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2화 (162/1,277)

##  162화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10cm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내 쪽으로 누워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면서 생기는 미세한 진동도 옆 자리로 전해지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상체만 일으켜 앉은 채로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보았다.

“…….”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을 때에도 달빛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태양 아래에서의 아나스타샤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강렬한 존재감을 보이지만, 이렇게 달빛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땐 그것과는 다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교교한 달빛이 그녀의 실루엣 위로 내려앉는다.

빛의 입자가 바스라지며 반짝이다가 스며들듯 사라진다. 난 그 모든 광경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에게로 손을 뻗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손을 거뒀다.

“…….”

두 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심박 수가 치솟는다.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아나스타샤를 깨우려는 손길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잠들어 있는 그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살그머니 내뻗은 손이다.

하지만 깨울 것이 아니라면 손을 댈 이유가 없잖은가?

손만큼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내게, 이러한 무의식중의 행동들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 의식은 침착하게, 용서 없이, 그 무의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그리 기분 좋지 않았다.

목 안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난 목을 움츠리고 침을 삼켰다. 갑자기 화가 날 것만 같다.

화가 나? 하지만 그것도 기만에 불과할 뿐이잖아?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린다.

복잡하지만 복잡하지 않은 생각들이 간헐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 생각들은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멍청하고, 휘발성이 강하고, 충동적이다.

재미없는 생각들을 생각으로만 떠나보내다가, 이번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난 그 모든 것들을 덮어 버렸다.

“…….”

결론을 내리고 차분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나쁠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난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의 집에 놀러 와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고, 앞으로도 최소 몇 시간은 그 누구도 날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뜨고 내 이름을 불러 줄 때까지.

도중에 심심해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조금 다채로움이 필요하다면 헤드폰을 가져와서 음악을 듣는것도 좋으리라.

그렇게 가만히 앉은 채로, 난 달이 이울기를 기다렸다.

“……?”

그때, 평화로운 내 시간을 방해하는 소음이 느껴졌다. 방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물 트는 소리. 최상층의 펜트하우스에 도둑이 들었을 것 같진 않고, 들었다 한들 물을 틀진 않을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가족 중 한 사람이 분명했다.

난 누군지 모를 사람이 다시 방에 들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

하지만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물을 틀었다가, 잠갔다가, 다시 무언가를 만지다가, 툭툭 치다가, 다시 물을 튼다.

밤중에 무슨 일일까. 난 침대에 앉은 채 먼 곳으로 신경을 집중하다가, 궁금해하지 말고 나가 보기로 했다.

괜히 나가서 얼굴을 마주쳤다가 어색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지금 들리는 소리들이 뭔지 알아보고 싶은 충동까지 참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난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옆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3시경이었다.

작은 발소리에도 아나스타샤가 깰까 싶어 조심스레 방에서 나갔다.

파자마 차림으로 복도에 나오자 서늘했다. 난 신경 쓰지 않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아냈다.

저 멀리 있는 욕실이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가서 문을 열고 뭐 하시냐고 물어보면 유령인줄 알고 기절할지도 모른다. 난 최소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부엌 쪽으로 갔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는 척하고 있으면 욕실에 있는 분이 나올 것이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고, 다시 숙면을 위해 코코아라도 한 잔씩 타서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부엌으로 가는데,

갑자기 벌컥 욕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

누가 나온 것엔 놀라지 않았다. 욕실 안에 사람이 있으리란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난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한 상태였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방독면 같은 안면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방독면을 쓴 괴한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

난 너무 놀라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얼어붙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다.

유령이 튀어나왔어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 같다. 난데없이 방독면 쓴 괴한이라니 이건 상상을 뛰어넘어도 너무 뛰어넘었다.

초고층 펜트하우스엔 강도가 들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그 강도의 첫 희생양은 내가 되는 건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심장마비가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말을 안 듣다가, 강도일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움직였다.

혼자라는 것이 순간 너무 무서워서 누구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를 지르면 잠들어 있는 아나스타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패물을 필요로 한다면 패물만 훔쳐 달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았다. 강도보단 도둑이 낫다.

그렇게 어떻게 도둑에서 그치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체모를 방독면 괴한이 갑자기 방독면을 벗어 던졌다.

“타티아나.”

“……일리야?”

방독면을 쓰고 있던 것은 일리야였다.

난 비로소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조용히 해.”

내 표정을 보자마자 그가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벌컥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는 해요?

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난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집 안 공기가 나쁘면 공기청정기를 사세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게.”

여긴 일리야의 집이었고, 집 안에서 방독면을 쓰는 건 그의 자유였지만 내가 따지고 드니 그는 조금 곤란해했다.

난 가까이에서 다시 일리야를 살폈다. 그의 옷차림은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방독면과 수건을 쥐고 있었다.

그것들을 등 뒤로 감추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이미 얼굴에 쓰고 있는 것까지 본 마당에 숨겨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일리야는 굉장히 당황해했다. 척 봐도 무언가 들킨 사람의 행동거지다. 날 놀라게 한 건 부차적인 문제인 것 같다.

“그냥 갑자기 방독면 정비가 하고 싶어져서.”

“……새벽 3시에요?”

“응. 남자들은 원래 그런 게 있어.”

“…….”

그런 게 있긴 뭐가 그런 게 있어? 어이가 없다, 정말.

난 삐뚜름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어디 나가세요?”

“아니!”

화들짝 놀라며 일리야가 말했다. 이미 그 반응만으로도 그가 이 시간에 나가려 한다는 것이 다 드러났다.

어딘가 나가려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딜지 쉽게 상상이 가진 않았다.

“가면 무도회 같은 테마인가요?”

“……무슨 소리야?”

“가시려는 클럽이요.”

“어…… 응, 맞아.”

일리야는 세 번째 거짓말을 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새벽이니 클럽에서 논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방독면을 쓰고 출입하는 클럽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일리야는 이쯤에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듯 손짓을 하다 말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망했네.”

“뭐가요?”

“오늘 계획.”

“이 추위에, 이 밤에 무슨 계획이신데요?”

“타티아나 너 의외로 조금 집요한 구석이 있다? 알아?”

일리야는 괜히 날 자극하듯 그렇게 말했다.

난 그런 것에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내가 오지랖도 넓고 집요한 구석도 많다는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일리야가 오다가다 만난 친구일 뿐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아나스타샤의 오빠였다.

이 밤중에 검은 복장에 방독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서 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일리야와 전 오늘 처음 본 사이이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뭐?”

일리야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잠깐만요, 착각하지 마세요. 일리야가 아나스타샤의 오빠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 안 해요.”

“뭐 그렇겠지. 농담이야.”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다는 듯 일리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일리야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장난스러운 태도로 날 바라보았다.

난 그가 오해를 하는 건 싫었지만 어쨌든 걱정된다는 것은 진심이었기에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리야는 결국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 김샜다. 알았어. 안 나갈게. 그러니까 편히 자.”

“오늘만요?”

“…….”

내가 없으면 언제든 또 나가겠다는 소리처럼만 들려서 그렇게 말했더니 일리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말했다.

“하나 물어봐도 돼?”

“묻고 싶은 건 전데요?”

“응. 그 전에 말야, 넌 내가 지금 뭣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 같아?”

이 새벽에, 영하의 추위에 검은 복장으로 방독면을 쓰고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내 짧은 상식과 추리력으론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없었다.

난 조금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추리의 결과물을 말했다.

“반정부 시위?”

“미치겠네.”

어이가 없다는 듯 일리야가 이마를 탁 짚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다시 한마디 하려는 찰나, 그가 이어 말했다.

“이 오해는 풀 필요가 있겠어.”

“오해가 맞는 거죠?”

“오해야 진짜…….”

정말 억울하다는 것처럼 일리야가 중얼거리더니 결국 맥 빠진 투로 손짓했다.

“잠깐 이야기나 하자. 따뜻한 마실 것이라도 타 줄 테니까.”

“……알았어요.”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고 올래.”

“아.”

그제야 난 내가 파자마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치는 재질이 아니니 상관없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 오빠에게 보이기엔 부끄러운 차림이었다.

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다시 방으로 돌아가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혹여나 침대에서 잠들어있는 아나스타샤가 깨진 않을지 조심스레 입느라 꽤 힘들었다.

그렇게 옷을 입고 다시 거실로 나가자 불이 켜져 있었다.

일리야는 부엌에서 티포트에 물을 끓이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여전히 검은색 계열의 옷만을 입은 그는 무슨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싱긋 웃는 미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거기 앉아.”

“예.”

“뭐 마실래, 코코아?”

“아, 저 카페인은 못 마셔서요. 혹시 허브티 같은 디카페인 음료가 있다면 부탁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곤 금세 머그컵과 차를 준비했다.

그저 머그컵에 허브티를 탈 뿐인데도 어쩐지 그 모습이 유려하게 보였다.

저녁에 칵테일을 만들어 줬을 때도 그렇게 보였는데, 일리야의 손놀림은 참 신기했다.

오래 기다릴 것 없이 일리야는 금세 내 앞에 허브티를 한 잔 내어 주었다. 난 작게 감사를 표하곤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향긋한 허브티가 조금 놀랐던 내 긴장을 풀어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일리야는 코코아를 마시고는 피식 웃었다.

“이 밤중에 네가 깰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물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웠어?”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저…… 제가 귀가 조금 밝아서요.”

“아, 그게 또 그런가. 넌 피아노를 치니까.”

“그렇죠.”

“그런데 저기 피아노 치는 또 한 명은 왜 저렇게 잘 자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본래 잠이 조금 많은 편이었다. 난 내가 잠이 없다고 해서 아나스타샤를 두고 무어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굳이 이러쿵저러쿵하기 싫어서 대충 답했다.

“글쎄요.”

“흠.”

더 말하기 싫다는 것을 느꼈는지 일리야는 콧소리를 내더니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타티아나.”

“예, 일리야.”

“아까 네 연주 영상 말이야. 보고 있다 보니까 문득 느낀 건데. 네가 아나스타샤보다 피아노 잘 치는 거지?”

이 질문 역시 난 구태여 답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요?”

“대답이 이상한데? 괜찮아. 사실대로 말해 봐. 걔 자잖아.”

“깨워도 될까요?”

“미안해. 그것만은 안 돼.”

참을성에 한계가 온 내가 당장 아나스타샤를 깨울 것처럼 말하자 일리야가 살려달라는 듯 사과해 왔다.

난 결국 피식 웃고야 말았다. 살짝 사람 열 받게 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난 그가 타 준 허브티로 다시 목을 축였다.

어쨌든, 지금 이 자리는 그냥 이 밤중에 잠 안 오는 사람들끼리 차나 한잔 하자고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겁게 이야기할 건 없어서, 가볍게 화두를 던졌다.

“아나스타샤가 자는 사이에 일리야야말로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하셨던 건지.”

“하…… 솔직히 너처럼 클래식 학교 다니는 애들한텐 말하기 싫었는데.”

“예?”

“그런데 넌 내 피어싱이랑 문신을 보고도 오픈마인드로 대해 줬으니까. 괜찮겠지.”

일리야는 갑자기 내 학교를 언급하며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무언가 화면에 띄워선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

난 그가 내민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면엔 범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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