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74화 (174/1,277)

##  174화

낮게 가라앉은 선율이 조용히 흐른다.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면, 노랫소리가 다가와 내 근처를 빙빙 돈다.

어떤 곡인지 곧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단지 고독과 우울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누구지. 베토벤? 전혀 아니다. 그럼 쇼팽? 잘 모르겠다. 라흐마니노프?

1차 러시아 혁명을 피해 독일 드레스덴으로 떠났을 때 라흐마니노프는 첫 번째 소나타인 파우스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과 맞먹을 정도로 명곡으로 이름이 높은 교향곡 2번과 교향시 죽음의 섬 또한 그 시기에 작곡된 곡이었다.

그렇게 독일에서 작곡된 곡들에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음울함이 이 선율과 비슷했던 것 같다.

난 다시 집중했다. 교향곡? 피아노 없이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되는 선율이 이렇게 들릴 리가…….

“……히약!”

무언가가 무릎에 축축하게 와 닿았다.

난 비명을 지르며 팔을 뻗었다가 신음을 내며 웅크렸다.

“아야…….”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피아노 의자가 보였다. 저기에 팔을 부딪힌 것 같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보니 앉아 있는 벨카가 보인다. 벨카는 혀를 내밀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 우리 지금 조금 어색한 사이여야 하지 않아요?

뭔가 상황 판단이 잘 안 되어서 정신을 차리려던 때였다.

“아가씨!”

난데없는 고함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라 푸르르 어깨를 떨었다.

벨카의 뒤를 따라온 예고르가 이제껏 본 적 없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고르가 급히 다가와 날 일으켜 세운다. 난 그제야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낮다. 난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뻣뻣한 목이 아릿하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아프도 팔도 허리도 온몸이 욱신거린다.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 의자 위에 머리를 대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대체 언제 바닥에 눕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 상태로 스르르 쓰러져선 웅크리고 자 버린 것 같다.

“…….”

당장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한 예고르와 얼굴을 마주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정말 기절했던 건 아니었다. 어딘가 아픈 것도 아니었고. 그냥 조금 잤을 뿐이다. 어떻게 설명하지? 무슨 변명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아하하…… 미안해요. 예고르.”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예,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할 말이 없어서 어떻게 웃어넘기려다가 되레 더 혼났다.

평소의 예고르는 정말 신사답고 나긋나긋한 편이지만 이렇게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한다. 우리 집에 오기 전엔 군의 장교였다고 했었던가……?

난 화를 내는 예고르가 싫었기 때문에 작게 웅얼거렸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연습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냥 조금 잔 거예요.”

“연습에 집중하시는 것도 좋지만 잠은 방에서 주무셔야죠!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잘못했어요.”

예고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호통을 쳤다. 난 찍소리도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내가 체념하고 고개를 숙이자 예고르는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아가씨…….”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예고르가 말했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안 그래도 조심하셔야 하시지 않습니까?”

“예…….”

예고르는 내 건강에 대해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최근엔 예전처럼 감기를 달고 살지도 않았고 굉장히 건강해져서 예고르도 한시름 던 것 같지만, 오늘처럼 이런 일엔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추운 날 난방도 제대로 안 켜시고…….”

안 켰던가? 분명 같이 켰던 것 같은데.

난 그제야 추위를 느꼈다.

“조금 춥네요.”

“조금이요? 농담하십니까?”

일어나서 느껴지는 바닥도 공기도 추웠지만, 잠깐 잠든 사이 난 이런 추위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피아노를 치다가 피로에 지쳐서 잠들었고,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소리에 파묻혀 있던 머리는 잠에 들어서도 소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내 방이었다면 따뜻한 방과 이불 속에서도 추위에 몸서리를 쳤을 텐데, 아마 피아노가 여기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피아노가 날 지켜 준다고 하면 너무 바보 같은 소리일까?

“사실 담요만 덮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제 방보다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

말실수였다.

멀쩡한 방 놔두고 연습실에서 담요 말고 자겠단 말에 조금 누그러들었던 예고르가 다시 역정을 냈다.

“유리 님이 얼마나 슬퍼하실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

“이 일은 알려야겠습니다. 아가씨도 정말 혼이 나셔야…….”

“죄송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한테 그러셔 봐야 소용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예고르, 제발.”

내 어깨를 받쳐 주고 있는 예고르의 팔을 붙잡고 부탁하자 예고르가 인상을 쓴다.

“후…….”

하지만 곧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본다. 예고르는 상당히 엄한 사람이었지만 날 몇 번이고 봐준 적도 많았다.

예고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아가씨.”

내가 진짜 기절하거나 한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봐줄 것 같았다. 난 열렬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보세요.”

그리고 예고르의 손을 당겨 내 이마를 짚었다.

예고르의 커다란 손은 내 이마를 다 덮고도 남았다.

억세고, 조금 서늘한 손이 이마에 맞닿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난 나도 모르게 머리를 부비려다가 발작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있는 예고르가 보인다. 난 손을 들어 내 뺨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열도 없죠?”

난 다만 그렇게 말했다.

예고르가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열은 없군요.”

“그럼 괜찮은 거잖아요?”

“…….”

어서 괜찮다고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예고르는 말해 주지 않았다.

***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오늘따라 에르네스트가 일찍 등교해 있었다. 항상 느지막이 오는 그가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그가 싱그럽게 웃으며 인사해 온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에르네스트.”

마주 인사해 주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항상 앉는 자리는 창가에서 한 칸 떨어진 곳이었다. 창가엔 에르네스트가 걸터앉아 있었다.

“어젠 잘 잤고?”

“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는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어제 갔었던 그곳에 대한 생각이 자꾸 나서 죽을 뻔했어.”

“그곳이요?”

“여기 말야.”

그러면서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꺼내 톡톡 치더니 내 쪽으로 보여 주었다.

거기엔 나와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온통 여자들밖에 없는 디저트 카페에서 자포자기한 에르네스트가 생전에 이런 일이 두 번은 없을 것 같으니 기념사진이라도 남겨야겠다며 찍어 놓은 것이었다.

차라리 없었던 일로 치고 싶을 텐데, 기념사진이라니 이상한 소리 같았지만 어쨌든 에르네스트를 끌고 간 아나스타샤나 나는 책임이 있었으니 그 사진에 같이 찍혀 주었다.

사진 속의 세 명은 즐거워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숨을 쉬더니 주절거렸다.

“디저트 뷔페라니…… 이해가 안 가, 진짜. 이름 자체가 이상하잖아. 식사가 끝나고 나오는 것들을 식사처럼 제공한다는 게 말이 돼?”

“어제도 그 말씀 열 번쯤 하셨던 것 같은데요?”

“백 번쯤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는 오늘따라 묘하게 귀엽게 투덜거렸다. 걸터앉은 아래로 다리를 흔들거리는 것이 귀엽게 느껴져서 난 웃고야 말았다.

“후후…….”

“어라. 웃긴가.”

“아, 죄송해요.”

“아니. 웃어,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지만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이러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그보다…….”

흔들거리던 그의 다리가 딱 멈춘다.

“오늘은 어때?”

“무슨 말씀이신가요?”

“연습 하는 것 말야. 같이 하기로 했었잖아.”

“……예?”

내가 언제?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눈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분명 어제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난 다음에 하자고 했었고.

그 다음은 날짜를 정해 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 없고 안 내켰기 때문이지만, 에르네스트는 달리 받아들인 듯하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기분도 좋아 보이고. 괜찮지 않겠어?”

“전…….”

같은 과 친구와 함께 연습실에 가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난 지금 다른 누구와 함께 무언가 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도.

난 혼자서 피아노로 마음을 날카롭게 다시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난 그런 그를 차갑게 거부할 수 없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도와주신다면 굉장한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에르네스트도 준비하실 것이 많은…….”

“타티아나.”

그가 물었다.

“싫은 건 아니지?”

“…….”

싫을 리가 없잖아요.

“싫지 않아요.”

“그럼 그냥 나랑 같이 하는 게 어때?”

날 유혹한다. 그대로 넘어가서, 그의 앞에서 뭐가 어찌 되든 간에 피아노를 연주해 버린다면, 나와 피아노로 대화하는 것에 익숙한 그는 곧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려 버릴 것이다.

그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지만, 동시에 에르네스트라면 무언가 해결책을 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주자로서의 그라면 분명 피아노로 더…….

지금 내 생각조차 믿을 수가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에르네스트가 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네가 무슨 슬럼프를 겪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도와줄게. 합주를 연습 중이라고 했으니 같이 해 줄 사람이 있으면 편하지 않겠어?”

그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내가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일주일 만에 상당한 궤도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 연습을 했었기 때문이다.

여러 악기가 필요한 곡들은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 효율이 열 배는 더 올라간다.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그 선배들에게 복수도 해야 할 것 아냐?”

“복수……요?”

“복수가 아니라면 뭐라도 좋아. 네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라면 설욕전이라든지, 뭐든 간에 해야지.”

상당히 의외였다.

“어젠…… 잊어버리라 하셨잖아요?”

“잊어버리는 것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말야.”

그가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네 자존심에 이대로 넘어가 져?”

“…….”

그 말에 에르네스트가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 말이 맞았다. 어제 있었던 트리오가 일종의 삼파전 양상의 대결이었다면, 난 완전히 참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아노 주자로 참가해서 그렇게 제 실력도 보이지 못하고, 이대로 선배들과 다시 보지 않는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이렇게까지 말해 줄 줄은 몰랐다. 고마웠다.

하지만 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말씀이신진 알았어요. 하지만 당분간은 혼자 할래요.”

“왜?”

“그냥요.”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솔직하게 말하면 에르네스트가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난 아직 제정신이었다.

간단하게 말하고,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에르네스트가 헛웃음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미안해진다.

하지만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타티아나. 나도 유치하게 굴어 볼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없었으면 너 혼자 연습할 수 있었을까?”

“…….”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생색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약간 벙쪄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별로 창피한 색도 없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맞아요. 그때 일은 정말 감사해요. 에르네스트가 없었다면 전 우승은커녕 예선에서 떨어졌겠죠.”

“어? 어…… 아, 그…… 그렇게 생각해?”

“예.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고맙고.”

나도 대놓고 진심을 말해 버리자 그는 되려 당황해했다.

어물거리더니, 입을 다문다.

“……?”

이렇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라서 나 역시 조금 당황했다. 비행기 태우는 데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하니 이상한 반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가 왁 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어쨌든, 이번에도 똑같아. 같이 하자.”

그는 정말 내 연습을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친구로서 내게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약간 고집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래 굉장히 점잖아졌었던 모습만을 봐 왔던지라, 되레 신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딱 잘라 말했다.

“싫어요.”

“타티아나. 난 네 코치이기도 하잖아.”

“저한테 졌었잖아요.”

“뭐?”

“졌었잖아요. 작년에.”

현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8학년 비공식 1위는 나였다.

사실 별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다.

“아니, 참 어이가 없네.”

“제 말이 틀려요?”

“맞긴 한데…….”

에르네스트가 할 말이 없는지 중얼거렸다. 그 역시 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어필하는 건 처음 본 것이다.

그렇게 머쓱한 듯 목 옆쪽을 만지작거리던 에르네스트가 계속 중얼거렸다.

“준비가 되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거 안 되겠네.”

하아, 한숨을 쉬고 먼 곳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다시 날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

“예.”

“나랑 다시 붙어.”

“싫어요.”

“왜?”

에르네스트가 이제 방심할 리도 없었고, 지금 다시 붙으면 엉망진창으로 깨질 게 뻔한데 내가 미쳤는가?

“지금은 싫어요.”

“그럼 안 싫을 때는 언젠데?”

“저도 몰라요.”

질 걸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찾아오긴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추위에도 적응하고 다시 내 피아노를 자신 있게 끌어내어 상대가 누구든 상관 않고 무자비하게 굴 수 있게 된다면, 그때가 좋겠다.

그렇게 진다면 져도 괜찮았다.

“에르네스트. 어차피 지금 절 이겨 봐야 소용없잖아요.”

“왜 소용이 없어? 난 너랑 전적을 1:1로 만들어 놓는 게 제일 중요한데.”

“와, 진짜…….”

이기고 도망가지 말라는 투의 말은 열 살 이전에 졸업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늘따라 왜 이러세요, 정말?”

“음…….”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고민하는 건지 콧소리를 냈다.

“이게 우리 전공이잖아?”

그렇게 답했다.

맞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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