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돌아가고 합주 연습실엔 막심과 니콜라이만이 남았다.
아나스타샤는 돌아가는 마지막까지 두 선배를 쏘아보고 나갔다.
그 눈빛이 살벌하기 짝이 없어 막심은 자신이 뭘 잘못 했는지 다시 되짚었다.
“…….”
그냥 좋은 합주였다고 박수 치고 밥이나 먹으러 갈 걸 그랬다.
적당히 웃어넘겼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딴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빌어먹을 고집이라는 것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아서, 도저히 타티아나에게 정말 멋졌다고 웃으며 칭찬할 수가 없었다.
“사고 쳤네.”
의자에 앉아 있던 니콜라이가 중얼거렸다. 막심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나도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이번엔 정말 사람 잘못 건드렸을지도 몰라. 저 애는 보통 애가 아니라고.”
“그것도 알아. 입 다물어.”
협연자와 얼굴 붉힌 일이 이번 한 번 뿐은 아니었다.
막심은 상당히 자존심 세고 공격적인 연주자였고, 합주의 피드백을 위해 협연자에게 어떤 막말을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의 배짱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베르체노프의 하나뿐인 영애. 같은 학교의 학생이라는 관계가 아니라면 말도 못 걸어 볼 정도로 현격히 멀리 있는 아가씨다.
편하게 타티아나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타티아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주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그런 애한테 무슨 말을 했더라.
막심은 머리를 싸맸다.
니콜라이가 무표정하게 막심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이번엔 사람 잘못 본 것 아닐까? 타티아나는 그저…… 같이 연주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아니라니까?”
“확실해?”
“…….”
막심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리 말해 봐야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결론적으로 봐. 거의 울릴 뻔했잖아.”
“돌겠네…….”
막심은 다시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타티아나가 그런 피아니스트인가?
하지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막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저 애랑 맞춰 본 적 없었지? 난 있어.”
“라 폴리아 소나타?”
“그래. 내가 잘못 들었을 리가 없어.”
너무 단호한 말에 니콜라이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음악가들이란 가끔 대화 보다 자신의 귀와 느낌을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다.
하지만 막심은 자신이 느낀 타티아나에 대한 인상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주먹으로 날 후려치는 줄 알았어. 선배고 뭐고 웃기지 말라는 듯 들이받더라니까?”
심지어 즉석에서 곡을 뜯어고쳐서까지 바이올린을 집어삼키려 했다.
막심은 여태껏 이 학교에 다니면서 수많은 연주자들을 보면서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그리고 미칠 듯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애는 진짜 흔하지 않아.”
원래 독립성이 강한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타티아나는 유독 특별했다.
막심이 바닥을 톡톡 차며 말했다.
“내 예상대로였다면 오늘 저 애는 우리를 오케스트라처럼 부리면서 쥐락펴락했어야 해. 트리오가 아니라 거의 저 애의 협주곡이 되어야 했다고.”
세 사람이 균형을 맞추어 곡을 이루어 나가지만, 타티아나가 작정하고 주인공이 되려 한다면 막심과 니콜라이는 뒤로 물러나 줄 의향도, 실력도 충분했다.
“그런 것도 조금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어디서 꼬였지.”
“기회는 꽤 많이 줬었는데. 그렇게 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던데.”
니콜라이 역시 정확하게 그 부분을 느꼈다.
막심과 니콜라이는 몇 번이고 타티아나에게 기회를 줬다. 그녀가 철저하게 거부했을 뿐.
막심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싸움을 걸면 받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건가? 막심은 이제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니콜라이는 우울해하는 막심을 보며 말했다.
“저번 주에 네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절대 상냥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
상냥한 선배의 탈을 써 봐야 경멸만 살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 험하게 대했다.
“네가 너무 뭐라고 했었던 것 아니야? 타티아나가 마음을 고쳐먹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대함으로써 타티아나의 무언가를 고치고자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안 했어. 하긴커녕 절대 고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달라고 했어.”
“성격 나쁜 피아니스트라는 게 그거?”
“그래.”
“그런 말을 여자애한테 하면 어떻게 해?”
“자기도 인정했었다니까?”
막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너무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해선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후회가 든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어쨌든 그때 이후로 네가 무서웠던 게 아닐까?”
“……뭐? 네가 악보를 받아 가는 걔 표정을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가 본데…….”
“차마 싫다고 못 했을 수도 있지.”
“…….”
학기말 파티 때 만난 게 전부고 그것도 끝은 별로 좋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합주를 하자고 제안한다면, 겉으로는 씩씩하고 강한 척 받아들였지만 사실 속으론 굉장히 싫었을 수도 있었다.
막심은 갑자기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난 끝이야.”
“그래 넌 끝났지. 그런데 난 솔직히 타티아나와 계속 같이하고 싶어.”
“……진짜 마음에 들어 하네.”
“응.”
친구인 막심이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든 말든 니콜라이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니콜라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아 주고 싶더라고.”
“미친놈.”
기가 막혀 욕이 나왔다. 이 자식은 제정신이 아니다.
막심은 저도 모르게 옆에 누가 있지 않은지 주위를 살폈다. 누가 들었다면 큰일이 나도 한참 날 소리다.
“오늘 그 피아노 소리를 듣고도 왜 일어나 싸우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네가 더 미친놈이지.”
“…….”
하지만 니콜라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 안경 너머의 니콜라이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막심과 달리 니콜라이는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를 오늘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가 느낀 인상은 막심이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막심 넌 너무 사람을 극단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싸움꾼이든가 아니면 겁쟁이든가. 아니야. 막심.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
“타고난 싸움꾼이라도 늘 그렇게 살 순 없어. 가끔은 온기를 원하기도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막심 역시 귀가 좋은 편이고, 타티아나가 그간 보였던 태도를 본다면 일주일 전만 해도 둘 사이엔 분명 통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전만 기억하는 막심은 오늘의 타티아나가 일견 답답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한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니콜라이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그 애한테 필요했던 건 너같이 윽박지르는 선배가 아니었을 거야. 옆에 아나스타샤 후배만 없었으면 내가 허그 정도는 해 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분명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운 것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아쉽네.”
“…….”
사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음악가로서 하는 말인지 헷갈린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자리에서 타티아나를 안아 준다는 발상 따위를 떠올릴 수 없었다.
막심은 의외로 니콜라이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을 떠올렸다.
막심이 말했다.
“해 버리지 그랬어. 뺨 맞고 그따위 변명 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보통은 안 맞더라고.”
대체 이런 자식이 왜 인기가 있는 거지? 역시 얼굴인가? 막심이 인상을 썼다.
***
복도를 걷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
다 들켰다.
이전에 같이 합주를 했던 막심 선배는 물론이고, 니콜라이 선배는 훨씬 더 예리하게 날 꿰뚫어 보았다.
두 선배가 보이던 안쓰러운 눈빛. 그 눈빛은 내 자존감을 난도질했다.
“…….”
오늘 선배들과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난 그 위에 올랐고 심지어 막심 선배가 내게서 무언가 바란다는 것도 또렷하게 느꼈다.
선배의 바이올린은 마치 말로 하는 것처럼, 내 뇌리에 직접적으로 쳐들어왔다.
막심 선배의 싸움을 받아 주지 않는 것은 굉장한 실례라는 것까지 이해했다.
알면서도 손이, 피아노가 말을 듣지 않았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이끌리면서 느꼈던 것들은 단지, 리허설도 없이 처음 이루어지는 이 합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어떻게 해서든 잘 보이고 싶다는 심정,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거부당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
그러한 내 약한 부분들은 피아노를 통해 여과 없이 그대로 다 드러나 버렸다.
어쩌면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
구두가 복도를 차는 내 발소리가 거슬린다. 난 자리에 멈춰 섰다.
우울했다. 머리를 드니 창밖으로 막 해가 저물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끔찍했다.
근 1년 사이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죽고 싶었다.
건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내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당혹스러워하던 막심 선배의 눈빛을 떠올리니 더더욱 기분이 암울해진다.
선배는 분명 날 동료 음악가로 보아 주었는데. 오늘로 모든 평가가 바뀌었을 것이다.
지금 이런 생각 자체도 한심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남들에게 미움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대체 언제부터?
“타티아나. 괜찮아?”
“아나스타샤…….”
내가 멈춰 서자 내 뒤를 따라오던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난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너.”
그러더니 교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대로 내 얼굴로 손수건을 가져온다.
난 반걸음 물러서며 거부했다.
“……괜찮아요.”
“아니…….”
“하지 말아요.”
차갑게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주저하며 손을 슬며시 거둔다.
조금 상처 입은 듯한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보니 목이 메인다.
하지만 저 손이 내 얼굴에 닿기라도 한다면 지금 간신히 남아 있는 이성마저도 깨어질 것 같다.
그녀를 붙잡고 오열할지, 아니면 분노로 화를 낼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닥쳐 봐야 알 것 같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라도 내가 아나스타샤에게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
난 스스로 손수건을 꺼내 내 눈가를 닦았다. 아나스타샤가 빤히 바라보고 있어 창피했지만 그냥 있는 것보단 나았다.
잠시 후, 내가 진정되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 선배들 내가 반쯤 죽여 놓고 올까?”
“……절대 그러지 마세요.”
적반하장도 그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모두 제 문제니까요.”
“맨날 자기 문제래.”
아나스타샤가 성을 냈다.
“난 이해가 안 가. 대체 네 문제라는 게 뭐야? 일주일 만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를 거의 마스터해서 리허설 한 번 없이 합주한 거? 그 선배들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데?”
그렇게 듣다 보면 할 말이 없다. 아나스타샤는 나와 막심 선배 사이에 있었던 동질감을 모른다.
내가 말했다.
“……트리오에서 제 역할은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요. 선배들이 맞아요.”
“청중인 내가 듣기엔 안 그랬어. 선배들이 틀렸어.”
“…….”
청중이었던 아나스타샤가 날 긍정해 준다. 연주자로서 뛰어났다고, 좋은 음악이었다고 말해 주고 있다.
미하일 선생님은 말했다. 협연자를 둘러볼 수 있게 됨으로써 난 연주자로서 한 발자국 더 내디딘 것일지도 모른다고.
좋은 연주자가 갖춰야 할 또 한 가지 덕목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내가 스스로 의식하에 피아노를 제어해서 그리할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난 수족이나 다름없는 피아노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잘라 말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울적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심장이 아프다.
지금이라도 다 내팽개치고 오늘도 가서 자면 안 되냐고 묻고 싶다. 내가 기댄다면 아나스타샤가 거절할 것 같진 않다.
“…….”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난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었다. 나약해지고 싶지 않다.
난 이미 충분히 글러먹었지만, 여기에서 더 약해지고 싶진 않았다.
“……타티아나, 너…….”
아나스타샤가 잠시 날 내려다보다가 입을 여는 그때였다.
“뭐야,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여기서 뭐 해.”
옆으로 꺾어진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면서 우리 둘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가 가방을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막 늦추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빨리했다.
“음, 난 갈게.”
“에르네스트. 거기 안 서?”
“뭔데…… 난 상관없잖아.”
아나스타샤가 붙잡자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난처해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너 지금 이상한 오해 하고 있지.”
“무슨 이상한 오해?”
에르네스트는 말은 뻔뻔하게 내뱉었지만 눈을 피하며 옆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여자애들끼리 뭐 싸울 수도 있고 그렇지…… 난 상관 안 하는…….”
“싸운 거 아니거든? 내가 미쳤어? 타티아나랑 싸우게?”
“아니야?”
그제야 그가 의아한 눈초리로 다시 우리 쪽을 본다. 난 뒤늦게 들고 있던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에르네스트가 정확하게 내 쪽을 보며 물었다.
“근데 왜 그래?”
“그게 말이지…….”
아나스타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막 설명을 하려 했다.
내가 가로막았다.
“아나스타샤.”
“?”
내가 방금 어떤 꼴불견을 보였는지 말할 수도 있겠지. 아니, 아나스타샤는 내 편이니까 무조건적으로 선배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날 위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난 그런 끔찍한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상관없잖아요.”
“뭐?”
“그렇죠? 에르네스트.”
난 차분한 목소리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냥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우린 분명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에 신경 쓸 이유는…….
“아니.”
에르네스트는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절망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