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학교나 회사에 출근하면 보통 월요병이라는 것을 겪기도 한다지만, 난 그런 것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내 일과는 주말이나 주중이나 다를 바가 거의 없었고, 마음 같아선 주말도 없이 매일같이 학교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만약 주말이 없었더라면 저번 주말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있었던 일도 모두 없었을 테니까.
난 그날 밤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생소하고, 신기하고, 인상 깊었던 일들.
그와 동시에, 늘 당연했었으나 이젠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들.
오늘 홀로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이 차가운 침대를 다시 당연하게 여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
오늘 뜬금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한 것은 순수하게 아버지와 오빠에게 밥을 해 먹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중 일부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벨카의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버지나 오빠가 안 된다면 하다못해 벨카라도 괜찮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견인 벨카에겐 상당한 제약이 걸려 있었다. 난 그 모두를 이해했고, 포기했다.
아버지나 오빠는 꽤 자주 내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말했고, 우리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규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난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바란다면 빌딩이라도 사 주실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무엇이든 가능하진 않았다.
“…….”
아니지, 생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었다.
저택 안으로 벨카가 들어오는 것에 제약이 있다면, 반대로 내가 밖으로 나가면 되지 않는가?
별관은 거의 나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벨카가 오가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내가 내 방을 버리고 별관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아버지나 예고르는 내가 멀쩡히 있는 저택 본관을 두고 별관으로 간다면 걱정하시겠지만 그건 잘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괜찮은 해결 방법이었다.
그렇게 떠올린 것을 검토하면서 막 학교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난 익숙한 아이들을 발견했다.
동계 교복에 모자를 쓰고 목도리까지 한 뒷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아나톨리! 류보비!”
작은 머리가 이쪽을 돌아본다. 그리곤 순식간에 밝아졌다.
“엇, 타티아나 누나?”
“언니!”
두 사람은 쪼르르 달려왔다. 기세 그대로 내게 안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진 않았다. 두 사람은 내 앞에 멈춰 서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 활기찬 인사에 나까지 기운을 전해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난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두 분 모두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예. 그럼요.”
“전 실내 동물원에 갔었어요!”
아직 날씨가 추워서 야외 동물원은 제대로 구경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류보비의 부모님들은 그녀를 실내 동물원에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난 류보비의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어쩐 일로 두 분을 함께 보게 되네요. 혹시 함께 등교하신 건가요?”
“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에요, 언니! 제가 아나톨리랑요? 왜요?”
음…… 말실수를 한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펄쩍 뛰었다. 잔뜩 인상을 쓰며 서로 두 발걸음쯤 멀어지는 걸 보니 정말 질색하는 것 같다.
특히 류보비는 더더욱 기세를 높혀 말했다.
“우연히 이 앞에서 만난 거예요, 같이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 1초 후면 갈라질 생각이었어요! 전 성악과고 쟤는 바이올린과니까요.”
같은 또래라 친해질 줄 알았건만,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내 스터디 그룹에서 만난 그 직후부터 유난히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곤 했다.
심각하게 싸우는 일은 없었고, 내가 보기엔 서로 다투는 모습도 귀엽긴 했지만…… 아무쪼록 사이좋게 지내 줬으면 좋겠는데.
항상 상황은 비슷했다. 류보비가 아나톨리의 신경을 살살 긁으면서 놀리고 아나톨리는 짐짓 어른스럽게 넘기다가 비등점을 넘어 폭발하곤 했다.
지금 아나톨리는 아직 폭발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오버하지 마. 시끄럽게.”
“와, 어이없어. 잘난 척은 진짜.”
“네가 쓸데없이 시작했잖아.”
“내가 뭘? 언제?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랑 왜가 빠졌잖아.”
“나도 알거든? 필요 없어서 뺀 거잖아. 넌 그것도 몰라? 왜 이렇게 답답해?”
그렇게 둘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들을 쏟아 냈다.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둘의 말다툼이 무언가 주제가 있는 설전이 아니라 말꼬리 잡기로 넘어가는 것 같자 제동을 걸었다.
“두 분.”
“……아.”
내가 부르자마자 아나톨리도 류보비도 말을 뚝 멈춘다.
입을 다물고 날 올려다보는 것이 혼날 것을 걱정하는 눈초리였다.
“이리 와 보세요.”
“…….”
바짝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난 무언가 설교를 각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나톨리와 류보비를 차례로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굽히고는 양팔로 두 사람 모두 껴안았다.
“……!”
찬 바람에 차가웠지만 폭신한 부피감이 느껴진다. 난 조금 더 힘을 주어 꾹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싸우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셋이 함께 들어갈까요.”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다투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흘러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인다.
***
“다시 해 볼까?”
“예.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과 하는 레슨은, 선생님이 피아노로 바이올린과 첼로 파트를 맡아 주시고, 내가 피아노 파트를 하는 형식이었다.
주말에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아나스타샤와 이렇게 많이 연습해 본지라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
다시 반복해서 연주를 한 번 마치고, 미하일 선생님은 콧소리를 내며 악보를 휙휙 넘기셨다.
전체적인 것을 다시 보시는 듯하더니 불쑥 물었다.
“타티아나. 무슨 일 있었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일이라뇨?”
“아니, 너무 놀라지 말거라.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내가 깜짝 놀라자 미하일 선생님이 손을 내저으며 말씀하셨다. 그리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약간 고민하셨다.
“네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모습이시다.
피아노에서 드러나는 느낌이란 대부분 그렇다. 사람의 언어란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에 상당히 부족하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근래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구나.”
“좋은 일이요……?”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집에 놀러 갔었던 일.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피아노 소리가 바뀔 정도로 영향이 간단 말인가?
정작 나는 무엇이 바뀌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다.
“음, 타티아나. 네 스스로는 잘 모르는 것 같구나. 하지만 듀엣을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있단다. 한결 부드러워졌어.”
이상한 말씀이었다. 난 이 곡의 레슨을 봐 달라고 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전 이 곡을 처음 보여 드리는 건데요.”
“비단 이 곡만의 이야기가 아니란다.”
이 곡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전까지 내가 하던 모든 연주와 비교했을 때 변화가 보인다는 말씀이신가?
하지만 정말 그렇게 변화가 생겼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난 내 소리에서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는 제 음색에 변화를 못 느끼겠어요, 선생님. 무엇이 바뀌었는지…….”
“하하, 단순한 음색의 이야기도 아니지. 네가 품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란다.”
갈수록 아리송해지는 미하일 선생님의 말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선생님이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타티아나. 네가 이전까진 네 할 일에만 고도로 집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젠 제법 두리번거릴 줄도 알게 된 것 같구나.”
“두리번거린다고요?”
미하일 선생님은 좋은 이야기라고 하셨지만, 내가 듣기에 그 말은 그리 좋게 들리지 않았다.
두리번거린다니? 피아노를 앞에 두고, 건반에 손을 올린 채로? 내가?
“제가 집중을 못 한다는 의미이신가요?”
“그런 안 좋은 의미로 오해하면 곤란하구나. 내 말은, 네가 주변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미하일 선생님은 달래는 투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아예 피아노에서 몸을 돌려 내 쪽으로 앉으셨다.
안경을 고쳐 쓰시곤, 양 무릎에 팔을 올린 채로 날 바라보신다. 그 진중한 얼굴에 농담기는 전혀 없어 보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전까지 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협연자가 거기에 쫓아올 수 있는지 아닌진 신경 쓰지 않았지. 그렇지 않니?”
미하일 선생님은 한 번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다.
“내 생각에……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게다. 합이 맞는 상대를 찾는다면 해결될 일이니까.”
실제로 그랬다.
바이올린과 10학년의 막심 선배와 합주를 했을 땐, 내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선배가 잘난 척하는 얼굴이 보기 싫어서 조금 차갑게 대하긴 했지만, 사실 그런 연주자와 함께라면 어떠한 곡을 하더라도 인정하고 반주를 맡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그런 바이올린 주자가 막심 선배 한 명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리 많지도 않다. 그건 확실하다. 막심 선배 같은 실력을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는 결코 흔하지 않다.
미하일 선생님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이상적이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늘 협연자를 고를 수만 있다는 법도 없으니.”
“그렇겠죠…….”
콩쿠르 등에 나간다면 내가 모르는 오케스트라와 함께해야 한다. 연주회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내가 모르는 연주자와 함께해야 할지 그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타티아나. 네가 마음에 안 드는 협연자와 함께하게 되어 발걸음을 조금 늦추게 되는 것이 지독하게 싫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
“……예?”
난 깜짝 놀랐다.
이건 구세프 선생님이 평소 하시는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항상 나에게 협연을 한다면서 왜 독주자의 기질을 버릴 생각을 않느냐고 야단을 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늘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잘 찾지 못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가만히 날 지켜본다.
난 지나간 몇몇 협연자들을 떠올렸다.
막심 선배가 말하길 난 협연자로서 하자가 있는 연주자라 했다. 까다롭고, 옆을 보지 않는다.
아나톨리와 함께했던 연주도 생각났다. 객관적으로 아나톨리는 아직 내 피아노 소리를 이겨 낼 힘이 없었다.
아직 어리고, 바이올린도 작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봐주지 않고 그대로 내 기준을 고수했다.
그건, 내 문제였다.
“사실…… 안 괜찮겠지요? 제가 맞춰야 하는 것이잖아요?”
내 대답에 미하일 선생님이 웃었다.
“기특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정답을 말하고자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단다.”
“거짓말이요……?”
“실제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건 받는 것이지. 협연자끼리, 혹은 오케스트라와 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
난 실제로 많이 해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 역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다.
때문에 미하일 선생님은 무조건 피아노가 맞춰야 한다고 이야기 하시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타티아나.”
선생님의 목소리가 일순 변한다.
여기까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미하일 표도르비치의 이야기, 이다음부터는 중앙음악학교 선생님으로서의 미하일 선생님의 이야기다.
“타협이란 것은 사실 꽤 중요하단다.”
“타협…… 말씀이세요?”
“그 단어가 싫다면 다른 말도 좋단다. 전체적 음악의 완성도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좋지.”
“…….”
“다른 악기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피아노는, 피아노는 다른 악기에 맞춰 줘야 할 필요가 있단다.”
선생님으로서의 미하일 선생님은 당연히 내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더 저변을 넓히길 바라실 것이다.
그 어떤 선생님도 제자가 굴곡진 길을 걷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어떤 협연자와 만나서도 무난하게 박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연주회를 성공시키고, 그 어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더라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적절하게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는 그런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실 것이다.
“타티아나 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이 아직 완전히 편안해 보이진 않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어 말씀하셨다.
“피아노 협연자로서의 너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보여지는구나.”
선생님은 이렇게 날 안심시키시지만, 사실 난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가 옆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게 협연자로서 상당한 문제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태껏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내가 갑자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이대로 된 건가?
“…….”
나 스스로는 느껴지는 바가 잘 없어서 모르겠다.
미하일 선생님이 악보를 툭 치며 물었다.
“이 합주, 누구랑 하는 것이지?”
“10학년 선배 둘이요.”
대답하면서 난 두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 협연자로서 성장했는지 못 했는지는, 아마 같이 합을 맞춰 본다면 선배들이 이야기해 줄 것이다.
특히 막심 선배는 날더러 성격이 나쁜 피아니스트라고 하질 않나, 음악적인 면에선 굉장히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어떤 면에선 믿을 만하기도 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재미있겠구나.”
재미있어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