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3화 (163/1,277)

##  163화

일리야가 내민 스마트폰 속의 그림은 캔버스가 아닌 건물 벽면에 그려진 것이었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범고래였다.

고래처럼 어마어마하게 크진 않고, 돌고래 같은 귀여운 이미지가 옅다.

영민해 보이는 외견이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공격적이고 흉포한 모습 또한 드러나 있었다.

그 범고래는 원래 벽면에 그려져 있던 것 같은 개를 막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음악이라면 모를까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이게 무슨 의미의 그림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어두운 밤에 찍은 듯 어둑한 화면 속, 가로등 조명에만 의지하여 떠오른 범고래는 마치 바다가 아닌 밤하늘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신기하기도 해서 넋을 놓고 보고 있자 일리야가 물었다.

“어때?”

“……정말 예뻐요.”

일리야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개를 잡아먹고 있는 범고래를 예쁘다고 해 줄 줄은 몰랐군. 취향 참 독특해?”

“하지만 예쁜걸요.”

“고마워. 분명 러시아 태생이지만 어쩐지 출신이 모호해진 저 범고래도 고마워하는 것 같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킥킥거렸다. 난 그런 일리야를 보며 한 가지 깨달았다. 아마 이 그림은 일리야가 그렸을 것이다.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일리야,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렇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은 아니군요?”

어느 정도 확신을 지닌 내 물음에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 내 캔버스는 건물과 벽면이고 내 붓은 스프레이니까.”

“혹시 그거…….”

“그래피티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네.”

이런 그림들을 뭐라 부르는지 이름이 모호했었는데 일리야에게 듣자마자 기억이 났다.

그래피티. 미국에서 시작된 문화 중 하나로 락커 스프레이나 페인트 등으로 벽에 그림이나 사인을 남기는 행위였다.

어떤 부분에선 예술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뉴스에 나오기도 했던 것 같다.

난 부정적인 이야기는 가급적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잘 모르니까 물어보았다.

“들어 봤어요. 그런데 그거 불법 아닌가요?”

“불법적으로 하는 건 바밍bombing이라고 하고 이것처럼 주인에게 허락받고 하는 건 뮤랄mural이라고 해.”

그는 히죽 웃으며 이어 말했다.

“물론 나도 바밍을 안 해 본 건 아니고.”

“…….”

난 딱히 그래피티라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없지만 불법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살짝 눈을 흘기자 일리야는 자신이 너무 신났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조금 차분해지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쨌든 이것 때문이야. 방독면은 스프레이 가스가 싫어서 하는 거고.”

“그랬군요…….”

난 그가 혹시 시위에 나가서 화염병 같은 것을 던지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일리야가 내게 처음부터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클래식 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딱딱한 취향으로 보이는 내가 그의 그래피티를 좋게 봐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편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일리야에게 제대로 전해진 것 같았다.

그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코코아를 홀짝였다. 내게 이해받았다는 것이 꽤 기쁜 것 같다.

약간의 억측이지만, 어쩌면 그는 나 같은 이해자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명도 들었겠다, 그냥 들어가 자도 그만이었지만 난 일리야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오래 전부터 그래피티를 하신 건가요? 일리야.”

“꽤 됐지.”

“혹시 저녁에 틀 뻔했던 비디오도?”

“윽.”

혹시나 해서 찔러 보았더니 일리야는 뜨끔했는지 신음 소리를 냈다. 꽤 귀여운 반응이었다.

“타티아나. 너 추리력이 꽤 좋은데……?”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늘 이곳저곳 참견이나 하고, 주변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모습만 봐 온 나는 추리력이 좋다는 말이 조금 생소했다. 하지만 어쨌건 칭찬이라면 감사하다.

난 그 칭찬에 힘입어 한 발자국 더 내디뎌 보기로 했다.

“일리야. 혹시 그래피티를 그리는 비디오라면, 보여 주시면 안 되나요?”

“쪽팔린데.”

“궁금해서 그래요. 보여 주세요.”

“하…….”

일리야는 갈등하면서도, 또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눈빛으로 결국 의자에서 일어섰다. 난 그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그는 거실 불은 켜지도 않고 텔레비전을 켜고 스마트폰을 연결시켰다. 비디오는 처분했다면서 영상 자체는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어둑어둑한 거실에 텔레비전만이 빛났다.

“재미있어해 줬으면 하긴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일리야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것은 멀리서 카메라로 한 벽면을 찍고 있는 영상이었다. 시간은 밤인 것 같았고 가로등 조명만이 벽을 비췄다.

잠시 기다리자 그 화면 안으로 검은 옷의 남자가 쑥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은 머리칼, 일리야였다.

옆을 바라보니 일리야는 자신의 비디오를 튼 것이 극도로 부끄러운지 소파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꽤 귀여웠지만 난 텔레비전의 일리야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무언가 재는 것 같던 텔레비전 속 일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스프레이 캔을 짤각짤각 흔들면서 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옆으로 팔을 휘둘렀다.

“……!”

일리야가 들고 있는 캔으로부터 새파란 선이 건물 벽을 가로지른다.

호쾌한 선이 얼핏 마구 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리야는 분명 변화를 줘 가면서 선을 다루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벽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

난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리야는 굉장히 빠르게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어둑한 밤. 조명도 시원찮은 가로등에 의지하여 펜이나 붓이 아닌 페인트가 든 캔을 벽에 분사하면서 순식간에 벽면을 칠하는 그 모습은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테크닉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이 화려한 곡으로 비르투오시티를 보일 때,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에너지와 폭발력이 지금 일리야에게서도 보여지고 있었다.

저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는 손놀림, 일리야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치이익 하는 분사음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완성된 그림을 머리에 담고, 손으로 그것을 차곡차곡 이루어 내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해낼 수 있어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루어 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깔끔하고, 신속하다.

프로 연주자처럼, 혹은 오픈된 주방에서 요리를 선보이는 쉐프처럼, 그렇게 일리야는 기술을 뽐냈다.

멋지다, 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일리야의 그래피티가 완성되었고, 영상이 끝났다.

“굉장했어요.”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박수를 치려다가 가까스로 그만두었다. 대신 작게 말로 칭찬을 이었다.

“너무 경쾌하고…… 멋있었어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대단한 걸 보여 주셔서 감사해요.”

“오…… 중앙음악학교에 다니는 애가 이리 말하니 자신감이 생기는데.”

“사실 전 미술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요.”

“미술이라고 하진 마. 그렇게 불릴 건 아니니까.”

일리야는 그건 아니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난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미술이 아니라고요?”

“전혀 아니야.”

“전 일리야가 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전혀 배운 적 없어. 내가 배운 건 스프레이를 뿌리는 방법뿐이야.”

조금 놀랐다. 이것이 그냥 거리에서 배운 것이라니……

욕심이 조금 난다.

“전공을 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더욱…….”

“싫어.”

일리야가 단언했다.

“넌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난 딱히 예술을 하자고 스프레이를 든 게 아니야.”

“…….”

“이 짓도 그만둘 거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겠어?”

여전히 그가 날 중앙음악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하는 학생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이 확 느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고루하기 짝이 없는 취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클래식이 아닌 다른 예술들을 폄하하는, 그런 바보 같은 잣대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난 그의 태도에서 약간의 어긋남을 느낀다.

“그렇다면 왜 매일 그림을 그리시나요.”

“뭘 매일 그려? 옛날 비디오인데.”

“오늘도 나가려고 하셨잖아요.”

“…….”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일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난 조금 더 직접적으로, 그가 변명할 수 없도록 다시 말했다.

“그림을 그리실 때 느껴지는 감정이 있으시지 않나요?”

“감정? 무슨 감정.”

“비디오 속의 일리야는 정말 즐거워 보였는데요.”

일리야의 그래피티 수준이 내 눈엔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객관적으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작품성에 대한 이야기를 차치하고, 그래피티를 그리던 일리야의 모습만 떠올려 보자면, 그는 결코 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순 없을 것이다.

“…….”

일리야는 내가 대체 뭘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재차 물었다.

“제게 재미있는 걸 보여 주시겠다고 하시기도 말씀하셨고요. 아닌가요?”

“아니, 뭐 맞아. 재미는 있지. 솔직히 재미가 없을 수가 없잖아? 벽에 낙서를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가 항복이라는 듯 되는대로 뇌까렸다.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일리야.”

그가 날 돌아보았다. 검게 염색한 머리칼이 흔들린다.

난 이 말만큼은 꼭 해 주고 싶었다.

“전 일리야가 한 것이 미술이라고 생각해요. 이 추위에 방독면을 쓰고 나가려는 그 열정 역시 일리야가 자신의 작품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법을 깨달아 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겠죠.”

“…….”

“일리야는 이미 예술가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닐까요?”

아니나 다를까, 일리야는 부끄러움과 어이없음이 혼재된 요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마주한 나 역시 내가 무슨 소릴 한 건지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린 말없이 소파에 앉아 침묵을 견뎠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참다못한 일리야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시 쓰고 싶어?”

“이런 멋진 시그니처까지 가지고 계시잖아요? 일리야는 예술가로서 적어도 저보단 훨씬 앞서나가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리야가 이번엔 살짝 짜증을 냈다.

“타티아나. 내가 잘은 모르지만 네 영상 보고 딱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었어. 넌 분명 아나스타샤보다 피아노를 잘 쳐.”

“……잘 친다 못 친다라고 판가름 할 수 있는 게 아닌…….”

“왜 못해? 콩쿠르로 잘만 하잖아.”

“…….”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입을 다물자 일리야가 약간 성이 난 투로 말했다.

“어쨌든, 난 아나스타샤만 봐도 재능의 한계를 느껴. 그 애가 종종 보이는 예술성은 압도적이기까지 하니까.”

“…….”

“그런데 그런 그 애보다 훨씬 뛰어난 네가 나보다 못하단 소리를 해? 타티아나. 그런 말로 쉽게 놀리지 마.”

일리야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겸손한 게 아니야. 교활한 거지.”

“약간 오해가 있네요.”

난 곧바로 반박했다.

“저는 제 연주자로서의 역량에 있어선 겸양을 차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웃기지 마. 넌…….”

“연주자로서 제 앞길은 마치 탄탄대로처럼 보이죠. 저도 알아요.”

“…….”

이번엔 일리야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난 바보가 아니었다.

콩쿠르에서의 우승도, 준비 중인 음반도 협연도 내 연주자로서의 능력에 따라 진행 중인 것들이다. 난 그러한 것들을 무시하고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 뿐이다.

“하지만 전 음악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것 또한 누가 뭐라 하건, 제가 아는 사실이고요. 그러니까 전 열심히 해야 해요.”

일리야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꾹 눌러 삼키는 듯했다. 조금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장난치며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전해진 모양이다.

그가 말했다.

“……너도 그래피티 배워 볼래?”

“예……?”

“농담이야, 타티아나.”

그가 실없이 웃으며 팔을 들었다가 늘어뜨렸다.

일리야의 시선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다. 목소리 역시 차갑고 날카로웠던 것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워져 갔다.

“그런 말 들으니까 이 나이까지 멍하니 있었던 내가 바보 같네.”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알아.”

잠시간 조용히 생각을 다듬는 듯하던 그가 이윽고 말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타티아나 너…… 어제저녁에 그랬지. 피아노를 계속 할지 아닐지 모른다고.”

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실수였다. 일리야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집에서 반대하는 거야?”

“예? 아뇨, 전혀 그런 건 아니에요. 아버지와 오빠는 적극적으로 절 지지해 주세요.”

“그럼 대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모르니까요.”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닌데.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모든 건 정말 순간에 일어난다. 난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도 했다.

때문에 난 이 삶이 언제까지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보너스 스테이지라 여기지 못했다.

그런 안도감에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난 편안할 수 없었다. 언제나 급하고, 잠자는 시간마저 아쉬워했다.

하지만 내 그런 발악도 부질없이 내게 주어진 기회가 오늘까지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 수 있었다.

가늘고 약한 손가락 근육 하나라도 상하면 안 되는 피아노 연주자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많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경호원, 빅토르도 그 전부를 막아 주진 못한다.

갑자기 주어졌으니 갑자기 빼앗아 가긴 더욱 쉽다.

떠올리면, 공포감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장갑을 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집 안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와중에도 근육이나 인대가 상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하고 가져다주는 식사만 먹으면서 기식해야 할 것이다.

그건 무의미했다.

때문에 난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꾸로, 더더욱 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섰다. 성악, 파티, 요리, 음반 등등.

저항한들 소용없다면, 운명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든 괜찮으리라. 내겐 그러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있을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

어차피 일리야가 이해하긴 힘들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금 생각들을 차분히 뇌리 뒤편으로 밀어 넣었다.

적어도 오늘은 괜찮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재미있는 것도 보았고, 일리야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멋진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난 기쁘게 웃었다.

“좋은 밤이네요. 차는 맛있었고, 일리야는 제게 정말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었죠. 즐거웠어요.”

“너는 참…….”

중얼거리던 일리야는 그런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오늘 즐거웠어.”

그의 미소에선 이전까지 있었던 약간 어두웠던 부분이 옅어져 있었다.

곧 그래피티도 다 그만둘 것이라고 말하던 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일리야가 리모컨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난 11학년이야. 하지만 그래도 미술을 배우면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미술대학을 말씀드리긴 했지만, 전 거리에서 그림을 배운 일리야를 꼭 캔버스 앞에 앉히고 싶은 건 아니에요. 일리야는 자유롭게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실 수도 있겠죠. 방법은 많지 않나요?”

“아티스트는 무슨, 그래피티 라이터라니까.”

끝까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쩐지 난 일리야가 조금 더 진지하게 자신의 그림을 돌아봐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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