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루슬란 오빠와 싸우고 아침에 하릴없이 에르네스트를 불러냈을 때도 그는 나와 곧장 놀아주는 것 대신 연습실로 데리고 가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피아노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함머클라비어를 직접 연주해 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우리가 누구고 무엇을 공유하고 있으며,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시켜 준 바 있었다.
에르네스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쇼핑했던 것 역시 즐거웠지만, 난 그래도 그때 연습실에서 에르네스트가 피아노로 들려주었던 진심 어린 조언이 훨씬 깊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처음 기고만장해 있던 그에게 잘난 듯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 이전에 음악가라고 떠들었던 나는, 거꾸로 불과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대로 에르네스트에게 되돌려 받은 것이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솔직한 말로,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이란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성큼성큼 성장해 나가는구나 실감이 들었다.
피아노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갔다.
피아노 실력은 물론이고 인격적으로도 보다 점잖아졌고, 원숙해졌다.
“…….”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실까.
“그래, 좋아. 네 상황도 이해해 줘야지. 컨디션 때문에 도저히 1패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0.5패라도 좋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이없는 소리를 하는 에르네스트를 흘겨보자 그가 찔끔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유치한 그가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조금 곤란했다.
“전 에르네스트와의 전적을 굳히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애초에 전…….”
진짜배기 천재인 에르네스트의 상대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하려다가, 그건 거꾸로 굉장한 실례가 되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난 가장 단순한 이유를 꺼내 들었다.
“저도 만전을 기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 어제 합주 때와 같은 일을 다시 보이고 싶지 않아요.”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날 본다. 그간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본다면 조금 더 집요하게 구는 것도 예상할 만했다.
약간 각오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솔직히 말할까. 그 합주 때 있었던 일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
“…….”
왜 피하는 것이냐며 귀찮게 굴 것이라 생각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 네 피아노가 흔들리는 걸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그래서 들어 봐야겠단 생각이 든 거야.”
그는 생각 이상으로 날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에둘러 날 자극하면서 집요하게 군다면 그건 날 귀찮게 만들 뿐이었다.
상황을 귀찮다고 여겨 버리면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차가워지는지 그는 알았다.
때문에 이렇게 솔직하게 물어 온 것이리라. 솔직한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난 진지하게 대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리니까.
에르네스트가 재차 물었다.
“정 싫다면, 무슨 일로 그런 건지 말해 볼래?”
“…….”
절대 말 할 수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안겼던 이후로 밤마다 추위에 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타협안이라 생각했던 벨카에겐 무시당했고 피아노 소리에까지 문제가 생기고 있다.
심지어 난 어젠 소중한 친구 둘을 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늠하고 계산하기까지 했다.
어떠한 생각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다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난 그것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창피함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게까지 밑바닥을 보일 순 없었다.
“미안해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컨디션이 안 좋은데.”
“저도 그런 날이 있어요.”
“그게 무슨…….”
살짝 답답하다는 듯한 뉘앙스던 에르네스트는 말을 하다 말고 초점 잃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
갑자기 말을 멈춰 버린 에르네스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처음으로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사이 확 붉어진 모습이다.
난 깜짝 놀랐다. 뭔진 몰라도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따라 정말 귀여운 모습 많이 보게 되네요? 에르네스트?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지. 미안.”
“…….”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난 에르네스트가 무엇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지 알아차렸고,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오해를 사는 것도 엄청나게 창피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난 오해를 정정해 줄 수도 없이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
에르네스트가 화장실에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왔고, 그사이 붉은 얼굴은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도 나도 피아노를 주제로 하지 않는다면 이야깃거리가 궁했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말이 끊기진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깃거리들도 곧 바닥을 드러냈고, 난 이번엔 내가 자리를 잠깐 떠야 하나 고민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야!”
“아나스타샤. 어서 와요.”
“왔냐.”
우린 모두 아나스타샤를 반겨 주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활기찬 걸음걸이에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머릿결이 들썩였다가 가라앉는다.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는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날 보고 배시시 웃더니, 곧 에르네스트를 향해 말했다.
“에르네스트 네가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
“난 일찍 오면 안 돼?”
“아니 뭐, 상관없지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소꿉친구이니만큼 서로를 대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날카롭게 묻는다.
“그런데 분위기는 왜 이런데? 너희 둘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니!”
나와 에르네스트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나마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는데, 에르네스트는 의심을 사기 충분할 정도로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쓴다.
“마음에 안 드는데. 에르네스트. 나랑 면담 좀 해야…….”
“아 진짜, 헛소리 작작 해. 어제 나한테 그런 치욕을 주고도 모자라?”
아나스타샤와의 면담은 죽어도 싫은지 에르네스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디저트 뷔페의 일밖에 없다. 아나스타샤는 그 기억을 되새기는 듯하더니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어? 하하, 아하하하. 맞아. 그랬지.”
“웃겨?”
“안 웃고 배겨?”
“웃지 마.”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에게 으르렁거렸다.
난 아나스타샤가 기분 좋게 웃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 당사자인 에르네스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한순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오늘은 에르네스트도 일찍 오고, 난 아침 연습도 했고. 정말 좋은 아침이네.”
“아침 연습이요?”
“응.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지더라고.”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싶었더니, 아침 연습까지 한 모양이다.
“엄마가 놀라서 그러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그랬지. 앞으론 나도 아침 연습 할 거라고. 그랬더니 세상에, 용돈을…….”
그리고 손가락을 네 개 펴 드는데 4천 루블인지 4만 루블인지 그건 모르겠다.
아나스타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밀당을 해야 하는 거겠지? 가끔씩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까 효과가 엄청나잖아?”
“연습은 스스로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용돈은 항상 나오는 게 아니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냥 하는 말에 가깝다. 난 아나스타샤가 연습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말 기분 좋아 보이세요.”
“그래? 그렇게 보여?”
“예. 용돈뿐이 아니라…… 뭔가 다른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좋은 일…….”
분명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신 즐겁게 웃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은 평소 학교에선 참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약간 확신을 가지고 묻자, 내 질문에 조금 고민하던 아나스타샤는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로 돌아보고는, 이윽고 결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일리야 오빠가 말이지…… 대학교에 갈 거래.”
생각지도 못한 뉴스에 나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도 놀라는 것이 보였다.
내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일리야가요? 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
일리야가 나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언가 그의 생각이 바뀐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긴 했는데, 요 며칠간 정말 생각을 해 본 모양이었다.
“갑자기 미술대학엘 가고 싶다고, 어젯밤에 불쑥 그런 이야길 하더라니까? 아빠가 놀라서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넘어지는 걸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와 일리야 사이엔 불화가 조금 있었다. 그 이유가 정확히 어떤 부분이었는지까지 알 순 없지만, 자세히 몰라도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일리야가 그렇게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걸 처음 본 것 같아.”
“일리야가 아버지를 설득했나요?”
“설득이랄 것도 없지. 아빠는 언제든 일리야가 자신의 일을 찾길 기다렸으니까. 그렇게 기뻐하시더니 결국엔 둘이서 술도 거의 두 병도 넘게 마신 것 같더라고.”
왜 기분이 좋았는지, 아침부터 일어나 연습까지 했는지 이해가 갔다.
난 웃으며 말했다.
“이제 걱정하실 일이 없으시겠어요. 아나스타샤.”
“걱정은 무슨 내가 언제……!”
“다행이에요. 정말.”
“응…….”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오빠인 일리야를 내게 소개시켜 주길 꺼렸고 심지어 양아치라고 부르면서 비난했지만, 그래도 일리야에 대한 걱정은 늘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대학교도 아무나 가나? 그만한 실력이 되어야지……. 그러니까 붙어야 해결이 될 일이겠지만…….”
날 보면서 아나스타샤가 작게 말했다.
“고마워, 타티아나.”
“……?”
“잘 모르겠지만…… 일리야가 마음을 고쳐먹은 건 다 네 덕분이야. 난 알아.”
일리야가 직접 이야기를 한 것 같진 않다. 다만, 어떠한 계기가 있다면 그건 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쨌건 일리야는 내 오빠니까…… 내가 확실하게 고맙다고 하는 게 맞겠지.”
“아나스타샤…….”
난 약간 부끄러워졌다. 내가 일리야와 이런저런 낯 뜨거운 이야기를 했었던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에게 생각이 없었다면 내가 무슨 소릴 하든 의미 없었을 것이다.
결국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은 일리야 자신이었다.
새삼 그때 보았던 그의 그래피티를 떠올리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짐짓 예민하게 말했다.
“그래도 일리야는 조심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요. 아나스타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야가 아나스타샤의 오빠가 아니었다면 쉽게 가까이하진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는 듯했지만, 영 미심쩍어하는 눈치다. 난 그런 그녀의 눈초리를 본 적이 있었다.
평상복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날 발견했을 그 눈빛이다. 난 조금 어깨를 움츠린다.
저런 눈빛을 하고 난 뒤 그녀는 말로 해선 안 되겠다며 날 끌어당겼다.
아나스타샤 역시 굉장히 어렵게 한 일이겠지만, 그 일이 내게 얼마나 큰 후유증을 남겼는지 그녀가 안다면…….
슬퍼할까?
아니면 기뻐할까?
잘 모르겠다.
“잠깐, 잠깐.”
나와 아나스타샤가 둘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자 멍하니 있던 에르네스트가 그제야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대꾸했다.
“뭐야?”
“이상한 말이 들리는데. 타티아나가 뭘 했다고?”
에르네스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넌 몰라도 되는 일이야.”
“일리야 형 이야기에 타티아나가 왜 나오는 거야?”
“나올 만하니까 나왔지. 왜.”
“아니…… 그 형…….”
에르네스트가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소꿉친구였다. 에르네스트에겐 일리야에 대한 기억이 있는 듯했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리야와 에르네스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했지만, 무턱대고 물어보는 것도 미안했다.
난 입을 다물었고,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다가 결국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 형이 벌써 대학교 갈 나이던가?”
“일리야가 에르네스트 너랑 본 지는 좀 오래되긴 했었지. 왜, 궁금해? 일리야가 요즘 뭐 하고 사는지?”
“어? 아니? 전혀?”
에르네스트가 손사래까지 쳐 가면서 거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리야와 만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대신 그는 날 보며 말했다.
“집에 갔었나 보네.”
“예. 저번 주말에요.”
에르네스트는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이긴 했지만, 곧 표정을 풀고 웃었다.
요 근래 축 가라앉아 있던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나 나쁜 일만 있진 않은 것이다.
예상컨대 꽤 긴 시간 동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던 일리야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었고, 응원해야 할 일이었다.
난 일리야가 무엇을 하든 잘할 수 있길 기도했다.