
내게 그렇게 말하곤 성큼 나아가 일리야의 팔을 확 잡아챘다.
그러곤 벽 쪽으로 일리야를 끌고 가선 뭐라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무슨 말들이 오가는진 잘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끝까지 일리야를 거부하진 않을 것 같았다.
***
“괜찮다고?”
“예.”
난 고개를 끄덕였고, 일리야는 정말 별종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아나스타샤 역시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 너무 익숙한 시선들이라 별 감흥도 없었다.
일리야가 물었다.
“왜 괜찮지?”
“상관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도 많이 하고요.”
“많이 한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피어싱은 나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잘 안 하는데.”
“일리야 같은 사람이 무슨 사람들인데요?”
그 질문엔 아나스타샤가 대꾸했다.
“뭐긴 뭐야, 양아치지.”
너무 자연스럽게 친오빠를 양아치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일리야는 거기에 한술 더 떴다.
“그래. 그리고 난 문신도 있어.”
일리야는 소매를 걷어 보이며 팔에 한 문신까지 보여 주었다.
“이건 어때?”
“괜찮은데요. 무슨 글귀죠?”
“……너 진짜 희한하다?”
왜 놀라지 않느냐는 투였다.
그제야 난 뭔가 상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일리야는 문신과 양 귀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착실한 학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코나 입에 했으면 모를까 귀에 한 것 정도는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받아들여지는 정도는 다른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놀라야 하나요?”
“타티아나 넌 정말…….”
“……?”
“거리에서 일리야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냥 무조건 도망가…… 제발…….”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난 그녀에게 한층 더 못 미더움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즈마일로프 남매를 구경하고 있자, 이윽고 일리야가 양손을 들더니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어쨌든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타티아나.”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고. 자, 그럼 우리 친구는 뭘 관심 있어 할까?”
일리야는 상당히 낙천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오늘따라 비관적이었다.
“포기해, 일리야. 타티아나는 피아노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애니까.”
“오…… 그래?”
일리야가 날 돌아보았다. 난 부정할 수 없었다. 내 관심사라곤 피아노가 거의 전부였으니까.
그런 날 보며 일리야는 딱히 더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되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낙천적인 사람이다.
“뭐, 중앙음악학교엔 타티아나 같은 애들이 다녀야 하는 거겠지.”
“그거 무슨 뜻이야?”
“여기서 네가 발끈하면 손해인데, 아나스타샤.”
“……진짜.”
본전도 못 찾은 아나스타샤가 침묵했고, 일리야가 재차 말했다.
“피아노라…… 나도 무언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네.”
“……일리야는 무슨 공부를 하시나요?”
“공부? 안 하는데.”
그렇게 말해 버리면 내가 뭐가 돼?
조금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자 일리야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졸업이니까 슬슬 생각해 보긴 해야지. 와, 이건 예상치도 못한 동생 친구가 비수를 꽂네. 훌륭해.”
“졸업이라면…… 11학년이신가요?”
“응. 말 안 했나?”
11학년이라면 나보다 딱 세 살 많으니 이제 열여덟 살이다. 우리보다 세 살 많지만, 어리기도 한 그는 실없이 웃으며 물었다.
“너희는 고속도로처럼 앞길이 열려 있으니까 고민할 건 별로 없겠다. 그냥 계속 피아노 치겠지?”
“모르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그런 말이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기겁해서 날 불렀다.
“타티아나?”
“아.”
“모른다니? 무슨 말이야, 그게?”
“그게…….”
뭐라 설명하기 복잡했다. 사실 생각하고 내뱉은 말도 아니었고. 난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쳐야죠, 피아노. 제가 피아노를 안 치면 뭘 하겠어요?”
“사람을 치고 다닐 수도 없고 말이지.”
“지금 그따위 말을 농담이라고 해, 일리야?”
“안 웃겼나?”
아나스타샤가 바락 소리를 쳤고 일리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즈마일로프 남매는 다시 말로 된 총포탄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난 의자 뒤로 허리를 조금 빼서 그 포화에서 벗어났다.
난 이 둘을 보면서 어쩌면, 서열을 따지지 않는 문화에서의 남매 관계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로 친구처럼, 이런 관계.
루슬란 오빠도 나와 이런 모습을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엄두가 안 났다. 내가 루슬란 오빠에게 험악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같지만 조금 다른 남매 관계를 생각하며 오도카니 앉아 있는데, 현관 쪽에서 삑삑 하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아.”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의 부모님이 오신 것 같다.
따라서 일어서야 하나 고민하는데, 일리야가 말했다.
“친구들이 왔나 보네.”
“?”
“아까 내가 불렀거든. 같이 놀자고.”
“뭐?”
아나스타샤는 답잖게 얼빠진 투로 되묻더니 갑자기 당장에라도 일리야를 찔러 죽일 것처럼 인상을 쓰고는 식탁 위를 한 번 훑더니, 총알처럼 현관으로 쏘아져 나갔다.
식탁을 훑는 눈초리가 어쩐지 무기를 찾는 눈초리여서 조금 무서웠다.
막 들어오려는 일리야의 친구들과 한바탕 하진 않을까 싶어 불안해하며 일어서려는데 일리야는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프크크…….”
“일리야?”
“아, 미안. 타티아나. 놀랐어, 혹시?”
“……아니요.”
“넌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이구나?”
일리야는 새삼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리야의 친구들이 어떤 사람들일지도 모르고, 아나스타샤를 지금이라도 따라 나가고 싶다.
단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일리야에게 얕보일 것 같아서 싫었다.
잠자코 있자 일리야가 혼자 킥킥 웃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웃음을 거두고는 물끄러미 날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사뭇 진지해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일리야가 조용히 말했다.
“아나스타샤랑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요 몇 달 저 녀석이 꽤 많이 바뀐 건 네 덕분인 것 같네.”
“……예?”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 그냥 오빠로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까.”
조금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다정하게 변해 갔다.
“앞으로도 아나스타샤랑 친하게 지내 줘?”
“…….”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 목소리는 이전처럼 장난기를 담고 있었지만 충분히 진정성 있었다.
일리야가 아나스타샤와 막 대하는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오빠로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착하네.”
싱긋 웃으며 일리야가 말했다. 이 이상으로 내게 무언가 해 오진 않을 것 같다.
걱정이 되는 현관에서는 막 아나스타샤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엄마?”
“뭐니? 아나스타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불렀고, 곧이어 아나스타샤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리야!”
“네 오빠가 또 무슨 사고 쳤니?”
“죽여 버릴 거야!”
친오빠를 죽이겠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즈마일로바 여사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서 하렴.”
일리야는 혹시 몇 번이고 죽었었던 게 아닐까?
난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장에 놓인 기분이 들어 일리야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돌아오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리야는 의자에서 다리를 까딱거리며 아나스타샤를 더 약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음, 아나스타샤가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