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8화 (168/1,277)

##  168화

추워.

“…….”

어깨를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아직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고개를 막 돌리다가, 목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

어제 꽤 오랫동안 연습하다가 예고르에게 혼이 나고, 방으로 돌아와서 일반교과 공부와 숙제를 하고는 침대 위로 거의 쓰러지듯 잠든 게 1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피로가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난 이불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힘이 하나도 없다.

평상시 같으면 그래도 이불을 걷고 일어나 대충 씻고는 별관으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 자야 할 것 같았다.

게으름 같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단한 결과 내리는 닥터스톱이었다.

“…….”

그런데 두 눈을 감고 아무리 잠을 청해 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도 어지럽고,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갈 정도였지만 편안하게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누워도 편하지 않았고, 아무리 웅크려도 냉기가 팔다리로 스미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소름이 끼쳤다.

“……읏.”

웅크리다가 양다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등줄기에서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와 목을 거쳐, 뒷머리로 스며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베개에 머리를 더욱 파묻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진 명백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마음 편하게 인정할 순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다면 그나마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난 그간 혼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잠들었다. 머리만 눕힐 수 있다면 잠자리가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내게 있어서 그런 건 무가치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것들 때문에 지금 난 이가 떨릴 정도의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로 이틀째, 내가 느끼는 끔찍함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저번 주말, 내가 아나스타샤의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러한 기분을 느끼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지금 등허리를 맴도는 이 차가움도, 어깨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불편함도.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이다.

“…….”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지금 뭘 하고 계시지? 오빠는? 물론 자고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다들 혼자 떨어져 자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왜 나만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아나스타샤에게도 원망의 불똥이 튄다. 모두 그녀가 날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난 혼자서도 괜찮았었는데, 그녀가 날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변명하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자기혐오와 경멸이 뇌리를 뒤흔든다.

“…….”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이렇게 복잡하게 짜증을 낼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당장 이 밤중에 아버지나 오빠를 찾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내 마지막 이성이 그것만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로막았다.

내겐 마지막 타협안이 남아 있었다.

패배자라고 해도, 나약하다고 해도, 구차하다고 해도, 자존심도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두꺼운 구스다운으로 무장한 채 방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 내 발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움직였겠지만, 지금 난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빠르게 집 밖으로 나와서 곧장 벨카의 집으로 향했다.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추위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난 벨카의 집 앞까지 가서 조금 망설였다. 고개를 숙이고 보자 벨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벨카.”

벨카는 잠들어 있었지만 내가 작게 부르자마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이해할 수 있다.

난 벨카를 별관의 연습실에 데려가려고 한다.

예고르는 몇 번이고 내게 벨카를 집 안에 들이면 안 된다고 했었다.

밖에서 자라야 하는 벨카를 자꾸 집 안에 들이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이유였다.

한데 지금은, 나야말로 나쁜 버릇을 조심해야 할 지경이다.

일단은 오늘만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벨카. 자는데 미안해요.”

“……크응.”

벨카는 잠투정하듯 소리를 냈지만 어쨌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 위해 집에서 나와 주었다.

난 벨카가 나오자마자 일단 무작정 끌어안고 손이 닿는 대로 쓸어 주었다. 벨카는 영문도 모른 채 내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손이 스쳐 지나가는 목과 등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난 헤실거리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별관으로 가요, 벨카. 따뜻하게.”

두어 번 더 벨카의 등을 쓰다듬고 일어나 걸음을 떼자 벨카가 따라왔다. 뭐가 뭔지 상황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움직이니 따라오는 모습이었다.

나와 벨카는 함께 연습실에 들어왔다.

불을 켜자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벨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라디에이터 앞에 가더니 하품을 쩍 하고는 다시 잠들 준비를 했다.

내가 곧장 피아노 앞에 앉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쪽은 보지도 않고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

난 한참을 주저하다가, 연습실 한쪽에 있는 방석을 들고 벨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벨카의 뒤쪽에 방석을 놓고는 그 위에 앉았다. 벨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졸린 모양이다.

“벨카…….”

난 벨카의 이름을 부르며 그 복실복실한 털을 쓸어내렸다.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단지 만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안 좋았던 기분이 단번에 나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벨카를 그렇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이 안정감은 내가 다른 무슨 생각도 못 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잠시만요…….”

잘 수 있을 것 같다. 벨카는 타협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렇게라면 얼마든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벨카를 쓸어 주는 손이 점점 느려진다. 팔에 힘이 빠진다. 앉아 있는 자세도 점점 기울어졌다.

수마가 날 덮쳐 오고, 난 벨카의 위로 서서히 쓰러졌다.

“……!”

갑자기 벨카가 진저리치듯 허리를 뒤흔든다.

막 그 위에 머리를 대었던 난 파드득 떠는 느낌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막 잠들려던 정신이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벨카?”

“와웅!”

벨카가 신경질적으로,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 신경질적으로 짖었다.

“……벨카.”

나도 모르게 먹먹한 목소리가 나온다.

갑자기 배신감을 느꼈다.

벨카를 내려다보았다. 벨카는 목을 세우고 내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잠이 덜 깬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젠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벨카가 날 보는 눈빛은 어쩐지 조금 차갑다. 벨카는 분명히 표정을 가지고 감정을 표할 줄 안다.

그 감정은 지금은 한심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귀찮다는 것 같기도 하다.

잘못을 깨닫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거슬렸나요?”

“크응.”

“귀찮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벨카, 오늘만…… 오늘만 안 되나요?”

“…….”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을 했는지 뒤늦게 알았다.

벨카는 내 마음대로 껴안고 잘 수 있는 인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엄연히 살아 있는 생물이었고, 밤이 되면 자야 했다. 내가 옆에서 귀찮게 굴면 잠을 설칠 수도 있는 것이다.

갑자기 끌고 와서 옆에 기대어 잠들려는 행위는 어지간히 벨카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벨카라면 들어주리라 생각했었는데.

난 조금 더 가까이, 양손으로 벨카를 달래듯 쓸면서 말했다.

“제가 매일같이 이러진 않잖아요? 아시죠?”

“…….”

“오늘만 모른 척해 주실 수 없나요.”

벨카는 여전히 얌전히 있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벨카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순간 온몸으로 찍어 누르면 어떨까 생각했다. 벨카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목을 끌어안고, 누르면.

화를 낼까? 날 물까?

“…….”

그렇게 할 순 없었다. 벨카가 날 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벨카가 날 힘으로 밀치는 일이 없듯, 나 역시 반대로 벨카에게 그럴 순 없는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벨카가 일어나 버렸다.

그 등허리에 올려져 있던 내 손이 허무하게 툭 떨어졌다.

“벨카.”

난 주저앉은 채로 벨카를 올려다보았다. 벨카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움직이더니 날 본다.

일어나 있는 벨카에게 명령했다.

“앉아 주세요.”

“왕.”

하지만 벨카는 내 명령을 무시했다.

내 명령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벨카는 침입자를 공격하거나 부상자를 보호하고, 위험 물건을 치우는 등 고등한 훈련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런 벨카가 앉아, 손 같은 단순한 명령을 못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알아듣고도 무시한 것이다.

한 번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벨카.”

다시 벨카를 불렀으나, 이번엔 벨카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얼굴을 보는 것도 싫은 모양이다.

그대로 벨카는 연습실 문손잡이를 밑으로 내려서 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날 남겨 두고.

“왜…….”

덩그러니 남겨진 난 힘없이 중얼거렸다.

***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야.”

아나스타샤는 내 얼굴을 보고 밝게 인사했다.

난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껴안을 뻔했지만, 약간은 화가 나기도 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금 내 기분은 뭐라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난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늦으셨네요, 아나스타샤.”

“오늘은 늦잠을…… 아니, 그게 아니라…….”

막 실토하려던 것을 도로 입안에 욱여넣으려는 듯하던 아나스타샤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나도 타티아나 너처럼 아침에 연습도 하고 해야 하는데. 사람 습관이란 게 쉽게 바뀌지가 않더라고.”

“꼭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아나스타샤에겐 아나스타샤의 습관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단 말이지.”

딱 봐도 아나스타샤의 가족들이 요 며칠간 아침에 연습 좀 하라고 아나스타샤를 들들 볶은 모양이다.

막 내 옆의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은 아나스타샤가 다시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타티아나. 오늘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이네. 왜 그래?”

“…….”

이건 살짝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아나스타샤에겐 들킬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난 시치미를 뗐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지 말고. 넌 맨날 아무 일 없다고만 하잖아.”

“어차피 아나스타샤가 해결해 주실 수도 없는…….”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다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

아나스타샤가 말없이 날 쳐다보았다. 이미 내 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게 모두 드러난 터였다.

이런 말실수를 하다니, 나도 지금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벨카에게 거부당한 충격으로 아직도 끔찍한 기분이었다. 당장 오늘 밤만 하더라도 어떻게 자야 할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날 붙잡고 더욱 캐물을 수도 있었지만, 내게 물어 봐야 마땅한 대답을 얻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내가 벨카의 이야기를 할 리도 없었으니 정확하게 내 기분을 읽어 낸 것이다.

“내가 너 땜에 못 살겠어…….”

아나스타샤가 책상에 팔을 괴었다. 난 그 눈을 보면서 살짝 뿔이 났다.

나야말로 그녀 때문에 못 살 것 같았다.

“타티아나. 너 오늘 수업 끝나곤 계속 연습이지? 아예 레슨실 하나 빌려서 같이 연습 안 할래? 분명 재미있을 거야.”

“저 오늘은 선배들과 트리오 합주를 해야 해요.”

“트리오? 아…… 그런 게 있었지. 그게 오늘이야?”

“예.”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날 무리해서 컨디션은 최악에 벨카는 날 무시하고 기분은 그야말로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상황이었지만,

그건 일정을 취소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다른 날로 미루면 안 될까?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제 기분에 따라 어떻게 미루나요. 그럴 순 없어요.”

“왜 없어? 컨디션 따라 조절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런 연주자들도 많다. 몸을 써야 하는 직업 특성상 사소한 컨디션 난조가 연주에 엄청난 차이를 주기도 하니까.

잘 알지만, 난 이 정도 문제로 일방적으로 취소를 할 생각이 없었다.

“막심 선배도 니콜라이 선배도 저도 모두 다른 과고 각자 스케줄이 달라요. 곧 중간고사이기도 하고, 오늘을 놓치면 또 언제 날을 잡을 수 있을지 몰라요.”

“날이야 잡으면 되는 건데…….”

아나스타샤는 내가 답답한 것 같았다.

“어차피 미룰 생각은 없어 보이네.”

“없어요.”

“좋아. 나도 가도 되지?”

“예?”

“누구 데려갈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요?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하나요? 트리오인데.”

“너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묻자,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약간 화가 났는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합주연습실에서 할 거잖아. 그 험상궂은 선배가 둘이나 있는 곳에 너 혼자 가면 무서울 것 아냐?”

“글쎄요.”

“넌 가만 보면 정말…… 일리야가 인정할 정도면 말 다했나.”

“일리야가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니야, 그냥 그런 게 있어.”

내가 돌아간 사이 아나스타샤는 오빠인 일리야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거기엔 나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는 듯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녀가 내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어쨌든, 나도 갈게. 상관없지?”

“아나스타샤…….”

“같이 연습까지 했는데 막상 합주를 감상하지 않을 순 없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데리고 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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