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4화 (164/1,277)

##  164화

일리야와의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각자 돌아가 자기로 했다.

“잘 자.”

“잘 자요. 일리야.”

만날 땐 서로 놀라서 기겁했지만, 헤어질 땐 상냥한 인사가 오갔다. 난 일리야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아나스타샤의 방으로 향했다.

사실 잘 생각은 없었다. 그와 함께 했던 티타임과 대화는 내 긴장을 풀어주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생각이 많게 만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난 이 시간이면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다시 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난 살그머니 움직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엔 아나스타샤가 아직 자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이 조금 많은 편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침대맡에 살짝 앉았다. 그리곤 아까 일어나서 그랬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몇 시야?”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 뒤로 소름이 달렸다.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두 눈을 떴다.

“타티아나.”

잠이 덜 깬 흐릿한 두 눈엔 아직 총기가 없었지만,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대답했다.

“예, 여기 있어요.”

“몇 시야?”

“3시…… 30분이요.”

아나스타샤는 비스듬히 누워 눈만 들어 날 보다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어디 갔다 와?”

“예?”

난 살짝 당황했다. 그냥 일리야와 차를 마셨다고 하면 될 일이었지만 아나스타샤가 잠에서 깨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일어났어요. 다시 잘 거고요. 그러니 아나스타샤도 주무세요.”

“지금?”

“예.”

초점 없이 침대를 내려다보던 눈이 내 쪽을 향했다. 잠이 부족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푸른 눈엔 서서히 빛이 깃들고 있었다.

난 내가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난 지금 파자마 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긴 말 않고 손짓했다.

“이리 와 볼래.”

“……예?”

“이리 와.”

그녀가 다시 날 부른다. 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양팔을 확 뻗어 날 끌어안았다.

“……!”

난 기겁해서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날 놓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난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등을 감싸 안고 있던 손이 스르르 올라와선 내 뺨을 더듬는다.

잠시 후, 짧은 한 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차가워.”

“…….”

“어딜 갔다 온 거야? 타티아나.”

살짝 떨어진 아나스타샤가 침대에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본다.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차를 마셨어요.”

“누구랑?”

태연히 묻는 것 같지만, 난 이것이 아나스타샤가 내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짓말을 한 번 더 하는 순간 아나스타샤는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양팔로 끌어안고 있어서 도망도 못 친다.

“일리야와 함께요.”

“…….”

정직하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조금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내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잠시간 말이 없더니 이윽고 말했다.

“왜?”

“잠깐 잠에서 깬 틈에…….”

“아니, 왜.”

“……?”

난 무슨 말인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말했다.

“왜 내가 아닌 일리야냐고.”

약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아나스타샤는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난 그녀를 차분하게 달래듯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주무시고 계신…….”

“그래도 깨웠어야지…….”

아나스타샤는 드물게 칭얼거리는 어투로 말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특유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모습은 신선했지만 난 더더욱 벗어날 수 없어졌다.

유일하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입만 움직여 떠들었다.

“전 밤잠이 없어서 차를 마셨을 뿐이에요. 그런데 자야 할 사람을 깨우는 건…….”

“시끄러. 넌 말로 해선 안 돼.”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했다.

아나스타샤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냅다 뒤쪽으로 날 끌어당겼다.

나보다 훨씬 큰 그녀가 확 끌어당기니 난 꼼짝도 못 하고 딸려갔다.

“……!”

난 여전히 그녀에게 맞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기겁해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직접적으로 살갗을 통해 전해져 온다.

반대로 아나스타샤는 내게 온기를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웅얼거린다.

“차가워…….”

“……놓아주세요.”

“싫어. 차갑잖아.”

“그러니 놓아요, 아나스타샤.”

“그러니까 싫어.”

도대체 무슨 소릴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난 어떻게 하면 아나스타샤를 설득해서 떼어 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어림없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날 노려보았다.

“넌 일리야랑 놀다 왔잖아. 이젠 나랑 놀아.”

“놀아? 놀아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놓아주시면…….”

“우리가 할 놀이는 눈 감고 숨만 쉬고 있는 거야.”

“예?”

반문하기가 무섭게 아나스타샤가 딱 잘라 말했다.

“9시까지 꼼짝할 생각 마.”

“잠깐만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곤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난 아무리 그녀를 불러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곤 얌전히 포기했다.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곧바로 잠들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녀의 심장 소리는 조금 더 선명하게 내 귀에 들렸으니까.

“…….”

평상시 그녀라면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거리를 두는 만큼, 그녀 역시 민감하게 그것을 느끼고 내 거리를 존중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잠결에 아나스타샤가 대놓고 어리광을 부려 버리자 나 역시 각오했던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용서해 줄 수밖에 없었다.

“…….”

다시 잘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평소 서너 시간이면 더 잘 필요가 없었고 더군다나 지금은 아나스타샤에게 안겨 있기까지 했다.

자려야 잘 수 없는 상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저 멀리 물러갔던 수마가 다시금 내 정신을 덮쳐 왔다. 잘 수 있을 수가 없을 텐데,

난 다시 잠들었다.

***

멀리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타티아나.”

“…….”

눈을 떴다. 누운 채 흐릿한 시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조형을 갖춘 이목구비와 목소리에 다시금 편안함을 느낀다.

기다란 속눈썹과 푸른 눈이 위아래로 깜빡이다가, 가늘게 휘어진다.

따뜻한 목소리가 와 닿는다.

“일어날래?”

“……?”

일어났어요. 일어났으니까 눈앞에 있는 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겠죠.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고 달빛 아래에 있을 때도 예뻤지만 역시 지금처럼 눈을 뜨고 햇빛 아래에 있을 때가 더 반짝이는…….

“……!”

난 기절할 듯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내게 팔베개를 해 주고 있던 아나스타샤 역시 날 따라서 일어났다.

우리 둘은 침대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난 황망하게 더듬거렸다.

“저, 왜, 잠들…… 어……?”

“이히히.”

아나스타샤는 드디어 이겼다는 듯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가 나보다 늦게 일어난 건 거의 처음이지?”

“……아.”

“편하게 잔 건지 모르겠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난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사과부터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미안해요. 제가 원래 이렇게 자는 경우가 잘 없는데 오늘 그…….”

“나야말로 미안.”

내 사과를 도중에 자르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새벽에 많이 놀랐지.”

“……예?”

“엄청 놀라던데.”

그녀는 마치 지금만이 기회라는 듯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잠결에…… 네가 너무 추워 보여서 그랬어. 미안해. 싫었던 건 아니지?”

아나스타샤가 어떤 마음으로 날 끌어당겼는지, 왜 잠결에 한 일이라고 둘러대는지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그것을 직시했다간, 나도 덩달아 그녀처럼 어리광을 부려 버릴 것 같아져서 끝까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괜찮아요.”

거의 아나스타샤의 강압에 못 이겨 들어주는 형태였지만 어찌 싫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 분명한 것은 내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부터 익숙해져 있던 것들 중 하나가 오늘부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홀로 잠들었다가 홀로 깨어나는 것에 비해, 누군가의 온기를 전해 받으며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따뜻했고, 상상 이상으로 편안했다.

의지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린다. 난 거기에 절대 이길 수 없었다.

“…….”

덕분에 편하게 잘 수 있었다고 말하려니 아나스타샤에게 대체 얼마나 큰 실례를 한 건지 감도 오지 않아 도저히 내 입으로 말할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

아나스타샤에게 강제로 끌어당겨져 누워 버린 데다가 조금 추운 상태에서 따뜻한 아나스타샤에게 경계가 너무 풀려 버린 탓이었다.

“오늘은 정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나스타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나도 덕분에 따뜻하게 잘 잤는걸. 맨날 혼자 자서 추웠는데.”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산뜻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어려워하고 있자 그러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 진정하자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간밤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은근히 물어왔다.

“어젠 일리야와 차를 마셨다고 그랬지?”

“아…… 맞아요.”

“어때, 타티아나. 일리야가 잘 대해 줬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할 나위 없이요.”

“갑자기 또 불안해지네. 타티아나, 잘 들어. 일리야는 남자로서 정말 아니야. 넌 잘 모르겠지만 나쁜 남자라는 것들은…….”

험담을 들으면서 당혹스러웠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일리야에게 관심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부분에선 조금 억울해졌다.

그런데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아나스타샤가 이어 틀어막았다.

“농담이야. 네가 남자한테 관심 없다는 건 잘 알아.”

“…….”

“관심 없잖아? 아예.”

실제로 난 평소에 어쩔 수 없이 그런 태도를 견지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질문은 농담이면서 동시에 날 떠보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영리했다. 언제나처럼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에둘러 대화를 할 때의 아나스타샤는 평소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교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급했다.

“…….”

“와, 얘 좀 봐. 대답 못 하는 거야? 하긴 타티아나 넌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골라잡을 수 있…….”

“그런 말씀 마세요, 아나스타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전 그러면 안 돼요.”

당연한 말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지만, 상당히 노골적인 말이기도 했다.

난 스스로 어떻게 딱 한 갈래로 깔끔하게 결정을 내릴 수도, 누구에게 내 처지를 설명하고 상담을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막연히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한들, 난 지금 피아노 외엔 조심해야만 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확신이 뚜렷해 보이진 않는다.

그녀도 나처럼 어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무언가 확신을 얻기엔 그녀도 너무 어린 것이다.

“…….”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날 본다. 그녀는 내가 농담으로 받아치지 않고 대답한 말을 다시 곱씹는 듯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나스타샤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내게서 뭘 확인하고 싶은진 알겠다.

난 침묵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주 엇나가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안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짧은 한숨이 아나스타샤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안도의 한숨인지 유예를 묵과하는 한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조금 안도하는 기분이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앉은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어깨에 힘이 빠진 듯했다. 한결 본심을 드러낸 듯한 모습으로 그녀가 말했다.

“타티아나. 미안해.”

지금 미안해야 할 건 내 쪽이었다. 난 그녀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지 않도록, 아나스타샤가 경쾌하게 말했다.

“있잖아, 타티아나. 우리 피아노 칠까. 듀엣으로.”

“아침부터요?”

“아침이니까.”

폐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 않고 날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내가 피아노를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 둘은 슬리퍼를 신고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싱글벙글 웃으며 악보를 꺼내 보면대 위에 펼쳤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1번.

아침을 깨우는 신나는 곡이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다른 곡으로 할까?”

“아뇨, 이게 좋아요.”

“그렇지?”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1번은 명료하고 민족적 주제를 지닌 곡으로 총 16곡이나 되는 슬라브 무곡집에서 첫 번째 곡을 차지할 만한 곡이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악보를 한 번 보고,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우린 이 곡을 함께 맞춰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손이 들어 올려졌다가, 건반 위로 떨어졌다.

명랑한 화음이 네 개의 손에서 쏟아진다. 방 안에서 그랜드피아노를 두 명이 동시에 연주하니 어마어마한 음량이 방 전체를 울린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전혀 힘을 줄이지 않고 유쾌하게 곡을 이어 나갔다.

꾸밈음을 보란 듯이 화려하게 장식하고 화성은 더욱 크게 울리도록 한다.

마치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네 개의 손은 흐트러짐 없이 목가적인 주제를 그렸다.

푸른 정원, 혹은 들판. 결코 무겁지 않고 가볍지만 거대한 부피를 떠올린다.

문득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든 금방 잘 쫓아온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곡을 만지는 손의 박자뿐만 아니라 호흡, 심장박동까지 같아지는 기분이 든다. 나 역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웃으면서 어깨를 맞부딪혀 가며 연탄곡을 연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