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아나스타샤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낮게 가라앉은 눈은 피곤과 우울을 담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더욱 깊다.
아침에 괜히 그 점에 대해 물었다가, 타티아나가 갑작스레 날을 세우며 되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는 상처받기 충분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확신했다.
지금 타티아나가 드러내는 태도는 언제나 그렇듯, 바로 자기 스스로를 경계하는 태도였다.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타티아나는 매사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편이었고 스스로를 잘 믿지 않는 듯한 말을 자주 했다.
가끔은 충동적으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티아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성격과 표현법을 파악하고 있었고,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설전을 벌이는 것은 타티아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저 단순히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쉽게 물러지곤 했다.
결국 천성은 독하고 모질지 못한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잘 알았고, 합주에도 무작정 따라오겠다고 밀어붙여서 결국 이 자리에 섰다.
“…….”
그리고 지금 아나스타샤는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딱 한 분야, 타티아나가 자존심과 긍지로 똘똘 뭉쳐 있는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건반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톡톡 때리고 있었다.
무언가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건반을 때리고 있을 뿐인데도 허리에서 목까지 꼿꼿하게 세운 그 자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경건함마저 느끼며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평소 느껴지는 조금 무기력하고 힘없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혼자일 땐 자신과 싸우고, 상대가 있을 땐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무자비하게 맞부딪혀 짓밟아 버리는 강인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타티아나의 옆에 있는 선배 두 명 역시 만만찮은 사람들이다.
합주를 위해 조율을 하면서 현을 켜 보이고 컨디션을 체크하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중앙음악학교 바이올린과, 첼로과 내에서도 저 선배들 같은 실력을 갖춘 학생은 드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대되었다.
선배고, 남자고, 두 명이기까지 하다. 조건만 보자면 어딜 봐도 타티아나에게 극도로 불리해 보인다.
하지만 피아노라는 육중한 무기를 쥔 타티아나는 상대가 설령 남자 선배 둘이라도 찍어 눌러 버릴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믿었다.
“해 보자.”
바이올린과 10학년의 막심이 말했고, 세 명의 시선이 교차한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삼켰고, 타티아나가 먼저 피아노 건반을 짚었다.
“……!”
러시아의 대음악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유일무이한 피아노 트리오 곡.
피아노 트리오 가단조. op.50.
부제는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
분산화음으로 이루어지는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고, 곧바로 첼로와 바이올린이 따라붙는다.
세 사람의 손으로부터 펼쳐지는 소리들이 얽히면서 만들어 내는 음악을 듣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리허설 한 번 없이 이루어지는 합주인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되는 피아노 트리오는 일반적인 실내악 구성과 달리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양식이 자리 잡은 구성이었다.
상당히 독립적인 건반악기인 피아노가 함께하는 피아노 트리오에선 현악 사중주, 즉 콰르텟과 같은 완벽한 조화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콰르텟에서 세컨드 바이올린의 존재감이 상당히 옅어지는 것과 달리 피아노 트리오는 각 악기들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2인 소나타처럼 피아노가 일방적으로 반주를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악기도 철저하게 반주를 담당하지 않는다.
때로 바이올린도 반주를 맡고, 첼로도 메인으로 나선다.
세 악기가 각자의 개성과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끊임없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듯한 구성이다.
피아노 트리오는 말 세 마리가 한 마차를 이끄는 트로이카보단 어느 하나 균형을 잃지 않는 삼각대와 같았다.
어느 한 방향으로 음악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 세 명이 동등하게 높게 음악을 쌓아 나간다.
각 연주자가 자신의 비르투오시티를 뽐내기에 최고의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초반부터 힘을 쓸 생각은 없다는 듯 일단 반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특유의 견고하고 빈틈없는 화성을 꾸미는 재주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음색으로 쏟아져 나오는 반주 위에는 그 어떤 소리를 어떤 방법으로 얹더라도 음악이 될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는 소리들은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을 든 막심은 눈을 감고 활을 움직였다. 바이올린의 높고 청명한 소리가 가슴에 스며들며 전신을 뒤흔든다.
니콜라이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첼로를 켰다.
뚜렷한 주제를 담은 선율이 첼로가 아닌 먼 곳에서 울려오는 듯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19세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작곡가의 페이소스를 그려 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1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끌어와 이 연습실에 재현했다.
“…….”
이 트리오의 실력은 일반적인 10대 학생들의 트리오라기엔 상식의 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첼로를 켜는 니콜라이의 어깨가 약간 굽는다. 활을 잡은 손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중후했던 음색이 갑자기 날카롭게 연마되어 심장을 찌른다.
심금을 울리는 소리에 질세라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따라붙는다.
1악장에 붙은 제목인 ‘pezzo elegiaco’. 즉 애도의 악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더욱 애달프면서도 호소력 짙은 소리가 어우러진다.
이 피아노 트리오 가단조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원장이자 차이코프스키의 선배였던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루빈슈타인를 기리기 위해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곡이었다.
부제인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에서 위대한 예술가란 바로 루빈슈타인을 가리킨다.
엘레지, 위대한 음악가를 애도하기 위한 차이코프스키의 침통한 묵상의 시가 계속된다.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을 애도하는 곡이므로 피아노에게 무게가 실린다.
그 순간이 왔다.
“…….”
아나스타샤는 목을 긴장시켰다. 바이올린이 주제를 반복하여 마치고, 곧 피아노가 주제를 발전시키며 크게 존재감을 드러낼 시점이었다.
그 순간 아나스타샤가 기대한 것은 타티아나의 압도적인 실력, 이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밸런스를 통째로 무너뜨려 버릴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지금 이 트리오를 망치지 않기 위해선 그래선 안 되겠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라면 해낼 수 있고, 그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도권이 피아노 쪽으로 넘어가려는 기색은 트리오 내에서도 드러났다.
막심과 니콜라이 두 사람은 엄청난 실력자였고, 실력자이니만큼 주제가 첫 클라이막스로 치닫자 정확하게 피아노의 타티아나를 돋보이게 하려 했다.
“……!”
하지만 모두가 준비해 주는 자리에 타티아나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섬세하게 질문을 하고 나아간다.
주위를 살핀다.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음악성이 깨어지지 않도록 보듬는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당황한다. 대체 무슨 눈치를 보는 것이냐며 가열차게 꾸밈음을 쏟아 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흔들리는 일 없이, 단아한 어투로 음악을 계속해 나간다.
“…….”
아나스타샤는 입을 벌렸다.
음악적으로는 옳다. 만약 선생님들이 방금 그 피아노 파트를 처리하는 것을 들었다면 감탄하며 박수를 쳤을 것이다.
분명 이 트리오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해선 방금 피아노가 지나치게 감정과잉으로 앞서 나가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웅장하지만 침잠하는 것이 옳다.
음색을 다루는 데에 능한 타티아나는 노련하게 그것을 해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여기엔 심사위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자리는 옆에 있는 두 명의 선배와 승부를 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피아노에게 포커스가 돌아갈 기회가 오자 선배들이 아량을 보여 마음대로 날뛰어 보라는 듯 비켜 주었는데도 그것을 그냥 넘어간 것은 자존심 강한 타티아나답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막심을 보았다. 막심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황할 틈 없이 음악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첫 주제를 마무리 짓고 곡은 이조되어 마장조로 넘어갔다.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본인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장조로 넘어간 곡은 더 아름답고 세련되게 변했다.
타티아나는 크고 푹신하게 화성을 깔았다. 아무리 복잡한 도약과 아르페지오도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편안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이끄는 프레이징은 부드러웠다. 자유롭게 길을 열어 주는 피아노 소리를 딛고 바이올린과 첼로는 더욱 힘을 얻어 뻗어 나갔다.
곧 곡은 가장조로 다시 변화한다.
비통한 마음으로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는 듯한 음색으로 타티아나가 곡을 이끌어 나갔다.
차이코프스키가 동료이자 선배 그리고 스승이기도 했던 루빈슈타인을 잃고 어떤 심정이었을지 단지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막심의 바이올린 소리가 피아노 소리에 맞춰 높게 치솟는다.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바이올린에게 철저하게 반주를 맞춰 주었다.
바닥에 깔리는 것이 아닌,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합을 맞춰 간다. 보다 처절하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전달되어 온다.
꾸며 낸 기색 없이 순수하다. 순수하기 때문에 더더욱 강렬하다. 인간의 말과 달리 피아노 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여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듣는 사람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같이 연주한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심은 눈을 감고 이마를 찡그리며 연주에 빠져들었다. 니콜라이는 새삼 감탄했다는 눈빛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타티아나가 진지하게 연주에 임하는 것은 좋았다.
협연에 약한 모습이 많다고 스스로도 그랬으니, 이렇게 합주를 하면서 경험도 쌓고 다른 사람과 연주를 맞추는 것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감미로운 피아노가 속삭이며 낮게 노래한다. 귓가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 애절하고 교태스럽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아련하고 교태 어린 음색에서 상실감뿐이 아닌 절절한 외로움을 느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루빈슈타인의 죽음은 단순한 동료 음악가의 죽음 그 이상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 내어, 피아노로 표현해 내는 듯한 타티아나의 실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지금 그 소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에 아나스타샤는 짜증을 느꼈다.
누구든, 지금 저 애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끌어안고 싶어질 것이다.
약간의 독점욕.
저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냐는 투정과, 동시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타티아나를 보고 이따위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경멸.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주제도 세 트리오는 리허설도 한 번 없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이루어 나갔고, 마지막 코다인 돌체 에스프레스dolce espress는 바이올린에게 넘겨주었다.
바이올린을 쥔 막심은 이 모든 연주에 경의를 표하며 조용하고 아름답게 끝맺는다.
“…….”
그렇게 1악장이 끝났다.
세 사람은 호흡까지 일치해 있었는지 동시에 숨을 내뱉고는 서로를 바라본다.
놀라워하는 니콜라이와 달리 막심의 눈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타티아나의 눈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타티아나는 말없이 두 선배를 본다.
그녀는 방금 했던 연주에 대해 그 어떤 감상도 보이지 않았다. 해냈다라는 기쁨도, 망쳤다라는 불만도 없다.
그저 곡에서 이어진 감정의 여운이 끝나지 않았는지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지금 피아노를 치고 있어?
넌 거짓말을 못하지만 피아노로는 더더욱 못하지. 지금 넌 피아노로 여기 있는 세 사람을 모조리 휘어잡았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에겐 입을 열 권리가 없었다.
침묵한 채로 세 사람을 순서대로 돌아본 타티아나는 곧 다시 피아노로 눈을 돌리고는 어떠한 신호도 없이 2악장을 시작했다.
피아노 홀로 시작되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테마가 연습실에 울린다. 막심은 바이올린을 내린 채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