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오후가 되었고, 시간에 맞춰 약속한 합주연습실로 향했다. 아나스타샤가 함께했다.
“…….”
문 앞에 서서 작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합주연습실 안에는 꽤나 곱상하게 생긴, 안경을 쓴 낯익은 선배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선배가 이쪽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타티아나 후배님.”
난 이 선배의 이름을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니콜라이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샤 후배님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샤의 이름까지 아는 이 선배는 저번 학기말 파티 때 막심 선배와 함께 있었던 첼로과 10학년 니콜라이 콘스탄티네비치 자이체프 선배다.
얼굴 생김은 그야말로 모범생처럼 생겼고 말도 사근사근하게 존댓말을 하지만 약간 4차원적인 기질도 있는 선배였다.
니콜라이 선배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후배님만 혼자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군요.”
그 말엔 아나스타샤가 삐뚜름하게 반응했다.
“문제없죠?”
“문제없죠. 전 되레 잘되었다고 보고 있는걸요?”
“잘되었다고요?”
“그래요.”
니콜라이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둘러보았다. 연습실 안의 사람은 세 명. 한 명이 모자라다.
내 눈빛을 눈치챘는지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다.
“아무튼 시간 맞춰 오셨는데 미안하게 되었어요. 막심이 아직 안 왔거든요. 시간 맞춰 오라고 신신당부를 그렇게 하더니 왜 본인이 늦는지, 웃기는 친구죠?”
“오시기만 한다면 상관없어요.”
막심 선배가 오늘 약속을 파투 낼 것 같진 않다. 난 그 정도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그쪽 의자 있어요.”
“예.”
난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가만있자니 조금 뻘쭘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다시 책을 펼쳐 들진 않고 스마트폰을 잠깐 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두 후배님들을 마냥 기다리게 하자니 미안하네요. 막심이 1분 늦을 때마다 한 대씩 때리도록 할까요?”
저 순해 보이는 인상에 웃으며 말하는 것치고는 내용이 조금 폭력적이다.
난 떨떠름하게 말했다.
“10분 늦어서 열 대나 맞으신다면 합주에 문제가 생기시겠는데요.”
“왜 열 대죠?”
1분에 한 대니까 10분이면 열 대 아닌가요?
하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내 계산을 정정해 주었다.
“서른 대가 되어야죠.”
“…….”
세 명의 시간을 각각 10분씩 뺏었으니 총 30분이라는 계산 같다.
보기보다 셈이 밝은 선배였다.
니콜라이 선배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웃차, 그러면 막심이 올 때까지 잠깐 티타임이라도 가져 볼까요?”
선배가 생수를 포트에 따르는 사이 난 그 옆에서 컵과 티백을 준비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할 일이 없자 옆에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냥 가서 쉬면 되는데. 내가 움직이니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는 모습이다.
니콜라이 선배가 찻잎을 나누는 날 향해 말했다.
“우리 학기말 파티 이후론 처음이죠?”
“예. 그렇네요.”
막심 선배는 한 번 봤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한 테이블에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던 선배인데 그간 연락처를 교환하지 못해서 인사도 한 번 못 했다는 건 미안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괜찮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 이러저런 이야기들을 꽤 들었답니다. 늦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 우승 축하해요.”
“아, 감사합니다…….”
급히 감사를 표하자 니콜라이 선배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오늘 상당히 기대하고 있어요.”
“……저도요.”
막심 선배의 친구인 니콜라이 선배가 연주하는 첼로는 아직 들어 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분명 수준급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난 오늘 정말 잘해야 했다. 몸은 조금 나른하지만, 정신을 재차 가다듬었다.
우리는 막 끓인 차를 한 잔씩 들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손안에 있는 잔이 따뜻했다.
막 차로 목을 축이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아, 타티아나. 저번 주에 자고 갔을 때 준 공예차 정말 잘 마시고 있어. 특히 아빠는 꽃이 피는 게 그렇게 신기한지 매일같이 한 잔씩 타서 들여다보고 있다니까.”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따로 구매해서 다른 곳에 선물도 할 생각이신가 보던데? 아주 제대로 꽂히셨어.”
“혹시 필요하시다면 제가 구매한 곳을 가르쳐 드릴까요?”
“어? 그러면 고맙고.”
아나스타샤는 계속해서 우리 둘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난 기왕이면 니콜라이 선배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지금 주도권은 온전히 아나스타샤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때, 니콜라이 선배가 불쑥 끼어들었다.
“여성분들은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선물을 사 가지고 가세요?”
정말 보통 아닌 선배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 분위기에 끼어들진 못할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가 약간 벙쪄서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렇게 보는 건가요?”
못 할 질문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묘한 눈으로 니콜라이 선배를 보다가 물었다.
“선배는 친구 집에 놀러 가실 때 선물 같은 것 안 하시나 봐요?”
“글쎄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니콜라이 선배는 약간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막심이 제 기숙사에 올 때 뭔가 사 들고 오는 건 본 적이 없어서요.”
“……기숙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기숙사도 10년쯤 살았으면 집 아닌가요? 전 집보다 기숙사에서 산 세월이 더 긴 것 같은데.”
10학년이라면 지금 열일곱 살이다. 1학년 때부터 기숙사에서 살았다면 니콜라이 선배는 정말 학교 기숙사가 그냥 집이나 다름없을 만했다.
생각해 보면 니콜라이 선배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친구 방에 놀러 갈 때 친구에겐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조금 생각하고 있는데 니콜라이 선배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어쨌든 두 후배님의 세계는 제가 모르는 세계인 것 같아 흥미롭네요.”
“흥미로워요……?”
“예.”
여자들의 세계가 궁금하다는 투는 아니었다.
무슨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경관에 대해 흥미로워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순수하게 호기심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특이한 선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더 들어 볼 수 있어요?”
“…….”
우리들이 뭐 하고 노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는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아나스타샤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을 하며 궁금하다고 하는 사람을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을 동시에 떠올렸고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간간이 호응하면서 우리 이야기를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아, 맞아. 그리고 요리도 하고.”
“요리도 하세요?”
“전 못하고, 타티아나가.”
그건 상당히 재미있다는 듯 니콜라이 선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곤 날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타티아나 후배님은 인터뷰에서 그랬었죠. 최근 요리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그냥 한 말이 아니로군요?”
“이 애는 거짓말 같은 것 못해요.”
단정 짓듯 말하는 통에 난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거짓말 잘하는데.”
“말만 하면 뭐 하니? 얼굴에서 다 드러나는데.”
“……으.”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우리 둘을 보고 있던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다.
“재미있네요.”
도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 둘이 온종일 피아노만 쳤다는 이야기만 하는데도 선배는 재미있다는 것 같았다. 이상한 선배다.
“낮에는 피아노 연습하고 공부도 하시고…… 밤에는 피아노를 못 칠 테니 다른 걸 하고 노시겠군요?”
“사일런트 피아노가 있어서 상관없긴 해요.”
“오, 사일런트 피아노.”
니콜라이 선배는 사일런트 피아노라는 해답에 조금 놀라워했다.
사실 나처럼 아예 따로 연습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아파트에 산다면 밤에 피아노를 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일런트 피아노를 가지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특이케이스였다.
니콜라이 선배가 재차 물었다.
“그럼 정말 하루 종일 피아노만?”
“그, 그렇진 않죠, 당연히. 파자마 파티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요?”
“……그런 게 있어요.”
“오늘 저 같은 선배가 있으면 욕도 하고 그렇겠군요?”
순간 아나스타샤의 말문이 막힌다. 난 아나스타샤가 누구랑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자주 당황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선배 정말 강적이네.
하지만 아나스타샤 역시 만만찮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당황했던 것이 무색하게 곧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 올렸다.
“뭐 그러기도 하죠.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니깐요.”
“아나스타샤!”
우리가 언제 자리에 없는 사람 뒷담화를 했다고 그래요?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아나스타샤는 선배 쪽을 향해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냥 당해 주지만은 않겠다는 것 같다.
니콜라이 선배는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알아서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죠?”
“진짜라니깐요?”
“옆에 거짓말 못 하는 친구분을 둬서 아쉽게 되었어요, 아나스타샤.”
앗.
아나스타샤의 고개가 휙 돈다.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결국 웃고 만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속이는 데엔 손발이 안 맞았다.
아나스타샤가 한층 더 뻔뻔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투다.
“어쨌든, 여자들끼린 할 이야기가 많아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까지 계속이요. 남자인 선배에게 말씀드릴 순 없네요.”
“그렇겠군요.”
니콜라이 선배는 딱히 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평이하게 대꾸하다가 문득 덧붙였다.
“부럽군요.”
“부러우셔도 안 돼요. 여자들만의 파자마 파티에 선배를 끼워 드릴 순 없잖아요.”
“아뇨, 그 이야기가 아니라.”
선배가 오해 말라는 듯 웃으며 이어 설명한다.
“남자들은 아무리 친해도 한 침대에서 자거나 하진 않아서 말이죠.”
“…….”
“반드시 한 명은 소파로 쫓겨나야 하거든요.”
난 니콜라이 선배의 이야기를 바로 알아들었다.
남자들 간의 거리감이란 상당히 명확하고 뚜렷하다.
눈에 보일 듯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고 때문에 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건 남자들의 세계였다.
난 불식간에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날 본다.
우린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안도와 믿음. 그에 비해 나는 그녀에게 약간의 얄미움을 느낀다.
그냥 거리를 두고 날 둔감한 채로 놔두었으면, 내가 이토록 욕심쟁이에 미련이 많고 집착이 심하다는 것을 굳이 다시 일깨워 주지 않았더라면.
결국 내가 바보인 탓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다.
그리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혹여나 우는소리가 나올까 스스로의 목을 옥죈다.
“…….”
그때, 복도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연습실 문이 열렸다
“와. 미안, 미안. 나 그렇게 많이 안 늦었지?”
“막심 선배님.”
진짜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헥헥거리는 것이 상당히 안쓰럽다. 하지만 늦은 건 늦은 것이다.
난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니콜라이 선배를 보았다. 선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늦으신 선배님에겐 페널티가 있어요.”
“페널티? 뭔데.”
“27대 맞으셔야 해요.”
“뭐야, 그거. 왜 그렇게 구체적이야 숫자가.”
막심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걸 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선배는 아주 익숙하게 가방 안에서 과자를 꺼내 우리들에게 돌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돌리는 솜씨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난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받고 나서야 이게 뇌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
지각에 대한 것은 그렇게 쉽게 해결해 버리고, 막심 선배가 작게 박수를 쳤다.
“모여 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피아노과의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좋아. 그럼 아나스타샤는 청중으로 있어 주면 되겠고, 타티아나.”
막심 선배가 날 보며 기운 좋게 물었다.
“준비는?”
“됐어요.”
“하하, 대답 좋네.”
내 단호한 대답을 선배는 늘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막심 선배를 올려다보자, 선배는 킥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너도 그 곡을 연습해 봤다면 알겠지만.”
바이올린을 막 내려놓으면서 막심 선배가 말했다.
“재미있을 거거든.”
선배는 오늘을 무척이나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곧바로 시작하나 했는데, 막심 선배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시작하기 전에, 일단 확실히 할 건 짚고 넘어갈까?”
저번에 라 폴리아 바이올린 소나타를 협연할 때도 그랬지만, 막심 선배는 이렇게 무언가 합주 전에 최소한의 것들을 정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합주는 오로지 친목을 목적으로 시작되어 끝나는 합주야. 그 밖의 어떤 이유도 없어. 따라서 녹화해서 과제 등으로 제출할 생각이 있는 사람은 미리 말해.”
선배가 말하는 것은 꽤 중요한 것이었다.
난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가끔은 이런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리 동의를 받지 않고 과제로 올려 버리는 등, 급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전에 합의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했다간 추후에 싸움이 나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난 고개를 저었고, 막심 선배가 말했다.
“없겠지. 좋아. 그럼 깔끔하게 시작해 보자. 준비들 해.”
니콜라이 선배가 벽에 세워져 있던 첼로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내 들고, 막심 선배도 바이올린을 들었다.
난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새로 보는 친구와 악수를 하듯, 오른손으로 건반을 오르내려 본다. 스케일로 올라갔다가, 아르페지오로 내려온다.
그것만으로도 단번에 이 피아노에 대해 이해한다. 만족스러웠다. 꽤 괜찮은 친구다.
피아노 연주자는 각자 자기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한다.
분해해서 비행기에 실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학생이 그럴 순 없는 일이다. 빠르게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건반을 꾹꾹 눌러 보는 사이, 막심 선배가 말했다.
“조율 좀 맞출까? 아마 거의 맞을 거라 생각하는데.”
“예.”
난 라 음을 몇 번 눌렀고, 막심 선배는 지판을 잡고 활을 켰다. 쩌렁쩌렁한 바이올린 소리가 치솟는다. 다시 들어도 어마어마한 소리다.
그리고…….
“……!”
보다 낮은, 뱃고동처럼 깔리는 소리가 있었다.
난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이 선배가 의자에 앉은 채로 첼로를 켜고 있었다.
첼로 특유의 웅장하고 가슴 언저리를 뒤흔드는 소리가 바이올린 소리와 얽혀 풍부하게 울렸다. 기가 막혔다.
“…….”
갑자기 조금 노곤했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 소리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내 손가락은 건반을 몇 번이고 다시 누르며 해머를 움직인다.
내 몸은 소리에 반응하여 자동적으로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익혀 두었던 악보를 다시 떠올린다. 수초 만에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스쳐 지나간다.
“타티아나. 우리는 이 곡을 꽤 오래전부터 연주했었기 때문에 괜찮지만, 넌?”
“예?”
“악보는?”
빨리 시작하지 않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람, 이 선배는.
“다 외웠으니, 시작해도 좋아요.”
“하!”
막심 선배가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는,
일순 표정을 바꾸어 눈빛을 달리했다. 턱으로 바이올린을 고정시키며 고개를 내리니 더더욱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