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다행히 저녁 식사는 출장 뷔페로 결정되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인 세르게이 예브네비치는 나가는 것을 원하시는 듯했지만, 나와 아나스타샤가 집에서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행인지 아닌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출장 뷔페보다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한 단계 윗급으로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렇다면 난 무조건 출장 뷔페가 나았다.
이즈마일로프 가족들과 대화를 하며 잠시 기다리자 곧 5인분의 출장 뷔페가 배달되었다.
잘 포장된 거대한 도시락 같은 것들이 스무 개도 넘게 들어왔다.
막연히 어디 레스토랑에 나가서 먹는 것보단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배달된 것들을 보니 막상막하일 것 같다.
뷔페 배달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자란 식탁을 대신해 간이 받침까지 착착 쌓아 올리더니 빠르게 그 위에 음식들을 진열하고는 사라졌다.
거기까지 불과 3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한쪽엔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난 순식간에 눈앞에 차려진 화려한 뷔페를 보며 세상 참 편해졌다는 둥의 생각을 떠올렸다. 정말 나날이 놀란다. 나날이.
“자, 접시. 타티아나.”
“고마워요.”
아나스타샤가 챙겨 준 접시를 들고 진열되어 있는 음식을 돌았다.
바로 보고 뭔지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반면, 뭔지 모르겠는 것도 있었다. 스무 가지도 넘는 음식들을 조금씩 담았다.
이 샤슬릭은 정말 맛있어 보인다.
한 접시를 만들어 식탁으로 돌아오니 먼저 앉아 있던 일리야가 내 접시를 힐끗 보더니 붉은 고기처럼 생긴 건 무슨 맛인지 먹어 보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도 이게 뭔지 모른다.
궁금하면 본인이 직접 먹어 보면 될 것이지 왜 당당하게 날 희생양으로 삼는지 모르겠다.
난 무슨 맛이 나든 간에 무조건 반대로 말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까지 마지막으로 다섯 명이 모두 식탁에 앉았고,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자, 식사하자. 타티아나, 다시 한 번 환영한단다.”
“환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는 시작되었다.
식사는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다.
흔하게 밖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과하게 짜거나, 달거나, 기름지기 마련이었는데 이 출장 뷔페의 음식은 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맛과 스타일이 어우러져 있었다.
상당히 고급 업체인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아나스타샤는 내 쪽으로 속삭였다.
“타티아나. 이 카샤는 네가 만든 게 더 나은 것 같다.”
“아하하. 설마요, 아나스타샤.”
“진짠데.”
아나스타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훌륭한 쉐프들이 만들었을 이 요리들에 내가 비교가 될 리 없잖은가? 난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러저러한 담소와 웃음이 오갔고, 난 평소보다 말을 조금 더 많이 했다.
특히 일리야는 날 굉장히 편하게 대해 주려는 것 같았다. 일리야는 내게 존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이 차이도 세 살밖에 안 나고, 사실 그 차이면 그냥 친구라 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가 기르는 개에게까지 존대를 한다면서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일리야는 물론 아나스타샤의 부모님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혹시 기르는 개가 스무 살쯤 되느냐고 물었다. 그건 아니었다.
***
“타티아나는 차가 좋겠니?”
“아……. 잠시만요. 약소하지만 선물로 준비한 것이 있어요.”
식사를 마친 뒤에는 티타임이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디저트와 찻잔들을 준비했고 난 옆에서 도우면서 선물로 가져온 공예차를 꺼냈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했니?”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 안에 낱개로 종이 포장 되어 있는 공예차는 일반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터키, 인도, 영국과 함께 굉장한 차 소비국이지만 이런 중국식 차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살짝 눈치를 보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잘되었네. 지금 바로 마셔 보자꾸나.”
나는 끓는 물만 준비해서 식탁으로 가져갔다. 기다리고 있던 일리야는 의아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투명한 차인가 봐?”
“아직 안 넣었어요, 일리야.”
그리고 난 끓는 물이 든 유리 포트 안에 공예차의 종이 포장을 까서 집어넣었다.
유리 포트 위에 둥둥 뜬 동그란 찻잎 덩어리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점점 풀어지더니 커져 갔다.
푸른 잎사귀가 모두 펼쳐지고 나니 그 안에 있는 노란 꽃잎이 보인다.
유리 포트 안에 쟈스민 꽃이 피고 있었다.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은 모두 유리 포트 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선물은 꽤 잘 고른 게 아닐까 싶었다.
“…….”
조금 의외인 것은 일리야의 반응이었다.
이런 것에 그리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일리야는 상당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쟈스민 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뭇 진지해서,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과도 일견 닮아 있었다.
짧은 티타임이 지나가고, 출장 뷔페의 사람들이 다시 와서 포크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해 갔다.
따로 뒷정리를 하거나 할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집에서 좋은 홈파티용 뷔페식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선 달리 단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문제는 가격 정도겠지.
시계를 보시 슬슬 8시였다.
내가 이 집에서 묵을 생각이 없다면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난 오늘 묵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직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의 토요일 저녁 시간에 정도 이상으로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각자 쉴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슬슬 아나스타샤와 방에 들어가서 못다 한 피아노 연구나 조금 더 하고 놀다가 잘까 궁리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일리야가 난데없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유리병들이 잔뜩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등장할 유리병이라면 한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일리야에게 말했다.
“일리야. 너야 이제 신경 쓰지 않고 싶어 할지 모르겠지만, 저 애들은 아직 미성년자야.”
하지만 일리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걱정 마시죠. 아가씨들은 논알콜 칵테일로 줄 테니까.”
일리야가 가져온 병들 중에는 확실히 주스 병도 있었다.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부모님들도 조금 안심하시는 듯했다.
“어지간한 건 다 있고…… 자, 아빠. 한잔 드릴까요? 무슨 칵테일이 좋으세요?”
“칵테일은 됐고, 보드카 이리 줘 봐라.”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쿨하게 보드카를 병째로 받아 갔다. 일리야가 투덜거렸다.
“보드카 칵테일 종류가 마흔 종류도 넘는데 그걸 즐기지 못하시다니 정말 애석함을 금치 못하겠…….”
“일리야. 나는 안 주니?”
그다음 손님은 아나스타샤의 어머니였다.
아들이 타 주는 칵테일은 또 상당한 별미인 걸까, 꽤나 기대하시는 것 같았다.
일리야 역시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뭘로 드릴까요?”
“블루 사파이어로 한 잔 줘 봐요.”
“음…… 엄마, 블루 큐라소가 없어서 블루 사파이어는 못 만들어…….”
“무슨 가게가 이래?”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도 가차 없었다. 일리야는 당장 가게를 접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내가 살려 줘야 할 것 같다.
“일리야. 저도 부탁드려요.”
“타티아나…….”
일리야는 흡사 구원자를 만난 듯한 눈빛을 하더니,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너랑 아나스타샤는 논알콜 칵테일로 줄게.”
“좋아요.”
“종류를 모를 테니 예시를 주지.”
난 그냥 칵테일 종류도 모른다. 하물며 논알콜 칵테일이라고 하면 그냥 주스를 섞어 놓은 것인데 무슨 종류가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야가 말했다.
“피나 콜라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신데렐라. 셋 중 뭘로 줄까?”
“음…….”
셋 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괜히 재미없게 각각 무슨 칵테일인지 설명해 달라고 할 것 없이, 난 추리에 들어갔다.
피나 콜라다는 어쩐지 콜라가 들어갈 것 같다. 난 콜라를 마시면 취해 버리므로 일단 패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는 달리 연상할 만한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롱 아일랜드풍 아이스티라는 느낌이었다. 보류.
신데렐라는 듣기만 해도 12시 종이 치면 집에 돌려보낼 것 같은 느낌이다. 알콜이 들어 있지 않을까?
그리 유심히 고민하지 않고 난 한 가지 이름을 말했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가 맛있어 보이는데요.”
“그렇지?”
일리야가 희희낙락하며 대답했다. 진짜 맛있는지는 일리야가 타 주는 걸 먹어 보면 알겠지. 난 사실 셋 중 무엇이라도 상관없었다.
“일리야…….”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섬뜩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날 부르는 것도 아닌데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일리야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리야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장난이야 장난, 아니, 장난이라고 진짜.”
“……작작해, 진짜.”
아나스타샤가 일리야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상황 판단이 안 된다.
한숨을 푹 쉬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았다.
“왜요……?”
“타티아나……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는 보드카와 데킬라, 크왕트로, 진, 럼이 죄다 들어가는 꽤 센 칵테일이야.”
“아이스티인데요?”
“이름만 아이스티야.”
생각도 못 한 함정에 걸려 버렸다.
내가 조금 배신감을 느끼며 일리야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크왕트로는 없어서 술은 네 종류밖에 안 들어가.”
“그게 죄다 도수가 40도 이상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일리야는 곧 조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장난이었다고. 아나스타샤. 설마하니 내가 뭘 하겠냐?”
“내가 몰랐더라면 약하게라도 만들어 먹여 봤을 수도 있겠지. 단지 재미있겠단 이유로.”
“내가? 그 정도로 겁대가리 없어 보여?”
“모르지.”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일리야는 단순히 재미있게 저녁을 보내기 위해 장난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리야가 진짜 알콜이 든 칵테일을 조합해 준다 한들, 내가 냄새만 맡아 보면 알 일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녀는 날카롭게 뇌까렸다.
“일리야. 이건 장난이 아냐.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가 뭐라고 불리는지 알면서 뒷생각 안 하고 이런…….”
난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남매가 이렇게 주고받는 원인이 나라면 말릴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 괜찮아요.”
“하…….”
아나스타샤는 말리지 말라는 듯 싸늘한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가, 내가 그녀의 팔을 붙잡자 한숨을 푹 쉬었다.
난 그녀가 일리야와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더 이어 하려던 그녀는 곧 힘이 풀렸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나스타샤의 이런 태도가 이해 가는 면도 있었다. 난 피아노를 제외한 모든 사회 전반에 있어 정말 몰상식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설명을 조금 해 주었으면 하기도 한다.
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아나스타샤가 날 계속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언제까지고 아나스타샤가 날 지켜 주리라 생각하는 건 친구로서의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일리야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곧 항복이라는 듯 말했다.
“……난 세상에서 내 동생이 제일 무섭더라. 기다려 봐.”
그리고 일리야는 다시 부엌으로 가선 블렌더를 가지고 왔다.
그러곤 딸기와 시럽 등 이러저러한 재료들을 넣고는 블렌더를 작동시켰다.
잠시 후, 한눈에 봐도 시원해 보이는 칵테일이 한 잔 완성되었다.
“자.”
일리야는 그것을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 그런데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난 아이스티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네가 혹시 알까 싶어서 물어봤던 것뿐이야.”
“괜찮아요. 일리야.”
난 일리야의 편한 태도가 좋았다. 앞으로도 그와 잘 지내고 싶었다.
잔을 받아 마시자, 산뜻한 청량감이 입과 목을 적셔 내려갔다. 그 어떤 음료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색다른 맛이 느껴진다.
오렌지면 오렌지, 사과면 사과 한 가지로만 응축된 주스만 마시다가, 이렇게 혼합된 논알콜 칵테일을 마셔 보니 상당히 신선했다.
“시원하고…… 맛있네요. 이 칵테일은 이름이 뭔가요?”
일리야가 대답했다.
“골든 메달리스트.”
딸기를 넣어서 붉은빛이 나는 칵테일이 왜 골든이야?
“이게 도대체 왜요……?”
“나도 몰라.”
칵테일의 세계는 조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