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1화 (161/1,277)

##  161화

나와 아나스타샤, 일리야 세 명은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치 정해 놓은 것처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있었던 일로 흘러갔다.

일리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기 있네.”

일리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실황 영상을 틀어 내 쪽으로 보여 주었다.

거기엔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대단한데, 너.”

“…….”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녹화된 무대 영상은 어떨지 이전에 궁금해서 찾아보긴 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워서 30초도 채 보지 못하고 꺼 버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영상이 일리야의 손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눈앞에서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일리야를 보니 참을 수 없어졌다.

“저, 저기…… 일리야.”

“응? 왜?”

“그 영상 지금은 좀…….”

“지금 왜?”

“…….”

말문이 막혔다. 난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기댈 것은 그녀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웃더니, 일리야에게 말했다.

“타티아나의 영상 보는 거 재미있지, 일리야.”

“어…… 글쎄. 난 클래식에 대해선 잘 몰라서, 사실 피아노는 모르겠고 타티아나의 반응이 재미있긴 하네.”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다니, 일리야…….

뭐라 반박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상큼하게 웃더니 일어섰다.

그러곤 내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 더 재미있는 거 보러 갈까?”

“……예?”

아나스타샤는 즐겁게 내 손을 잡아 이끌며 거실로 향했다.

그러곤 거실에 있는 부모님들께 말했다.

“아빠, 엄마. 우리 일리야 옛날 비디오 보고 싶은데. 틀어도 되지?”

“일리야의 비디오?”

“응.”

“음…….”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심각하게 아나스타샤를 보더니, 내 쪽을 힐긋 보고는 난처한 투로 말씀하셨다.

“아나스타샤. 네가 네 오빠의 평판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무슨 상관이야? 재미있으면 됐지.”

“그만해!”

부엌 쪽에서 뒤늦게 고함 소리와 함께 일리야가 튀어나왔다.

시종일관 장난스러움으로 아나스타샤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하던 일리야는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거의 비명을 질렀다.

“다 처분한 거 아니었어? 그게 왜 있어?”

“시끄러워. 유튜브에 올려 줄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죽였다.

“왜? 방에 들어가서 나와 타티아나 둘이서만 볼까? 그런데 일리야 반응이 없으면 조금 심심할 것 같은데.”

“너 잠깐 나와.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일리야는 어깨를 떨며 손짓했다. 아나스타샤는 뭐 어쩔 테냐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난 슬슬 말려야 할 것 같다는 타이밍을 직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만하고.”

“…….”

“…….”

남매의 싸움을 말리는 데엔 한 마디면 충분했다.

반항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걸 아는지 이즈마일로프 남매는 조용해졌고, 그 둘을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번갈아 바라보셨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빛이 가 닿을 때마다 모종의 압력이 가해지는 듯했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잠시간 그렇게 둘을 제압하시고는,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말씀하셨다.

“절충안은 어떻니? 옛날 비디오라면 타티아나도 재미있어 할 것 같기도 한데, 일리야가 싫다고 한다면 일리야의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의 것을 보면 되잖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날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어떻냐는 것 같았다.

난 빠르게 대답했다.

“정말 보고 싶어요.”

일리야의 옛날 성장 비디오도 궁금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리 흥미가 가는 관심사는 아니었다.

일리야가 이렇게까지 반대한다면 더더욱이 볼 생각이 안 들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내가 모르는 시절의 아나스타샤의 모습이라면 꼭 보고 싶었다.

“안 되나요? 아나스타샤.”

“……후후.”

아나스타샤도 창피해하고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살짝 물어보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몰라 바라보니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같이 보지 뭐.”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진 않지만, 함께 앉아 모니터링하는 느낌으로 보는 것엔 이유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텔레비전 밑의 선반에서 CD들을 꺼내더니 뭘 틀면 좋을지 찾기 시작했다.

나와 일리야는 소파 한쪽에 나란히 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일리야에게 말을 걸었다.

“일리야.”

그가 날 돌아보았다. 난 말했다.

“미안해요. 괜히 싸우게 만들어서.”

“그걸 왜 네가 사과해?”

일리야는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건 없었다. 일리야가 먼저 짓궂게 굴었고, 아나스타샤가 복수했을 뿐.

하지만 내가 내 연주 영상 같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이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었을 텐데.

“그냥요.”

“그 그냥을 정말 모르겠네…… 어쨌든 나도 미안.”

“괜찮아요.”

일리야도 뭔가 내 심정을 이해해 준 것 같긴 하다. 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난 일리야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일리야는 겉보기엔 어떻게 보더라도 샌님처럼 보이진 않았다.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칵테일을 능숙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일상적인 언행 자체가 그렇게 느껴졌다.

어딜 보나 일리야는 집과 학교만 오간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다.

어쩌면 이전엔 조금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행청소년이었던 것일까? 지금도?

“…….”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는 것은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되레 쓸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늘어나는 법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부족함 없이 살아온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날뛰었을지 대충이나마 알지 않은가?

절대 자랑은 아니다. 난 그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니 공유하는 형태로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고, 언제 어디서 내 뒤통수를 후려칠지 모른다는 것을 늘 각오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아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일리야와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봐도 좋겠지만, 지금 쓸데없이 어둡게 분위기를 몰고 가는 것 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이 텔레비전에서 재생되었다.

“세상에나…….”

난 거의 기절했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아나스타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막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제대로 손도 안 닿을 것 같은데, 어렵사리 곡을 만들어 내고 있다.

텔레비전 속의 작은 아나스타샤와 현실의 큰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키는 어마어마하게 자랐지만 앳된 얼굴은 남아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영상들은 생일파티 영상이나 발레를 배우는 영상 등이었다.

“…….”

아나스타샤는 내 옆자리에 무릎을 감싸 안고 앉더니 말없이 텔레비전을 지켜보았다.

내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지만 그녀가 조금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난 이어지는 영상에서 작은 손으로 체스를 두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귀여웠네요.”

“왜 과거형이야?”

“……지금은 귀엽다기보단 예쁘죠.”

키가 거의 170에 달하는 아나스타샤를 귀엽다고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팔을 뻗어 날 와락 끌어안았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반대편에 앉은 일리야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그걸 묻는 애나 답해 주는 애나…… 끔찍하군.”

“불만 있어?”

“없습니다.”

일리야는 로봇처럼 대답했다.

아나스타샤의 귀여웠던 시절 감상회를 끝마친 뒤, 일리야는 밤까지 귀찮게 하진 않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와 아나스타샤도 방으로 들어갔다.

“이만 씻을까?”

“…….”

설마하니 같이 씻는 경우는 없었다.

함께 씻는 것은 나는 물론이고 아나스타샤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조금 더 어렸더라면 정말 같이 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교대로 샤워를 한 뒤엔 아나스타샤도 파자마로 갈아입었는데, 팔랑거리는 파자마를 입은 모습이 의외로 귀여웠다.

그리고 파자마 차림으로 우리는 서로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이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정말 신중하게 아나스타샤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꼼꼼하게 오버나이트 크림도 바르고, 이제 곧바로 자면 될 것 같은 준비까지 갖춘 후에 아나스타샤가 거실로 나가더니 과자와 음료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함께 침대 위로 올라가서 가지고 온 과자들을 세팅했다.

그러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피아노 연구에 다시 돌입했다.

아나스타샤와 난 진지하게 파자마 차림으로 다시 헤드폰으로 음악들을 듣고, 악보와 공책에 표시를 해 가면서 의견을 교류했다.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 확실하게 터뜨리듯 나타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난 파자마 차림 그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늦은 저녁 아파트라서 피아노도 칠 수 없어야 했지만 방에 있는 사일런트 피아노는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상관없었다.

한 번 연주를 마친 뒤엔 다시 연구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종이와 스마트폰과 헤드폰과 피아노건반과 과자가 우리의 손을 오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나스타샤가 날 부러워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나도 너처럼 젓가락질을 잘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연습하면 할 수 있어요.”

“잘 안 되더라고. 피아노 전공생의 수치야.”

우리가 만지는 다른 물건들에 기름이 묻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과자를 집어 먹는 날 보며 아나스타샤는 한탄했다.

난 젓가락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전에 아나스타샤에게 보여 준 적 있었다.

러시아에선 꽤 특이한 교양에 속하는 젓가락질에 아나스타샤 역시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젓가락질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의 손을 잡고 몇 번 교정해 주긴 했지만 그냥 오래 써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악보를 분석하고, 피아노를 치고, 과자를 먹고, 젓가락질을 연습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일반적인 파자마 파티가 이렇진 않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다른 여자애와 있을 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밤을 꼴딱 세워 가며 여자들끼리만 할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와 있을 때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았다.

본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상 재미없는 나와 함께 놀면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것은 음악적인 부분뿐이라는 것을 안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금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며 적극적으로 머리를 맞대면서 즐거웠다.

***

바쁘게 움직이면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흐른다.

그렇게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즐거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슬슬 정말 자야 할 시간이었다.

“…….”

늘어져 있던 것들을 정리하고 깨끗해진 침대 위에서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긴장한 얼굴로 날 보더니 말했다.

“타티아나. 너 그냥 여기서 자. 난 나가서 다른 방에서…….”

“아나스타샤.”

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까지 자도 괜찮을 정도로 큰 침대였다.

“같이 자면 안 되나요?”

“……넌 괜찮아?”

사실 괜찮지만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방에서 자긴 했지만, 그땐 적어도 침대가 두 개이기라도 했다.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내가 이제 와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잔다고 해서 여태껏 지켜 온 내 신념을 무너뜨릴 것 같진 않았다. 괜찮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러자.”

그러더니 장난스레 웃으며 한쪽으로 자리를 내어 주었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눕자 바로 옆에서 아나스타샤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 역시 내 숨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잠시간 우리 사이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 교차되는 숨소리가 점차 닮아 가다가 똑같아지는 순간,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어 날 불렀다.

“타티아나.”

“…….”

굳이 자는 척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게. 웃기지.”

친구를 초대한 일로 그녀가 이렇게 따로 감사를 표하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게 들린다.

아나스타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내게 고마워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널 하루라도 빨리 초대해서 우리 가족들과 만나게 하고 싶었어. 그…… 넌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난 옆으로 돌아누워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실망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돌아눕는 것을 느낀 아나스타샤 역시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달빛에 어슴푸레 비치는 그녀의 얼굴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롭게 보인다.

난 말했다.

“전 아나스타샤의 가족분들이 무척이나 좋아졌는걸요.”

“……그럼 다행이고.”

“일리야와도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건 안 다행인데.”

아나스타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말은 험하게 하고 진저리 치는 듯하지만 사실 그녀는 오빠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우린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무엇이 비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어쨌든…… 이만 자자. 피곤하겠다.”

“그래요.”

“잘 자.”

“아나스타샤도요.”

난 모로 누워 있는 상태로 눈을 감았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잠깐 느껴지다가, 곧 그녀의 숨소리도 차분해졌다.

우린 그렇게 잠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