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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66화 (166/1,277)

##  166화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선 루슬란은 주방에 있던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루슬란 오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묘하게 밝은 모습으로 타티아나가 인사했다. 머리는 방해되지 않도록 올려 묶고, 앞치마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루슬란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지. 너는?”

“전…… 저도 잘 잤어요!”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새벽 3시, 4시만 되어도 별관에 있는 자신의 연습실에 몰래 들어가선 아침 연습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순진하게 웃고만 있었다.

“아침 식사는요? 하시겠지요?”

“어, 그러려고.”

“앉으세요, 앉아 주세요.”

“알았어.”

타티아나는 즐겁게 말하며 식탁 앞의 의자까지 빼 주었다. 루슬란은 무슨 일인지 아직도 감이 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먼저 와 있던 사람,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가 막 보고 있던 신문을 내리곤 그 너머로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일어났느냐.”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어딘가 한 군데 나사가 풀린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루슬란은 엄격하고 냉정한 아버지에게 생전 농담을 하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농을 걸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거. 혹시 오늘 아버지 생신입니까?”

“넌 아비 생일도 모르느냐?”

유리가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타티아나가 쉐프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우겠다고 선언한 이후 몇 번 정도 팬케이크인 블린이나 쿠키 등을 만들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타티아나가 꼭 아침 식사를 만들어 주고 싶다더구나.”

타티아나가 요리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과, 그렇게 배워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준다는 것에 유리는 감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슬란은 좋은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할 말이 있어 입을 열었다.

“오늘만이겠지요?”

“무슨 소리냐.”

유리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루슬란이 이어 말했다.

“아침부터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루슬란은 이제 주방에 들어가 드미트리에게 무언가 설명을 듣고 있는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저 애는 새벽 서너 시면 일어나는데.”

“……그렇지.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다고 하더군.”

침음성을 삼키며 유리가 말했다. 유리는 그 문제에 대해 루슬란만큼이나 심각했다.

늘 그는 집사장 예고르로부터 타티아나의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보고받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아버지를 보며 루슬란이 말했다.

“왜 잠을 못 자는 걸까요.”

타티아나는 12시쯤 되면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어나 다시 피아노 앞에 달라붙는다.

누가 봐도 열다섯 살짜리의 정상적인 생활 패턴은 아니었다.

주방에 있는 타티아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유리가 조용히 말했다.

“정신과 주치의도 그 점에 대해선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타티아나처럼 완전 기억 상실이라는 것 자체도 굉장히 희귀한 일이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의사예요? 돌팔이 아닙니까?”

“적어도 모스크바에선 가장 권위 있는 정신과 전문의다.”

유리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더 정확히 문진을 하고 검사를 받는다면 무언가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루슬란.”

타티아나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땐 곧장 큰 병원에 입원시켜서 CT 촬영이나 MRI, 뇌파 검사 등 그야말로 안 받아 본 검사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돈과 기술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현대의학으로도 혼수상태에 빠진 타티아나를 깨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집에 다시 데리고 와서 간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타티아나는 다시 깨어났다.

타티아나의 상태를 봤었던 모든 의사들이 타티아나를 다시 병원에 데려가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혹시 기억을 되찾아 낼 수 있도록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와 함께.

하지만 유리는 단박에 그 모든 것들을 거절했다.

그 후로도 타티아나는 병원에서 검사 같은 것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애가 잠을 못 자지 않습니까. 검사를 해야 치료를…….”

“적어도 드러난 문제는 없으니까. 처음엔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고.”

유리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루슬란은 할 말이 다 없었다.

아버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은 비합리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유리는 타티아나가 지금 이대로만 자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유리가 재차 말했다.

“타티아나의 입장도 생각해 봐라. 우리가 종용해서 정신적 검사를 받게 하는 게…… 그걸 저 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타티아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아버지와 오빠가 무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더더욱 감추고 숨길 것이다.

지금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별관에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라도 치지, 만약 정신검사라도 한 번 받게 시킨다면 새벽 3시에 일어나 그대로 뜬 눈으로 침대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도록.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였다.

루슬란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루슬란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았다.

지금 해맑게 웃으며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우는 타티아나에겐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무언가 불안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저 애가 우리에겐 죽어도 내색을 안 하려 해서 그렇지.”

루슬란이 뇌까렸다.

“생각해 보면……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도 그랬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감정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이곤 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

하지만 지금, 적어도 루슬란은 달랐다. 이전에 루슬란은 그런 타티아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똑같이 무시와 강압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되레 심각해지기만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아버지. 제가 이야기를…….”

“아니.”

상당히 용기를 가지고 꺼낸 루슬란의 말은 미처 문장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유리에게 막혔다.

아들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괜찮다.”

대체 뭐가 괜찮은 겁니까? 루슬란은 묻고 싶었다.

현상유지를 하자는 건 타티아나를 믿자는 이야기이지만, 타티아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이건 가족 모두의 협력이 필요했다.

잠을 잘 못 잔다는 것 외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이대로 내버려 두고 지켜보는 것이 맞는가?

“아버지.”

“그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저 애가 철이 들었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슬란이 이어 말했다.

아버지에게 하는 고언치고는 상당히 사나운 어투였다.

“단언컨대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버지의 희망사항일 뿐이에요.”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루슬란의 말에 유리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대답할 뿐이다.

“나도 안다. 루슬란.”

부자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났지만 아직 생각할 거리는 남아 있었다.

루슬란은 지금 이렇게 식당에 앉아서 동생이 차려 줄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 못한 것이 굉장히 슬펐다.

왜 아버지와 마냥 유쾌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유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유리는 다시 신문을 들어 올려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말했다.

“루슬란. 웃어라.”

“그렇죠. 지금 아버지와 제가 안 웃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타티아나와 드미트리가 트레이를 밀고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식탁에 접시를 세팅해 나갔다. 가벼운 아침 식사 메뉴였다.

식탁 세팅도 마치고, 앞치마를 벗고 의자에 앉은 타티아나가 말했다.

“정말…… 모두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지 볼을 감싸며 말했다.

“오늘은 별것 아니지만…… 다음엔 조금 더 많이 배워서, 저녁 식사도 만들어 볼게요. 아버지, 루슬란 오빠.”

지금 식탁에 기름진 육류 요리 등은 보이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요리를 조금 더 배운다면 만찬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엔 더 기름진 음식도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떠올렸는지 유리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대하고 있으마, 타티아나.”

“기대해 주세요.”

이제 식사를 시작할 때였다.

유리가 대표로 기도를 올렸다.

“이번 주도 우리 모두의 평화와 건강을 기원하며.”

월요일 아침 식사 기도로 그리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들자꾸나.”

“예.”

루슬란은 앞에 있는 보르쉬를 떴다. 한입 먹자마자 루슬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루슬란은 맛이 없더라도 무조건 맛있다고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이 입안에 들어간 보르쉬는 상당히 맛있었다.

이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타티아나가 해 줬던 것은 자신의 입맛에 평범하게 느껴지는 수준이었는데, 이번엔 정말이지 괜찮았다.

“정말 맛있구나, 타티아나.”

“다행이에요.”

“드미트리의 맛은 아니군. 타티아나 네가 많이 애를 쓴 것 같은데…… 뭔가 바뀌었구나.”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예. 오리고기를 넣어 봤어요.”

“……오리고기?”

뭘 넣든 사실 상관은 없지만, 보르쉬에 소고기나 양고기까지 넣는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오리고기는 처음 듣는 레시피였다.

유리가 조금 희한하다는 듯 그릇을 쳐다보고 있자, 타티아나가 급히 말했다.

“농담이었어요, 죄송해요.”

“농담이라고?”

유리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타티아나가 농담이라는 것을 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루슬란은 큭큭 웃으며 식사를 했다. 타티아나가 상당히 당돌한 끼가 있단 것은 진즉 아는 바였다.

루슬란은 몇 번이고 당한 적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타티아나는 재잘거렸다.

근래 준비하고 있는 음반에 합주에 하는 일도 정말 많았다. 대학생인 루슬란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는 타티아나가 뭘 하든 전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다시 한 번 말했고, 타티아나는 웃으며 감사를 표한다. 정겨운 광경이었다.

“저기, 아버지.”

그때, 타티아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유리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막 숟가락을 들던 유리가 눈만 들어 타티아나를 보더니 도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타티아나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들어줄 태세였다.

“무슨 부탁이냐?”

“……혹시 벨카가 집 안에 들어오면 안 될까요? 제 방에 들어올 수 있게요.”

무슨 부탁일지 루슬란 역시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타티아나의 부탁은 엉뚱한 것이었다.

벨카?

유리 역시 예상도 하지 못했는지 가만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한 듯했다.

하지만 일단 나올 대답은 명백했다.

“벨카는 집 안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다. 그리고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루슬란은 이 와중에도 딱딱하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를 보며 내심 존경심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라면 마음대로 하라고 곧장 허락해 버렸을 것 같다.

하지만 유리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차라리 실내에서만 키우는 작은 견종은 어떠냐?”

흙발로 마당을 뛰놀다가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 집 안에서 곱게 기르는 강아지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여기까지가 유리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무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뇨……. 벨카가 안 된다면 없던 일로 할게요.”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유리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타티아나. 난 무엇이든 타협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키워 보는 것도 괜찮을…….”

“제 마지막 타협은 벨카까지였어요.”

타티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지막 타협이 알래스칸 말라뮤트인 벨카라면, 호랑이 같은 거라도 들일 생각이었단 말인가? 루슬란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벨카를 거의 가족처럼 여기는 타티아나가 그것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

루슬란은 자신이 나설 때라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그냥 들어주시죠. 그게 뭐 별겁니까?”

“……흠.”

사실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벨카는 순하고 조용한 개였고 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

집 안에 들인다고 해서 양탄자를 흙발로 밟고 다니거나, 소파를 물어뜯는 둥 심한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진 않았다.

“좋다. 그렇게 하거라.”

“아버지……!”

“대신 조건이 있다.”

무조건적으로 들어줘도 상관없겠지만, 최소한의 규칙이란 것은 필요했다. 유리가 말했다.

“벨카를 들이고 내보내는 건 항상 타티아나 너여야 한다. 벨카가 본관 곳곳을 돌아다니게 둘 순 없다.”

“예.”

유리가 이어 덧붙였다.

“그리고 저녁엔 다시 내보내야 하고.”

“저녁……에요?”

“그래. 모두가 쉬어야 할 시간에 집 안에서 대형견인 벨카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면 쉴 수 있겠느냐?”

“…….”

대형견이 집 밖에서 짖는 것과 집 안에서 짖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벨카는 그리 자주 짖는 편은 아니었지만, 유리의 조건은 합당했다.

문제는 타티아나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에요.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벨카가 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대 수술 등을 할 수도 있지만, 타티아나가 결코 벨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차라리 자신이 포기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마당에서 키워야 하는 개는 결국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리가 재차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타티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제가 엉뚱한 소리를 했죠. 죄송해요.”

여기서 자신이 침울해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나빠지리란 것을 이해한 듯했다. 타티아나는 짐짓 씩씩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이 샐러드는 어떠세요? 너무 달지 않나요?”

“……괜찮더구나.”

루슬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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