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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65화 (165/1,277)

##  165화

연주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시계를 살폈다. 난 그녀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함께 고개를 돌렸다. 9시 30분이었다.

“슬슬 배고프지, 타티아나.”

사실 별생각 없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가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파자마를 벗어 들었다.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서 신경 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옷을 갈아입는데 마냥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방 밖으로 나가자 거실엔 이미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날 본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해 주셨다.

“난 너희들 덕분에 기분 좋게 일어났단다.”

아무래도 피아노 소리에 깨신 모양이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피아노 소리로 잠에서 깨기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러게 말이죠.”

옆에 앉아 있던 일리야가 거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11시는 되어야 기어 나올…….”

“일리야!”

아나스타샤가 빽 소리를 쳤다. 난 아나스타샤가 주말에 늦잠을 자는 것으로 뭐라고 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조금 창피한지 일리야를 윽박질렀다.

“아무 말이나 막 지어내지 말아 줄래? 나도 오빠의 대서사시를 한 번 써 볼까?”

“난 상관없는데.”

일리야는 내게 눈짓하며 피식 웃었다. 난 이미 일리야가 그래피티를 그리는 것까지 봤다. 다른 무언가를 본다고 해서 그리 놀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뭐라 포문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맞는 말이잖니, 아나스타샤.”

“엄마!”

“평소 우리 집엔 영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말이지…… 엄마는 조금 섭섭했단다.”

“……!”

아나스타샤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하지만 이 또한 자업자득이다. 어머니마저 나서서 학교 친구인 내게 일부러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알 만했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저 애, 학교에선 연습 제대로 하긴 하니?”

“열심히 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나스타샤의 연습량은 평균적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지 않고 중앙음악학교 같은 천재들의 소굴에서 버티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조금 아나스타샤를 골려 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여기서 나까지 아나스타샤를 몰아붙였다간 그녀는 정말 기댈 곳이 없게 된다.

내가 그녀를 변호하자 아나스타샤는 흡사 구원자를 찾은 듯한 눈으로 날 보더니, 조금 용기를 얻었는지 반항적으로 말했다.

“것 봐. 타티아나도 그러잖아. 그리고 지, 집에서도 열심히 하는데? 와, 나 지금 너무 억울해.”

“개뿔.”

일리야가 단번에 딱 잘라 말했고, 아나스타샤가 일리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일리야는 전혀 무서울 것 없다는 코웃음을 쳤다.

아나스타샤는 자꾸만 내 눈치를 보았다.

지금 그녀가 연습을 잘 안 한다는 말이 자꾸 나오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는 듯했다. 그리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희한하다는 듯 아나스타샤와 날 보다가 말씀하셨다.

“자, 너희들도 나왔으니…… 이제 아침 식사를 할까? 오늘은 뭘…….”

“저와 아나스타샤가 요리를 해 봐도 될까요?”

“응?”

내 제안에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셨다. 상상도 못 한 제안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니?”

“주방을 빌려주신다면 아침 식사를 만들어 볼게요.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지만…… 일반 가정식이라면 할 수 있어요. 혹시 못 드시는 게 있나요?”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이 내가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주한 피아노로 기분 좋게 주말 아침을 맞이했다면, 가벼운 아침 식사 또한 아나스타샤와 함께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니, 타티아나.”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내가 주방에서 무언가 한다는 것이 마뜩잖으신지 약간 난색을 표하셨다.

그때,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하하하하! 그것도 괜찮겠군!”

“여보, 잠깐만. 저 애는 손님이야?”

“뭐 어때? 아나스타샤와 같이 한다잖아.”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능청스레 답했다. 내 제안이 아주 흡족하신 모습이다.

어제 뵌 후로 가장 즐거우신 모습으로,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흔쾌히 말씀하셨다.

“좋아, 타티아나. 주방과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라 일리야도 빌려줄 테니 마음대로 써도 된단다.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사 오도록 보내면 되겠구나.”

난 마다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감사합니다. 세르게이 예브네비치.”

“잠깐만, 아빠. 무슨 소리야? 난 왜?”

“넌 동생과 손님이 네 입에도 들어갈 것을 만들어 준다고 움직이는데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냐?”

“아니…….”

일리야는 당장 일어서 도망치기라도 하려는 듯 움찔거렸으나, 내 쪽을 보더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도로 소파에 앉았다.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일리야는 항복했다.

“카드는 줘요. 나 돈 없으니까.”

“뭘 그리 샀는지…… 쯧.”

그의 아버지는 혀를 차시긴 했지만 일리야에게 카드를 내어 주었다.

그렇게 나와 아나스타샤, 일리야 세 명은 주방에 섰다.

아나스타샤는 열성적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요리에 대해선 내 보조일 수밖에 없었고, 일리야는 척 봐도 요리를 할 것 같진 않다.

자연스레 총괄 쉐프는 내가 되었다. 지시를 해야 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냉장고를 살피다가, 뭘 만들지 정했다. 일반적인 가정식 식사로 5인분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드미트리에게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난 고무장갑을 꼈다.

양손에 다 끼우진 않고 재료를 잡아야 하는 왼손에만 끼운다. 이건 손을 다치지 않게 칼을 다룰 수 있게 드미트리가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내 모습을 보던 일리야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신경 쓰이게 하지 마세요. 칼 잡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일리야는 딱히 내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조금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너 칼도 잘 쓸 줄 알아?”

“아직 미숙해요.”

짧게 대답했다. 날 가르친 드미트리에 비하면 난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일리야는 물끄러미 날 보다가 재차 물었다.

“악기 다루는 애들은 그런 거 무서워하지 않나?”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긴 하다.

특히나 난 그 부분을 더더욱 심각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너무 약하고 연주자는 더더욱 약하다.

그래서 다른 연주자가 혹여나 부상을 입을 것 같은 상황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져 온몸이 굳어 버리고 만다.

난 내가 과할 정도로 예민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 역시 칼을 잡긴커녕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어야 했지만, 난 떨지 않고 침착하게 칼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장갑을 꼈어요.”

“그래도 신기하네.”

자칫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난 운명이 내게 요리 정도는 허락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요리를 하는 날 방해하진 않을 것이다.

일리야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런데 하나 실수했네.”

“……무슨 말씀이세요? 일리야.”

“양손에 고무장갑을 꼈어야지.”

드미트리는 칼을 쥐고 있는 손의 감각을 유지하는 게 좋으니 한 손에만 끼라고 했었다.

일리야가 이어 설명했다.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면 칼 쥔 손에 장갑을 껴야 할 것 아냐, 타티아나. 드라마도 안 봤어? 요즘은 과학적 수사 방법이 좋아져서 그렇게 안일하게 작업하면 다 걸려.”

“또 무슨 헛소리야, 일리야. 할 일 없으면 저리 가.”

아나스타샤가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일리야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할 일이 없으니까 구경하는 거지.”

“진짜 왜 이래?”

“싫으면 할 일을 만들어 주든가.”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긴 했지만 일리야에게 무언가 시키자니 조금 고민될 수밖에 없었는데, 일리야는 그 고민을 단번에 날려 주었다.

그에게 말했다.

“일리야. 부탁이 있어요.”

“하명하시죠.”

일리야는 짐짓 장난스레 대꾸했다. 난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계란과 양배추를 사 와 주시겠어요?”

“계란 있지 않아?”

“오래되어서 못 먹어요.”

“아, 그래…….”

일리야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간 충격인 모습이다.

아나스타샤는 내 주문에 하나를 덧붙였다.

“일리야, 콜라도.”

“콜라? 무슨 요리를 하는데 콜라가 다 들어가?”

“내가 마시고 싶어서.”

“…….”

일리야는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군말하지 않고 주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일리야와 있을 땐 한숨을 몇 배는 더 쉬는 것 같다.

“진짜…….”

“화내지 말아요.”

“양심도 없…… 아니, 할 일이 없다면서 실없는 소리나 하던 것 봤어?”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심심하신 것 아닐까요.”

“심심하면 옆에 앉아서 감자나 까 주면 좀 좋아? 할 수 있는데도 얄밉게 굴고.”

투덜거리며 아나스타샤가 말을 이었다.

“매사 그런 식이니까 아빠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하던 일리야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다른 것을 떠올린 듯하다.

그 뒤로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아마 일리야와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일 것 같다.

일리야는 11학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다. 예상컨대, 웃으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다 말고 그만두었다.

“아니다.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니까.”

“아나스타샤는 일리야가 걱정되시나 보네요.”

“뭐? 전혀 아닌데?”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펄쩍 뛰었지만 난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괜찮을 거예요. 아나스타샤.”

“응?”

“괜찮을 거예요.”

난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일리야는 더 진지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

일반적인 가정식 레시피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서 상을 차리자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은 정말로 좋아해 주었다.

아나스타샤의 부모님들은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않고 칭찬해 주셨고, 일리야도 상당히 솔직하게 놀라워했다.

무엇보다, 아나스타샤가 정말 좋아해 주어서 기뻤다. 그녀는 만발한 꽃같이 좀처럼 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녀는 유난히 들뜬 모습으로 요리에 무엇이 들어갔고 어떤 부분을 나와 함께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티타임을 가진 후에는 아나스타샤와 연습을 조금 더 했다.

다시 집중해서 아나스타샤와 함께하는 연습 시간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흘러갔다.

점심은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추천하는 대로 밖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이곳 역시 상당히 괜찮았다. 자신 있게 추천하실 만했다.

그렇게 점심 식사도 마치고, 난 이만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있지 그러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밖에서 헤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고, 집에 다시 들러 차라도 한 잔 더 마시고 가길 권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다시 그 집에 들어간다면 저녁 전에 내 발로 다시 나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서 머리가 조금 식은 상태일 때,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적절하고, 깔끔하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빅토르가 날 맞이하러 왔고, 난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또 오렴, 타티아나.”

“잘 가.”

인사말들이 오갔고, 난 활짝 웃으며 꼭 다시 오겠다고 답했다.

차에 타고 오는 사이에도 빅토르도 내게 즐거웠느냐고 물었다.

즐겁고말고, 난 아나스타샤의 가족들과 만나고, 인사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빅토르는 내가 좋다면 다 좋다는 사람이어서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집으로 돌아왔다.

“쉬십시오, 아가씨.”

“예. 빅토르. 정말 고마웠어요. 편히 쉬어요.”

“아가씨도 참.”

빅토르는 날 내려 주곤 차를 주차하러 갔고, 난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주말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대부분 외출하거나 쉬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고용인들의 복지에 대해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라 우리 저택에서 주말에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은 절대 찾아 볼 수 없었다.

천천히 걸으니 내 방까진 한참이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컸던가? 새삼 신기하다.

복도 한쪽의 방 앞에 선 나는 잠시간 방문을 올려다보다가,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칙칙한 벽지에 나무로 된 책상, 화장대, 옷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타 온 상패들. 그리고 침대가 전부다.

아나스타샤의 방에 비하면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익숙한 공간이지만,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난 침대에 앞으로 쓰러졌다.

“…….”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후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머리를 침대에 더더욱 파묻었다. 내 침대는 차갑다.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의 방과 그녀의 팔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전해 주었던 그 따뜻함은 거의 폭력적이어서, 그간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던 내 일상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이 방과 침대가 유난히 춥게만 느껴진다.

“…….”

갑자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나 오빠에게 같이 자 달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매일같이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늘만이라도 좋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승낙해 주실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어디 아프지 않냐고 묻겠지.

난 그저…….

“…….”

집어치우자.

정말이지 애도 아니고 갈수록 덜떨어져 가는 것 같아 미치겠다.

이 무슨 멍청한 어리광이란 말인가? 창피한 줄 알아야 했다. 난 혼자 자는 것에 익숙했고, 앞으로도 익숙할 터였다.

“앞으로도……?”

중얼거리다가 침대보를 꽉 쥐자 주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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