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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73화 (173/1,277)

##  173화

지금 에르네스트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삐딱하게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타티아나.”

“…….”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딱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내 입은 다른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닌 정도는 어느 정도이신데요.”

내가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시비조의 매몰찬 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네가 왜 울었는지 물어보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화를 낼 수 있는 정도.”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물어볼 거란 소리야.”

일부러 차갑게 대하려 했는데, 불과 몇 초도 버티지 못했다. 낯이 다 뜨거워질 정도로 직설적인 어투였다.

난 부정도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런 날 기다리지 않고 에르네스트가 몰아쳤다.

“무슨 일이야?”

“…….”

“대답 안 하면 화낼 건데.”

뭐라도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서없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을 되는대로 주워섬기기 직전이었다.

“네가 왜 화를 내?”

아나스타샤가 별 이상한 소릴 듣겠다는 듯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번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 그럼 아나스타샤. 네가 말 해 봐. 네가 날 불러 세웠잖아.”

“그건 그냥 네가 오해할까 봐 그랬지. 내가 타티아나와 싸웠다고 생각했을까 봐.”

“그럼 오해를 제대로 풀어 줘.”

“…….”

아나스타샤가 슬쩍 날 보더니 침묵했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듯 했다.

조금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오해랄 것도 없어요.”

에르네스트가 날 다시 본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됐어요, 에르네스트.”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전 정말로…….”

말을 하다 말고 목소리가 안 나왔다.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그 단어가 목 안 어딘가에 걸린 듯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단단한 벽 같은 곳에 이마를 찧고 싶었다.

그냥 말하면 된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괜찮다고. 적당히 다시 선을 긋고 기분 나쁘지 않게 처신하면 된다. 언제나처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쉬운 일이, 지금은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순수한 걱정이 깃든 눈빛을 한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성의 있게 대답을 해 줘야 했다.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합주가 그렇게나 엉망이었어?”

“!”

에르네스트가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갑자기 합주 이야기를 꺼냈다. 난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기겁하자 에르네스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혹여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네.”

“그…… 합주라는 건 어떻게?”

“피아노 연습실도 하나 없는 2층에 피아노과 애들이 돌아다닐 이유가 뭐 있겠어?”

“……아.”

바보 같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했는지 에르네스트가 알아맞힌 것은 추리라고 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 반응에서 확신을 얻은 에르네스트는 여태껏 상냥했던 눈빛을 달리하며 물었다.

“누구랑 한 거야? 궁금하네…….”

목소리는 그대로였고, 태도 또한 바뀜이 없었지만 그 눈에선 강렬한 압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장 오늘 2층 합주연습실 이용자 리스트를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겐 할 필요 없겠지?”

그가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그러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

“…….”

이전 같았으면 내 의사 같은 건 묻지도 않고 바로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의 이름을 찾아내러 갔을 것이다.

지금 역시 그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참았다.

내가 싫어할까 봐.

“타티아나 그냥 잊어버려.”

대신 에르네스트는 조금 허탈한 투로 말했다.

“원래 합주하겠다고 맞춰 보면 별 이상한 놈들도 많고 아주 엉망이야 엉망. 그런데 그게 별거야? 당연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에르네스트가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제대로 했는데 다른 협연자들이 엉망으로 곡을 망쳐 놓아서 내가 속이 상했다고 멋대로 오해하고 있다.

난 모든 것을 드러낼 순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말해야 했다.

“그게 아니에요.”

오늘 실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군지는 분명했다.

“오늘은 저 자신에게 너무 실망했을 뿐이에요.”

“뭐라고?”

“무슨 소리야? 타티아나.”

오늘은 막심 선배나 니콜라이 선배는 물론이고, 나 스스로조차 나에게 실망했다.

난 낮게 뇌까렸다.

“전 오늘 제 피아노를 하나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기분에 따라 휘둘렸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죠.“

그리고 그걸 모조리 들키기까지 했다.

“최악이에요.”

난 내가 이렇게 피아노에 다 드러날 정도로 조절을 못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입으로 할 수 없는 말들은 내 몸 안을 맴돌고 맴돌다가 결국 손가락을 통해 피아노로 나왔고, 심지어 연주하는 동안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자각도 없었다.

막심 선배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 같긴 하지만, 내 머리는 겁을 집어먹었고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만을 피아노를 통해 너절하게 흩뿌렸다.

“당분간…… 혼자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상태에서 누군가와 협연을 할 엄두가 안 났다. 또다시 무의식중에 감정들을 피아노로 드러내 버리고 만다면 변명조차 불가능하다.

잠자코 내 말을 듣던 에르네스트가 툭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서 피아노가 잘 안 되는 거야 아니면 피아노가 잘 안 되어서 기분이 나쁜 거야?”

“……전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럼 기분을 풀면 되잖아?”

에르네스트의 말은 시원하고 간단명료했다.

그가 킥킥거리며 옆을 손짓했다.

“피아노가 안 되어서 기분이 나쁘고 슬럼프에 빠진 거라면 바로 여기, 작년 재작년 슬럼프 그 자체였던 아나스타샤가 있으니까 얘한테 물어보면 되겠고…….”

“에르네스트. 죽고 싶어?”

“맞잖아? 어쨌든, 그게 아니라 반대라면…… 간단한 일이지.”

가볍게 정리한 에르네스트가 양손을 펼쳤다.

“자, 타티아나. 뭘 하고 싶어?”

에르네스트가 묻고, 아나스타샤도 날 돌아본다.

순간 눈물이 다시 흐를 뻔했다.

나에겐 너무 과분한 아이들이다.

“…….”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말만 하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내가 연습실에서 도무지 나가지 않고 피아노와 싸우고 있을 때, 그녀는 날 끌고 밖으로 나가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다.

그는 진짜 천재성이 무엇인지 시시때때로 보여 주는 진짜 천재였고, 친구였으며 동시에 동료 음악가였다.

그냥 이 애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달콤한 디저트라도 실컷 먹고 신나게 노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

자꾸만, 원하는 것이 늘어난다.

아나스타샤는 용감하고 도전적이다. 내가 주저하고 있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그녀는 날 다시 껴안아 줄 것 같다.

난 그녀에게 단 한 번 안기는 것으로 그간 몰랐던 것들을 원하게 되어 버렸다.

그 책임을 아나스타샤에게 끝까지 지우는 것은, 사실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날 정말 친구로 여겨 주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벽을 허물어뜨리는 순간 우리 관계는 깊어지자면 얼마든지 더 깊어질 수도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충분히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아무도 모를 극히 사소한 문제가 아직 날 머뭇거리게 만들지만 무시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지나가는 투로 던졌던 말이 떠오른다. 누구라도 골라잡으면 되잖아. 그녀의 말이 옳았다.

세상 그 누구라도 지금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을 바꿔 보면 그 누구라도 가능해진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될 것 같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자꾸만 앞선다.

“…….”

난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보다가 결국 말했다.

“안 돼요.”

다행히 아직 내겐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안 된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죄책감도, 에르네스트에게 거부감도 느끼고 싶지 않다. 난 아직도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다.

성급하게 이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

“대답이 이상한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기분 같은 것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 제가 어떻든…… 피아노로 해결해야 해요.”

결국 가장 문제는 피아노다.

다른 모든 것들을 차치하고 지금 내게 가장 자존심 상하고 처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피아노에 있었다.

그것만 해결한다면 다른 무엇이든 감당할 만했다.

마지막 희망이던 벨카가 날 거부했고 이제 내게 남은 타협안은 없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날 비웃었다.

그렇다. 비웃었다.

“참 이상적인 말이긴 한데, 현실을 봐. 해결이 돼?”

“…….”

“넌 가끔 보면 정말 바보 같은 말을 해. 타티아나. 그날 기분 따라 컨디션 따라 연주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 물론 되도록 편차가 적어야겠지만.”

막 반론하려다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걸까요.”

“그래. 당연하지.”

“그건 타협이에요.”

내가 말하면서도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비웃지 않았다. 타협하라고 부추기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아니면 다시 연습실이라도 갈래?”

“기분 풀러 가자는 거 아니었어?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대꾸했다.

“연습실에서 풀면 되잖아. 타티아나는 어차피 피아노를 제일 좋아하고.”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제안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가서 놀자고. 즉흥곡도 치고, 쇼팽 에튀드 속주 대결도 하고…… 듀엣도 해 보고.”

난 에르네스트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느꼈다.

“싫어?”

“…….”

싫진 않았다. 에르네스트 같은 연주자와 함께 연습을 할 기회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에르네스트는 상당히 귀가 좋았고, 내 의도를 굉장히 빠르게 파악했다.

말보다 피아노로 할 때 훨씬 더. 난 그와 대화를 하는 것보다 피아노 소리를 건네는 것을 훨씬 좋아했고, 우린 잘 통하는 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린 몇 번이고 듀엣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친구들의 옆에 앉아 건반을 누를 자신이 없다.

“다음에…… 다음에 하는 게 좋겠어요.”

건반을 전혀 컨트롤하지 못하는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혹은 아나스타샤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아양이라도 떠는 소리를 들려줬다간 발뺌 정도로는 수습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와 함께 디저트 뷔페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조금 꺼려 하면서도 기꺼이 함께해 주었다.

“…….”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다 떨어졌다.

곧 밤이 찾아오면 어마어마한 반작용이 날 후려칠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 한구석이 지끈거린다.

무시했다.

아나스타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온기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날 괴롭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무뎌지고, 언젠가는 별것 아니게 되겠지. 그게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난 그렇게 믿었다.

방으로 돌아간 난 곧바로 가방을 놓고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별관의 연습실로 향했다.

피아노를 쳐야 했다.

학교에서 선배들 앞에서 보였던 그 추태, 절대 있어선 안 된다. 다른 누구와 언제 합주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 전에 난 내 마음을 더더욱 숨기고 자물쇠를 채워 저편에 격리시켜 놔야 했다.

내 마음의 선율이 손가락을 타고 건반에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방법은 연습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기교와 해석을 가다듬는다.

수백 년 전 음악가들이 틀을 만들고 이루어 놓은 대작들은 나처럼 구질구질한 감정이 아닌, 훨씬 아름답게 정제되어 있는 감정들을 음악으로 표현해 놓았다.

연습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해서 연습했다.

바흐,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 슈만, 스크리아빈, 다시 라흐마니노프, 베토벤.

머리에 떠오르는 악보들을 철저하게 피아노로 옮겼다. 흐르는 선율이 날 다시 일으켜 세운다.

나약했던 마음은 대가들의 음악과 그 거대한 주제 앞에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난 끊임없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예고르가 문을 두드렸다. 식사를 하라는 말이었다.

난 정말 드물게, 예고르에게 부탁해 식사를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예고르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순순히 알겠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난 그저 연습하고 싶은 곡이 많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말씀이 그리 많지 않으셨다. 가만히 날 지켜보시더니, 알겠다며 식사를 두고 나가셨다.

카샤를 두어 스푼. 1분도 채 안 걸려 식사를 하고,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베토벤의 소나타는 인간의 의지를 시험케 한다. 귀가 안 들려도 음악을 했던 베토벤이다.

내 문제 따위는 정말 사소하게 느껴진다. 난 감사를 느끼며 베토벤을 연주한다.

나제즈다가 찾아왔다.

그녀는 내게 이만 자야 할 시간이라고 알려 주었다.

난 조금만 더 연습하다가 자겠다고 말했고, 나제즈다는 날 믿지 않는 듯한 눈초리였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연습에 집중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난 달빛이 들이치는 연습실에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는 피아노 의자 위에 고개를 묻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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